... 신경증자, 변태, 정신병자에 대해 현실적으로 충분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은 확실히 충동들과의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충동들은 그저 욕망 기계들 자체이기 대문이다. 충분한 정의는 현대의 영토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내릴 수 있다. 신경증자는 우리 사회의 잔여적 또는 인조적 영토성들에 설치되어 있으며, 이것을 모두를 궁극적 영토성인 오이디푸스로 복귀시킨다. 이 오이디푸스는 분석가의 진료실에서 정신분석가의 충만한 몸 위에서 재구성된다(예. 보호자는 아버지요, 국가의 수장도 그렇고요, 또 의사 선생님 당신도 그래요...) 변태란 말 그대로 책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그것들을 원한다면 가질 것이오, 사회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들보다 무한히 더 인공적인 영토성들, 무한히 인공적인 새 가족들, 비밀스러운 달나라의 사회들 말이오.
분열자에 관해 말하자면, 끊임없이 이동하고 헤매고 비틀거리는 그의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보아, 그는 자신의 기관 없는 몸 위에서 사회체의 해체를 무한히 추구하여 늘 탈영토화 속으로 더 멀리 가는 자이다. 또한 분열자의산책은 아마도 그가 자신의 대지를 재발견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다. 분열자는 자본주의의 극한에 매달려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발전된 경향성이요 잉여생산물이요 프롤레타리아요 또 죽음의 화신이다. 그는 모든 코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욕망의 칼코드화된 흐름들을 데려온다. 현실계는 흐른다. 우리는 자연 안에 있는 또는 대지의 심장부에 있는 <악령>과 접촉시키는 형이상학적 과정과, 탈영토화된 사회 기계와 관련해서 욕망 기계들에 자율성을 회복시켜 주는 사회적 생산의 역사적 과정이라는, 과정의 두 양상이 합류한다.
분열증. 그것은 사회적 생산으로서 욕망적 생산이다. 따라서 욕망적 생산 및 그것과 사회적 생산의 체제 차이는 끝에 있지 처음에 있지 않다. 이 두 생산 사이에는 현실의 생성이라는 단일한 생성만이 있다. 그리고 유물론적 정신의학이 욕망 속에 생산 개념의 도입이라고 정의된다면, 그것은 분석 기계, 혁명 기계, 욕망 기계들 사이의 최종 관계라는 문제를 종말론적 견지에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
『안티 오이디푸스』(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민음사 · 2014년 · 원제 : L’Anti-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72년) <1장 욕망 기계들> p.7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