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은 온갖 종류의 원료들, 노동 기구들, 생활 수단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원료들, 새로운 노동도구들, 새로운 생활 수단들을 산출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들이다. 자본의 이 모든 구성 부분들은 노동의 피조물들, 노동의 생산물들, 퇴적된 노동이다. 새로운 생산에 수단으로 쓰이는 퇴적된 노동이 자본이다."
위와 같이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흑인 노예란 무엇인가? 흑색 인종의 인간이다. 위의 설명은, 이러한 설명이나 마찬가지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위한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떼내어졌을 때는 그것은 자본이 아닌데, 이는 마치 금이 금 자체로는 화폐가 아니거나 설탕이 설탕 가격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산 속에서 인간들은 자연에 대해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협력하고 자신들의 활동들을 서로 교환하면서만 생산한다. 생산하기 위하여 인간들은 서로 일정한 연관들과 관계들 속에 들어가며, 또 이러한 사회적 연관들과 관계들 내부에서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작용, 생산이 일어난다. 생산 수단의 성격에 따라, 생산자들이 마주보며 들어가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 즉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활동들을 교환하고 생산의 행위에 참가하는 조건들은 당연히 달라진다. (...)
개인들이 생산하는 곳인 사회적 관계들, 즉 사회적 생산 관계들은 물질적 생산 수단들의, 생산력들의 변경 및 발전과 더불어 바뀌고 전화한다. 그 전체성 속에 있는 생산 관계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들, 사회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하며, 게다가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 있는 어떤 사회, 특유하고 구별되는 성격을 지닌 어떤 사회를 형성한다. 고대 사회, 봉건 사회, 부르조아 사회는 생산 관계들의 그러한 총체들이며, 이 생산 관계들 각각은 동시에 인류 역사에서 특수한 발전 단계를 가리킨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조아적 생산 관계, 부르조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 자본을 구성하는 생활 수단들, 노동 도구들, 원료들 따위는 주어진 사회적 조건들 아래에서, 일정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생겨나고 퇴적된 것들이 아닌가? 그것들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들 아래에서, 일정한 사회관계들 속에서 새로운 생산에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로 이 특정한 사회적 성격이 새로운 생산에 쓰이는 생산물들을 자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자본은 생활 수단들, 노동 도구들, 원료들만, 물질적 생산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교환가치들로 구성된다. 자본을 구성하는 모든 생산물들은 상품들이다. 따라서 자본은 물질적 생산물들의 총계일 뿐만 아니라, 상품들의, 교환가치들의, 사회적 크기들의 총계이다. 우리가 양모의 자리에 면화를 놓고, 밀의 자리에 쌀을 놓고, 철도의 자리에 기선을 놓는다하더라도, 면화, 쌀, 기선자본의 육체- 이 이전에 자본이 체화되어 있던 양모, 밀, 철도와 똑같은 교환가치, 똑 같은 가격을 갖고 있다고 전제되기만 하면, 그 자본은 똑같은 것으로 남는다. 자본이 조금의 변경을 당하지 않아도 자본의 육체는 끊임없이 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자본이 상품들의, 다시 말해 교환 가치들의 하나의 총계라고 하더라도, 상품들의, 교환가치들의 각각의 총계가 자본인 것은 아니다. 교환가치들의 각각의 총계는 하나의 교환가치이다. 각각의 개별적 교환가치는 교환가치들의 하나의 총계이다. 예를 들어 1000마르크의 가치가 있는 집은 1000마르크의 교환가치이다. 1페니히 가치가 있는 종이 한 장은 100/100페니히라는, 교환가치들의 총계이다. 다른 생산물과 교환될 수 있는 생산물들은 상품들이다. 생산물들이 교환되는 일정한 비율이 그것들의 교환가치를 형성하며, 또는 화폐로 표현된다면 그것들의 가격을 형성한다. 이 생산물들의 양은, 상품이라는 또는 교환가치를 표현한다는 또는 특정한 가격을 갖는다는 그 생산물의 규정을 바꿀 수 없다. 나무가 크든 작든 그것은 여전히 나무이다.우리가 철을 다른 생산물들과 로트로 교환하든 짼트너로 교환하든, 이것이 상품이라는, 교환가치라는 철의 성격을 변화하게 할 것인가? (...)
그러면 어떻게 각각 상품들이, 교환가치들이 하나의 총계, 즉 자본으로 되는가? 그것이 자립적인 사회적 권력으로서, 즉 사회의 일부의 권력으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또 직접적인 산 노동력과의 교환을 통해서 증식되는 것에 의해서이다. 노동 능력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계급의 존립이 자본에게 필요한 전제이다. (...) 자본의 요체는 퇴적된 노동이 산 노동에 새로운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요체는 산 노동이 퇴적된 노동에게 그 퇴적된 노동의 교환가치를 유지하고 증대시키는 수단으로 봉사한다는 데 있다.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교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의 교환에서 생활 수단을 얻지만, 자본가는 자신의 생활 수단과의 교환에서 노동, 노동자의 생산적 활동, 창조적 힘을 얻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해 노동자는 자신이 써서 없애는 것을 보상할 뿐만 아니라 퇴적된 노동이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그 퇴적된 노동에게 준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있던 생활 수단의 일부를 자본가로부터 수령한다.
이 생활 수단은 노동자에게 어떻게 쓰이는가? 직접적 소비로 쓰인다. 그러나 내가 생활 수단을 소비하자마자 그것들은 내게 돌이킬 수 없도록 상실되는데, 내가 이 수단이 내게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동안의 시간을 이용하여 새로운 생활수단을 생산하지 않는 한, 소비 속에서 사라져 버린 가치에 나의 노동을 통해 그 생활 수단을 써서 없애는 동안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것이다. 재생산할 수 있다는 바로 이 귀중한 힘을 자본가에세 양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위하여 이 힘을 상실한 것이다. (...) 바로 그 기업가에게 양도해버린 자신의 생산력 대신에, 그가 조만간 소비할 생활 수단과 교환하는 5그로쉔의 은화를 얻는다. (..) 따라서 자본은 임금 노동을 전제하고, 임금 노동은 자본을 전제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제약하여 서로를 생기게 한다.
면방적 공장에 노동자가 있다면, 그가 생산하는 것은 면포뿐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자본을 생산한다. 그는, 자신의 노동을 지휘하고 그 노동을 매개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새로이 쓰이는 가치를 생산한다. 자본은 노동력과 교환되면서만, 임금 노동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만 증대될 수 있다.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은 자본을 증대시킴으로써만, 자신을 노예로 삼는 권력을 강화함으로써만 자본과 교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증대는 프롤레타리아트,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의 증대이다. (...)
사실 그렇다! 노동자는 자본이 고용하지 않으면 파멸한다. 자본은 노동력을 찾취하지 않으면 파멸하며,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매해야만 한다. 생산하기로 정해진 자본, 즉 생산적 자본이 급속히 증대될수록, 따라서 산업이 번창할수록, 부르조아지가 부유해질수록, 사업이 잘 될수록, 그만큼 자본가는 노동자를 더 필요로 하게 되며, 그만큼 노동자는 자신을 비싸게 판매하게 된다. (...)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자의 이해 관계가 똑같다. 즉 자본과 임금 노동은 하나이자 똑같은 관계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이를 뿐이다. (...)
- <신 라인신문>(1849년 4월 7일자, 제266호, 카를 마르크스)
- <임금 노동과 자본>(카를 마르크스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p.4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