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문학]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 '여성'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by 이우 posted Jun 07, 2018 Views 1143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책_나의우파니샤드서울_900.jpg


  自序
 
  시는 아마 길로 뭉쳐진 내 몸을 찬찬히 풀어,
  다시 그대에게 길 내어주는,
  그런 언술의 길인가보다.
  나는 다시 내 엉킨 몸을 풀어
  그대 발 아래 삼겹 사겹의 길을……
 
  그 누구도 아닌 그대들에게,
  이 도시 미궁에
  또 길 하나 보태느라 분주한 그대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너 이 놈, 나 죽었다는 말 못 들었니?
  나쁜 놈, 내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1994년 5월
  김혜순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서문



  新派로 가는 길 5
  김혜순


  걸어서 저 하늘까지
  저 하늘의 구름城까지 걸어가요
  저 구름城의 모습, 바로 내 모습이에요
  나는 걸어서 저 하늘의 내 안으로 들어가요
  구름城 문이 소리없이 닫히고
  城안에 나는 한없이 갇혀요
  뭉실뭉싯 살이 찌기도 해요 배가 부풀어오르고
  어느 날 살찐 아기가 튀어나오기도 해요 장딴지가
  파르테논 신전 기둥만해졌어요
  차암, 낯뜨거운 날 창문 열고
  나 한번 쳐다본 적 있으셨겠지요
  거 구름 한번 좋다 하셨겠지요?
  그러나 햇빛 양의 치맛자락 아래 그냥 그대 뜨거우시라
  놔두면서 나 혼자 마구 젖었던 거
  구름 기둥 같은 두 다리 싸안고 이리저리 뒹글었던 거
  보신 적 없다 말하진 않으시겠지요?
  내리지 않는 비로 누워서
  혼자 소용돌이치다 혼자 온몸 다 젖었던 거
  빗소리 어디서 아마득히 들리는데
  빨랫줄의 그대 속옷 하나 안 젖는 날
  있었던 거 생각나셨겠지요?
  큰 소리 마른 번개로 눈물 없이 울던 거
  말하려면 할수록 활자와 단어들이
  후드득 후드륵 뚱뚱한 내 뱃속으로 떨어지던 거
  입 안에 침만 고이던 거
  어느 날인가는 파랗게 눈 닦고
  그대 양철 지붕만 망연히 어루만지던 거
  차마 알아채지 못했다고는 안 하시겠지요?
  날마다 슬픔의 몸 바꾸며 소리쳐도
  내 몸 밖으로 물길 열리지 않던 거, 보셨겠지요?
  내 길 열어 그대 머릿결 따라 길을 내고
  그대 뺨 위로 길을 내고 싶어 눈 껌벅이던 거,
  이제 몇십번째의 이승길 걸은 듯하고
  저 높은 산 저 깊은 계속 저 神話의 굽이굽이
  다 지난 듯하여 水面 위에 내 말의 꽃 끝내 못 피우고
  그대 지붕 위에 물꽃 소리 못 피우던 거
  내 몸 혼자 뒤채고 부풀리던 거
  정녕 모르신다곤 않겠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30~31



  아직도 서 있는 죽은 나무
  김혜순


  초승달의 눈썹이 깜빡깜빡
  열렸다 닫히면서
  애무에 젖는다
  보이지 않는 구름의 손이
  보이지 않는 달의 몸을 만지듯
  달은 칠흑의 허랑방천으로
  천천히 밀리면서
  낌빡깜빡 죽었다 깨어난다

  은은히 숲 속의 나무들이
  달의 발가락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어두운 밤의 난간에 기댄
  죽은 나무가 아직도 눕지 않고 서서
  문틈으로 깜빡거리는
  눈썹을 보며
  밤새도록 흐르는 달의
  살을 훔친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6



  어쩌면 좋아, 이 무서운 아버지를
  김혜순


  얘야
  천년 묵은 여우는 백 사람을 잡아먹고
  여자가 되고, 여자 시인인 나는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만 아버지가 되었구나
  (망측해라, 이제 얼굴에 수염까지 돋게 생겼구나)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 허구의 이빨로 갈아놓은
  문장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나 두리번거릴 때
  거기서 문장의 사이로
  나귀를 타고 걸어 들어오는 너의 모습
  엘리엘리

  너 심겨진 밭에 약을 치고 돌아오는 아버지
  네 팔을 잘라 나뭇단을 만드는 아버지
  네 밑동을 잘라 제재소에 보내는 아버지
  양손이 사나운 칼날인 아버지
  큰 구두를 신어 디뎌야 할 땅도 많은 아버지
  나하고 놀아요, 아버지
  하면 깜짝 놀라는 아버지
  나 아버지가 되기 싫어 크 소리로 말해도
  이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살해했으므로 그만
  아버지가 되어버린 아버지
  경찰 커튼 아버지 겈정 잉크 아버지 기계 심장 아버지
  칼날같이 갈아진 양손을 모두어야
  비로소 제 가슴이 찔러지는 그런 아버지
  얘야, 나는 그런 망측한 아버지가 되었구나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9~50


  사월 초파일
  김혜순


  저 아카시아 흐드러지게 터진 골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노고단
  지붕마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올라서서 수만 깃발처럼 펄럭거리네


  엄숙하고 경건한 장례 행력 거대한 영정 뒤로 상복을 입은 가족을 실은 검은 승용차 얘야 얘야 못 간다 에미 에비 뇌두고 네 맘대로 못 간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수천 개의 휘날리는 만장들 뒤를 이어 대오를 지은 수만 명의 조문객들 검은 리본을 단 연도의 시민들 이곳을 주검이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시나리오대로 길을 막는 방석모 방패 삼십 분 안에 행렬을 돌리지 않으면 최류탄을 발사하겠습니다 걔는 안 죽었어 이놈들아 한정 없이 살 거야


  땡볕 아래 한없는 대치 아스팔트에 앉거나 눕는 행렬 장기전이 될 거야 그 사이로 김밥장수 커피장수 마스크를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시루떡을 팔러 온 할머니의 양은 다라이 죽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처녀 아울러 김밥과 콜라를 먹는 조문객들 저녁 시간이야 흐르러지는 대오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껌을 파는 아이들 신문을 파는 청년들 그 신문으로 모자를 접는 여학생들 두둑해진 전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담배장수 시장보다 김밥 값이 두 배야 바가지야 여기가 해수욕장이냐 그 사이로 성스런 초파일의 연등 행렬 등장 낭랑한 반야심경 합장 어스름 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류탄 발사


  흐트러지는 대오 뛰는 아가씨의 벗겨지는 하이힐 우는 아이 탱탱 드럼통처럼 구르며 뜨거운 커피를 아스팔트 위에 쏟는 보온 물통 그걸 잡으려 뛰는 커피장수 밟히는 콜라 깡통 터진 김밥을 밟는 구두 골목으로 잠입하는 대오 두건을 쓴 사람들의 백 미터 이백 미터 달리기 어디서 물 쏟아지는 소리 깨어지는 떡시루 장삼을 펄럭이며 혹은 연등을 들고 혹은 연등을 버리고 뛰는 중들 연등 위로 넘어지는 옥색 한복 뜯기는 자주 옷고름 노랑 저고리에 붙는 불을 탁탁 손으로 치며 우는 여고생 연등을 밟는 검은 버선 전속력으로 우회하는 검은 지프


  큰일이 나긴 난 모양이야 저 연기
  바람 따라 퍼질 때마다
  눈발이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네
  설악 대폭설 때처럼 저 나방Ep
  흩어지는 너 나방떼
  먹으로 달려드는 저 새떼 먹으러
  하늘 검게 칠하며 돌처럼 달려드는
  저 자동차떼
  막혔다 터져 흐르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72~74



  서울
  김혜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마치, 난자를 만난 정자가 그녀의 집에 영원히 체포되듯 너는 거기에 속해 있다. 내부의 사람이면 누구나 유리문을 밀고 나가 또 하나의 유리문을 향해 걸어가야 하며, 그곳을 나와서도 또 하나의 유리문을 열어야 한다. 밤이 오면 어떤 유리문들은 네온 사인을 달고 여기가 정말 출구예요 말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길 잃은 파리가 윙윙거리는 방안에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이 뒤엉켜 누워 있고, 어떤 방문을 열면 네 시신 위로 구더기들이 한없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유리문은 빗속을 맹렬히 달려 너는 잦은 머리칼을 흔들며 죽어라 그 문을 향해 뛰기도 해야 하고, 어떤 유리문은 지하 깊숙이 미로를 개설하기도 한다. 지하 미로의 매달린 문들의 이름을 믿지 마라. 어떤 문엔 친절하게도 오류역이라 적혀 있기도 하고, 혹은 어떤 문엔 십리를 더 가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말을 믿지 마라. 이곳의 사람은 아무도 출구를 모른다. 설탕병에 빠진 개미처럼. 알생의 시간을 다 플어내어 만든 실뭉치 속에 숨어든 파리처럼. 이곳 가슴의 미궁은 그리 넓지 않아 새벽 네시경, 두 시간이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주파할 수 있지만 몸 밖으로 출구를 찾은 사람은 아직 없다. 가슴속 투명한 미궁의 주인은 오늘 또 세간살이를 몽땅 싣고 정읍에서 올라온 다섯 식구를 접수한다. 그들도 이제 들어왔으므로 출구를 모르리라. 미궁의 유리문들이 점점 늘어난다. 길 위에 길이 세워지고, 물길 아래 물길이 세워진다. 너는 늘 떠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벙어리 네 그림자는 말하리라. 땅바닥에 누워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 말하리라. 이 길로 가서는 안 돼요. 그림자 언제나 길은 틀렸어요 말한다. 날마다 복선이 증가한다. 유리벽에 뭘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기려 하고 있구나.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데……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2~93



  新派로 가는 길 1
  김혜순


  종점 옆의 아파트에선 안 봐도 알지요. 이부을 덮고 그 위에다 잠을 덮고 있어도 다 알지요. 첫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 아직 잠이 들깬 조수가 내 귓속에서 하품을 아! 하는 소리. 그리고 내 속에서 w마들었던 당신이 외양간 문을 열고 나를 끌고 나오는 모습. 버스 위로 고무 호스 속의 물이 쏴아쏴아 쏟아지고 물걸레가 내 귓속을 쓰윽쓰윽 닦는 소리. 다시 물이 유리창을 타고 내리면서 어젯밤 내내 달라붙어 있던 내 눈길을 닦아내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커다란 솔로 내 가슴을 쓱쓱 쓰어주는 것. 아직도 어둠을 질질 흘리고 있는 버스를 다시 주유소 앞으로 끌고 가 덜컹 기름통 여는 소리. 이빠이 넣어 하는 소리 안 들려도 나는 다 듣지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끌고 논둑길을 걸어가는 것. 나를 잠시 버드나무에 매어두고 샘물에서 물 한 바가지 떠 벌컥벌컥 마시는 것. 당신이 내 숨을 꼴깍꼴깍 넘어오는 소리. 당신 바짓가랑이를 점점이 적시는 물. 돈통을 든 남자가 슬피러를 지이익 끌며 버스로 가다말고 네 귓속으로 침을 칙 뱉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당신 가슴을 쓸며 눈을 들어 머얼리 마을 앞 행길을 바라보는 것. 아 당신의 눈동자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행길. 다시 그 눈으로 망초꽃밭 한번 쳐다보는 것. 버스가 아무도 서 있지 않은 첫 정류장을 지나 귀 밖을 나서는 소리. 버스 꽁무니에서 솟아나는 어둠이 잠시 행길을 가리는 것 나는 다 보지요. 누워서도 다 보지요. 그리고 당신이 다시 나를 끌고 개울을 거너는 것. 윗옷 밑으로 빠져나온 희디흰 러닝셔츠. 나는 누워서 다 보지요. 당신이 지나온 망초꽃밭의 꽃들이 제각각 진저리를 치며 어둠을 털어내고 애타게 당신을 바라보는 것 나는 다 보지요. 시발점이라 하지 않고 종점이라 하는 종점 옆의 아피트에 누워선 안 봐도 다 알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9~100



  新派로 가는 길 4
  김혜순


  하얀 눈. 하얀 토끼. 밤새 하얀 눈 내려 하얀 밤. 하얀 토끼가 하얀 철창 바라보네. 하얀 가운. 하얀 시트. 하얀 팔뚝. 하얀 모자. 하얀 스커트. 돌아서는 하얀 종아리. 하얀 샌들. 하얀 눈 내려 난 하얀 아기를 낳았네. 하얀 우산을 쓰고 먹는 하얀 밥. 하얀 피 만드는 하얀 약., 나는 먹었네. 하얀 눈 속의 하얀 하나님, 창문만큼 높아지고. 라얀 눈 속의 하얀 비밀 있어요. 하얀 이불. 하얀 땀. 하얀 코. 하얀 우유 속에 우얀 쥐 너무 많아요. 하얀 숨 막혀요. 하얀 눈 자꾸 내려 길 없어요. 하얀 악마, 하얀 지옥. 너무 멀어요. 하얀 하품. 하얀 잠. 하얀 붕대를 풀어주세요. 하얀 종이 위의 하얀 글씨, 내 하얀 시를 지워야지. 하얀 하나님 무심한 순결, 내 피의 길을 밖으로 열어요.


  참 용하지
  매일 아침마다 하얀 눈꺼풀 열고 하얀 치약을 짜 하얀 이빨에 들이대면서
  하얀 장막을 찢고 대문을 나서는 거


  하얀 눈 속의 하얀 삽. 하얀 집 한 채. 하얀 창문. 하얀 커튼 속의 하얀 등. 하얀 할아버지 드세요. 하얀 맛나. 하얀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엄마 하얀 나비 좀 보세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제 며칠째야. 하얀 엄마. 하얀 기침. 하얀 한숨. 하얀 젖가슴. 하얀 귀 뒤를 타고 내리는 하얀 눈가루. 책상 위에 소복소복. 하얀 눈 내리네. 하얀 처녀의 하얀 웃음. 차곡차곡 내려 쌓이는 하얀 새. 그 새들의 감은 눈. 하얀 새가 내리눌러요. 무거워요. 이불 좀 치워 주세요. 바닷속에 해파리들이 늘어나요. 묵처럼 단단해지는 바다. 하얀 바다. 하얀 가루처럼 부서지는 바다. 하얀 모래 위의 하얀 토끼. 하얀 팔뚝. 하얀 주사기.


  눈이 차오르네
  하얀 눈벽이 차오르네
  그래도 나 자꾸만 하얀 벽을 드높이 드높이
  오오랜 내 문명의 끝은 어디인가요?
  부드러움의 지옥
  하얀 설탕 지옥에 빠진 흰 개미
  녹아내리는 하얀 설탕
  하얀 개미를 꿀처럼 결박하는 하얀 설탕 지옥
  숨이 막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05~107



  강변 포장마차
  김혜순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그 안으로 담배꽁초가 들어간다. 시들은 국화꽃이 구겨져서 들어간다. 코 푼 휴지가 들어간다. 쉰밥덩이가 들어간다. 남은 곱창이 쏟아진다. 국수 가닥이 말라비틀어져 들어간다.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단발머리가 들어간다. 말장화가 들어간다. 백납 같은 비구니 둘이 들어간다. 취한 얼굴이 트림을 데불고 들어간다. 문이 닫히려 할 때 아이 업은 여자가 들어간다. 쓰레기 봉지 안으로 씹다 버린 껌이 들어온다. 사과 깡치가 들어온다. 까만 하늘의 별도 들어온다.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가 나와 봉지를 묶어놓고 들어간다. 생리대와 생선 대가리 사이에서 인광이 터졌다가 제풀에 사라진다. 뭉게뭉게 냄새가 섞이고 아이의 머리가 불끈 솟은 다음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까만 하늘엔 까만 별이 뜨고, 파아란 하늘엔 파아란 별이 뜬다. 승객을 모두 바꾼 을지로 순환 전철은 88분 후에 정확히 강변역에서 다시 멈춘다.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높이 뜬 역 구내로 생리대가 올라간다. 생선 대가리가 올라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1



  황학동 재생고무공업사
  김혜순


  머리와 꼬리가 다르지 않은 뱀들
  입과 항문이 다 구멍인 저 뱀들
  칼로 내리쳐도 각각 다시
  살아나서 꿈틀거리는
  저 검은 고무 호스들
  불 꺼진 집
  한 칸을 가즉 채운
  구부러진 백만 마리의 뱀들
  눈꼽 낀 흑구렁이들
  그 중 긴 것은 시베리아에 머리를 두고
  부산 앞바다에 꼬리를 둔 것도 있다 하고
  땅 및 서울을 몇 바퀴나 빙빙 도는 징그러운 놈도 있다고 하지만
  이제 죽어 천 토막 만 토막 난 것들
  스쳐가는 오토바이의 불빛에
  잠시 등가죽에 붙은 애꾸눈으로
  창문 밖을 홀기는
  저 녹슨 구름 연통들, 혹은
  팽팽하게 긴장하며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쾌락에 전신을 맡기며, 또아리를 풀고
  힘차게 힘차게 땅속 깊은 곳의 물줄기를
  넓디넓은 정원 위에 내뿜던
  이제 갈갈리 찢어진 壯士들의 주둥이들
  주머니가 없어 욕망도 더 큰 검은 구멍 동체들
  이제 대낮이 와도
  머리와 꼬리 사이가 늘 밤인 저 연놈들
  어둠의 서식처들
  황학동 재생고무호스공업사 가득
  엉켜 잠들었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4~115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김혜순


  1.
  아침 일곱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동그랗구나
  숟가락들엔 모두 손잡이가 달렸다
  시끄러운 아스팔트 옆
  저 늙은 나무엔 일천이백만 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파리들이 달렸다


  2.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서울사람들, 두 귀를
  가죽배의 방향타처럼 쫑긋거리며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 속을 넘너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한밤중 서울의 일천이백만 개의 무덤은 인중 아래
  모두 봉긋하고 오오오
  또 한강은 일번이백만의 썩은 무덤 속을 헤엄쳐나온
  일천이백만 드럼의 정액을 싣고 조용히 내일로 떠난다


  다시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내다 걸면
  일청이백만 쌍의 태양이 눈을 번쩍 뜨고
  저 내장들의 땅속 지하 삼천 미터까지
  빛살 무늬 거룩하게 새겨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25~127











  1. 12
    Oct 2019
    02:53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제7판 서론* :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교차점, 기억

    (...) 이 책은 정신(esprit)과 물질(matiers)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전자와 후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정확한 예증, 즉 기억이라는 예증 위에서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히 이원론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책은 물체(corps)와 정신을, 이...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20178 file
    Read More
  2. 09
    Aug 2019
    02:22

    [철학] 니체의 「아침놀」 : 철학자

    468. 아름다움의 나라는 더 크다―우리는 모든 것에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즉 그 아름다움을 현장에서 붙잡기 위해 자연 속을 교활하면서도 유쾌하게 돌아다닌다. 또한 우리는 어떤 때는 햇볕 아래서, 어떤 때는 폭풍우가 올 것 같은 하늘 아래서,...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35610 file
    Read More
  3. 31
    Jul 2019
    08:43

    [사회]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 파리 좌안 1940-50』 : 사르트르와 카뮈가 본 미국 사회

    (...) 1945년 초부터 1946년 여름 사이에 사르트르는 미국을 두 번 방문했다. 합쳐서 거의 6개월을 보냈고 뉴욕에 여자 친구도 있었고, 전국을 돌며 최고 명문대학 여러 곳에서 강연했다. (중략) 사르트르는 미국에 심취했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 문학, 영화...
    Category기타 By이우 Views14272 file
    Read More
  4. 31
    Jul 2019
    06:15

    [사회]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 파리 좌안 1940-50』 : 보부아르가 본 미국 사회

    (...) 리처드 라이트는 미국 순회강연의 첫 행선지인 뉴욕에 오는 시몬 드 보부아르를 환영하고 그녀와 정치를 논할 일을 고대했다. 그녀는 미국 여행을 위해 열을 내며 짐을 쌌다. 생애 처음으로 그녀는 경솔하게 행동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미웠다. 미국 여...
    Category기타 By이우 Views15113 file
    Read More
  5. 30
    Jul 2019
    23:19

    [사회]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 파리 좌안 1940-50』 : 사회민주주의·초현실주의, 혹은 추상미술

    (...) 1945년 10월 총선에서 프랑스 여성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했으며, 알베르 카뮈는 <<콩바>> 독자들에게 더 나은 선택이 없으므로 비공산 계열 사회주의자들에게 투표하기를 촉구했다. 그는 샤를 드골을 존경했지만 평화의 시기에 군 장성이 정치에 ...
    Category기타 By이우 Views17545 file
    Read More
  6. 25
    Jul 2019
    11:17

    [철학] 니체의 「아침놀」 : 노동과 자본

    203. 나쁜 식사법에 대한 반대―호텔에서든 사회의 상류층이 사는 어느 곳에서든 현재 사람들이 하는 식사는 엉망이다! 크게 존경받을만한 학자들이 모일 경우에조차 그들의 식탁은 은행가의 식탁과 동일하게 가득 채워진다. 다량으로 그리고 다양하게. 이것이...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2496 file
    Read More
  7. 21
    Jul 2019
    19:54

    [사회]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 수집가

    (...) 이러한 아케이드의 내부 공간은 종종 시대에 뒤쳐져가는 업종들의 피신처가 되는데, 지금 잘 나가고 있는 장사도 그러한 공간에서 왠지 낡고 허름한 분위기를 띠게 될 것이다. 이곳은 기업 상담소와 흥신소의 소굴로, 이들은 2층의 갤러리에서 내리비추...
    Category기타 By이우 Views18048 file
    Read More
  8. 18
    Jul 2019
    21:17

    [철학] 니체의 「아침놀」 : 사회·국가·경제·정치·노동·법·예술, 그리고 고독

    171. 근대인의 음식물―근대인은 많은 것을,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소화할 줄 안다. 이것이 야심의 근대적인 형태다. 그러나 그가 거의 모든 것을 소화할 줄 모른다면 그는 좀더 고차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먹는 인간(Homo pamphagus)은 가장 세련된 종이 아니...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7953 file
    Read More
  9. 13
    Jul 2019
    15:05

    [사회]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 파리 좌안 1940-50』 : 1940년~50년 파리의 풍경

    (...) 『파리 좌안 1940-50』은 1905년~30년 사이에 태어나 1940~50년 사이에 파리에서 살고, 사랑하고, 싸우고, 놀고, 활약했으며 그때 내놓은 지적, 예술적 산출물로 지금까지 계속 우리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심지어 옷 입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Category기타 By이우 Views17852 file
    Read More
  10. 06
    Jul 2019
    23:07

    [철학] 니체의 『유고 (1870년-1873년)』 : 철학

    (...) 철학적 체계들은 오직 그 창설자에게만 전적으로 참이다. 훗날의 모든 철학자에게 그것은 으레 위대한 오류이고, 우둔한 사람들에게는 오류와 진리의 합계이다. (중략) 많은 사람들은 어떤 철학자라고 할지라도 비난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목표가 아...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33735 file
    Read More
  11. 04
    Jul 2019
    16:37

    [철학] 니체의 『유고 (1870년-1873년)』 : 경쟁 · 시기 · 질투 , 그리고 국가

    (...) 우리가 인간성에 관해 말할 때는 그것이 이미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시켜 특정짓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적 특성들과 본래 인간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들은 떼어놓을 수 없을...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55160 file
    Read More
  12. 03
    Jul 2019
    02:14

    [철학] 니체의 『유고 (1870년-1873년)』 : 노동존엄성과 노동, 폭력과 국가, 그리고 전쟁의 비밀스러운 상관관계

    (...) 신세대들인 우리는 그리스인들보다 두 가지 개념을 더 가지고 있는데, 이 개념들은 말하자면 완전히 노예처럼 행동하면서도 '노예'라는 낱말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세계를 위로하는 수단으로 주어져 있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존엄'에 관해 ...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7322 file
    Read More
  13. 25
    Jun 2019
    02:51

    [철학] 니체의 「아침놀」 : 서문 · 당신은 왜 고독한가?

    1.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며,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향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54477 file
    Read More
  14. 22
    Jun 2019
    02:33

    [문학] 시인 김수영, 「詩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詩의 존재」

    (...)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 오늘의 세미나*의 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Category문학 By이우 Views8578 file
    Read More
  15. 29
    May 2019
    18:32

    [철학] 니체의 『유고 (1870년-1873년)』 : 비극의 탄생 · 비극적 사유의 탄생

    (...) 자신들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런 이론을 자신들의 신들을 통해 동시에 숨겼던 그리스인들은 예술의 이중적 원천으로 두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내세웠다. 예술의 영역에서 이 이름들은 대립되는 양식들을 대변한다. 이 양식들은 상호투쟁 ...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5104 file
    Read More
  16. 29
    May 2019
    08:05

    [철학] 니체의 『유고 (1870년-1873년)』 : 예술의 탄생·디오니소스적 세계관

    (...) 자신들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런 이론을 자신들의 신을 통해 말하고 동시에 숨겼던 그리스인들은 예술의 이중적 원천으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두 신을 내세웠다. 예술의 영역에서 이 이름들은 대립되는 양식들을 대변한다. 이 양식들은 상호투...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8474 file
    Read More
  17. 17
    May 2019
    00:56

    [철학] 칸트의 『판단력 비판』 : 자연의 최종 목적

    (...) 우리는 앞 조항에서, 우리가 인간을 모든 유기적 존재자들들과 같이 한낱 자연목적으로뿐만 아니라, 이성의 원칙들에 따르면, 여기 지상에서는 그것과 관계해서 여타 모든 자연사물들이 목적들의 체계를 이루는, 자연의 최종목적으로, 비록 규정적 판단...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6313 file
    Read More
  18. 16
    May 2019
    04:43

    [철학]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 유기체와 지층

    (...) 우리는 한 지층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무엇이 한 지층에 통일성과 다양성을 부여하는가? 질료, 고른판(또는 안고른판)이라는 순수 질료는 지층들 바깥에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한 지층 안에서 분자들은 ...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3799 file
    Read More
  19. 05
    May 2019
    01:05

    [철학] 칸트의 『판단력 비판』 : 자연의 외적 합목적성과 내적 합목적성

    (...) 한 사물이 오직 목적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 사물의 기원의 원인성을 자연의 기계성이 아니라 그 작용능력이 개념들에 의해 규정되는 어떤 원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이 요구된...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6994 file
    Read More
  20. 25
    Apr 2019
    21:48

    [철학] 칸트의 『판단력 비판』 : 예술의 구분과 가치 비교

    $51. 미적기예(예술)들의 구분에 대하여 (...)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를 자연미가 됐든 예술미가 됐든 미감적 이념들의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예술에서는 이 이념이 객관에 대한 하나의 개념에 의해 유발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22222 file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5 Next
/ 25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