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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슬픔

by 이우 posted Jan 15, 2018 Views 3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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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베르트의 징긋한 얼굴을 보는 짧은 순간에 비해, 그녀가 우리의 화해를 시도할 것이며, 심지어는 우리 약혼까지 제안하는 모습을 내가 꾸며 내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상상력이 미래를 향해 끌어가는 이 힘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실 과거로부터 길어 온 것이다. 질베르트가 어깨를 추켜올리던 모습을 보았던 아픔이 조금식 지워져 갈수록 그녀의 매력에 대한 추억, 그녀를 내 쪽으로 다시 오게 하고 싶었던 추억도 조금식 작아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런 과거의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미워한다고 믿었던 여자를 실은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머리 모양이 멋있다든가 안색이 좋다고 말할 때면 그녀도 거기 있었으면 싶었다.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내게 초대 의사를 표해 왔는데 귀찮아서 모두 거절했다. 집에서는 내가 어버지를 따라 공식 만찬에 가지 않는다고 한바탕 언쟁이 벌어졌는데, 그 만찬에는 붕탕부부가 그 무렵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던 조카딸 알 베르틴과 함께 참석하기로 했었다. 이처럼 우리 삶의 여러 시기는 서로 겹치곤 한다. 지금은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아무 상관도 없을 여인 때문에, 현재는 상관 없지만 앞으로 살아하게 될 여인을 건방지게 거절한 것이다. (중략)

  슬픔이 약해지면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이런 시기에는 그 사람에 대한 집요한 상념에서 야기되는 슬픔과, 어떤 추억으로 인한 슬픔, 이를테면 그녀 입에서 나온 심술궂은 말이나 우리가 받은 편지에 쓰인 이런저런 동사(動詞) 때문에 야기되는 슬픔을 구별해야 한다. 이런 슬픔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서는 다음 사랑의 기회에 묘사하도록 남겨 놓고, 우선은 이 두 슬픔 가운데 첫 번째 슬픔이 두 번째 슬픔보다 훨씬 덜 잔인하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마음 속에 늘 머무는 그 사람에 대한 관념이 우리가 지체하지 않고 바치는 후광으로 치장되면서 자주 희망의 감미로움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항구적인 슬픔의 고요함을 우리 마음에 새겨놓기 때문이다. (중략)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관념이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지성의 빛을 부여받는데 비해, 심술궂은 말이나 적의에 찬 편지처럼 개별적인 추억들은 지성의 빛을 부여받지 못한다.(비록 질베르트로부터는 단 한 번밖에 그런 편지를 받지 않았지만.) 그 사람 자체가 이렇게 축소된 추억의 조각 안에 머무르면서 어떤 강력한 힘으로 확대되어, 우리가 그 사람 전체에 대해 형성하는 통상적인 관념의 힘을 훨신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움이라는 우수에 젖은 고요함 속에서 읽고 또 탐독되기 때문이다.

  이런 슬픔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다. 그 슬픔은 밖에서 오며 가장 잔인한 고뇌의 길을 통해 우리 마음까지 도달한다. 우리가 오래된 진본이라고 믿는 여자 친구의 이미지도 실제로는 우리가 여러 번 다시 만들어 낸 것이다. 잔인한 추억은 이처럼 다시 만들어 낸 이미지와 동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 속하며 우리의 괴물과도 같은 과거를 아는 드문 증인 중 하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화해하는 낙원, 경이로운 황금시대로 바꾸고 싶어하는 우리 마음 속을 제외하고 이 과거는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그 추억이며 편지는 우리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고 또 그로 인해 갑작스레 느끼는 아픔을 통해 나날이 미친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우리 모습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느끼게 할 것이다.

  물론 가끔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현실이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삶에는 결코 다시 만나려고 애쓴 적이 업는 여인들도 많으며, 우리가 결코 운치 않은 침묵에 같은 침묵으로 자연스럽게 응하는 여인들도 많다. 다만 그때 우리는 그 여인들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그들로부터 떨어져 지낸 시간을 계산하지 않았을 뿐이다. (...)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 민음사 · 2016년  · 원제 :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제3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1> p.347~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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