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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국 철학사』 : 원효(元曉)의 화쟁(和諍),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by 이우 posted Sep 30, 2018 Views 25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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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돈황사본(敦煌寫本)에도 원효(元曉, 617년~686년)의 <대승신기론> 필사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이른바 돈황사본은 20세기 초반에 오럴 스타인(Aurel Stein)이라는 유대인 탐험가가 중국 돈황(둔황) 막고굴(幕高窟)에서 수도사를 속이고 영국으로 가져간 엄청난 문서 더미를 가리킵니다. 그 문헌 중에서 <장자(莊子)>나 <도덕경(道德經)>의 오래된 판본도 발견되었고 당나라 때 문헌, 10세기 이전의 필사본으로 추정되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疎)>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10세기 이전에 당나라 돈황 지역에서 원효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필사본이 읽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2015년 1월에는 독일에서 <대승기신론소>의 중국 투르판 필사본 단간(斷簡)>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투르판 필사본돈황본보다 좀 앞섭니다. 그리고 1500년대 이후이긴 하지만, 일본에서도 원효의 저술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지금 국내에서 어떤 저술이 화제를 모으며 잘 팔린다해도 일본이나 미국, 영국에서 출간될 수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구미에서 인기를 누리는 저자들의 책은 엄청나게 많이 번역되어 나옵니다. 지식의 위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조. 그런데 원효의 저술은 지금보다 국력이 약하고 학술 교류가 더 부진했던 전통 시대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진행되었어요. 그러니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얼만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장의 제목을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라고 붙였는데 이 말은 화쟁의 논리를 사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화쟁 사상은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그 양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이 <대승기신론소>에 등장합니다. 본래 불경을 주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한 글자, 한 글자 단어를 풀이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효는 그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대승기신론>이라는 불경을, 글 쓴 사람의 종지(宗旨)를 꿰뚫는 방식으로 해석해 나갑니다. 이후 당나라 승려 법장이 다시 자기 견해를 가지고 <대승기신론>을 쓸 때에도 원효의 주해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화쟁(和爭)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화(和)'는 화합, 통합의 논리입니다. '쟁(諍)'은 '말씀 언(言)'에 '다툴 쟁(爭)'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말로 다투는 것, 곧 싸움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쟁론은 온갖 쟁(爭)을 화해시키는 논리, 곧 '쟁(諍)을 화(和)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런가 하면 화쟁의 화(和)와 쟁(諍) 자체가 상반되는 뜻이죠. 그래서 화와 쟁 자체는 대립되지만 화와 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 화쟁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원효의 화쟁론은 이후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자리잡습니다.

  불교의 나라 고려에서는 대각국사 의천이 나왔습니다. 국사(國師)라는 호칭은 신라시대에는 없었고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는데, 나라의 스승, 나라의 스님이란 뜻입니다. 의천은 고려의 11대 문종의 아들인 동시에 13대 왕 선종과 15대 왕 숙종의 동생으로서, 나라를 대표하는 스님으로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천이 선종에게 이야기해서 원효에게 화쟁국사라는 호칭을 내리도록 합니다. 여기서 고려의 스님들도 원효 사상의 핵심이 화쟁이라고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도 사회 분열이 심각해지면 원효의 화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와 상관없는 여러 매체에서 원효의 화쟁을 말한는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화합'을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화합이 어렵습니다. 서로 이익을 다투잖아요. 이익을 다투는 사람들 간에 어떻게 몫을 나누는 것이 합당한지, 그에 대한 합의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는 자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찾으려고 아침 일찍 나간 주인과 같다"로 시작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일꾼을 모집해서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킵니다. 오후에 또 거리에 나가보니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은 왜 놀고 있소?"하니까 아무도 일거리를 안 주어서 그렇다고 해요. 그러나 포도원 주인이 '그럼 우리 포도밭에 와서 일해요"하고서 데려와, 저녁 나절에 일을 끝내게 합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일하기로 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주고, 오후부터 일한 사람한테도 1데나리온을 줘요. 당연히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하겠죠. 왜 우리한테 1데나리온만 주냐고요. 포도원 주인이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정했고, 나는 계약대로 당신에게 그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1데나리온을 비불했다고 해서 당신이 항의하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상하죠. (...) 왜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분배를 하는가 하는 비교를 넘어서야 비로소 화합이 됩니다. 타인의 처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내가 더 많이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화합이 안됩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 사회에 정규직비정규직이 있는데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일을 더해서 정규직입니까? 자동차 생산라인만 봐도 숙련이고 비숙련이고 할 것 없이 똑같은 노동시간, 똑같은 조건에서 일하는데 한쪽은 파견 근로자고 한쪽은 본사 직원입니다. 이들 급여 차가 두 배가 넘습니다. 그게 정당합니까? 또 실업자는 게을러서 그런가? 자질이 떨어져서 그런가?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게으른 자에게 돈을 줄 수 없다는 논리를 들이댄다면 설명이 안됩니다. 그걸 뛰어넘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화쟁이 됩니다. 아무 것도 나눠 주지 않으면서 화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요컨대 특정한 교섭을 주장하지 않고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고 상대가 왜 불만을 제기하는지, 왜 저 사람에게 돈(급여)를 줘야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차병직의 <상식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어떤 한국인이 헝가리에 갔다가 거기서 사회주의적 분배 방식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과 장수 할머니가 사과를 팔고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과를 사간는데 그 할머니가 하나는 좋은 것, 하나는 나쁜 것 이런 식으로 섞어서 팔아요. 한국 사람이 할머니에게 "돈을 더 줄테니 좋은 것만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너한테는 안 팔아" 했답니다.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까요? 어리섞어서? 왜 한국 사람은 모두 다 좋은 것을 원할까요? 다 나름의 입장이 있죠. 할머니 얘기는, 먼저 온 사람이 좋은 것 다 가져가면 뒤에 온 사람은 뭘 가지고 가느냐는 거고, 한국 사람은 아침에 부지런히 일어났으니까 좋은 걸 가져갈 자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니까 한국인은 잠을 편안하게 못잡니다. 먼저 일어나서 좋은 사과를 차지해야 하니까 피곤하게 삽니다. 평생 죽어라 일만 하면서 사는 거예요. 늦게 오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죠. 정의로운 사회가 맞나요?

  화쟁이란 것이 말은 하긴는 쉽지만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또 상대를 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포용이 힘들죠. 꼴도 보기 싫은데 어떻게 포용합니까? 그런데 포용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면 원효의 화쟁론은 의미가 없어요. 대립을 넘어 상위의 가치를 지향하는 게 화쟁인니까요. 그래서 화쟁이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된 겁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한국 불교는 화쟁을 지행하는지 의문이고 화쟁이 뭔지 아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

  원효가 단순히 승려로만 기억되지 않은 것은 속세와의 인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원효의 전기인 <의해(義解)>편. '원효불기(元曉不羈)'를 보겠습니다.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은 설(薛)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인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내내말(談?乃末)이다. 애초에 압량군(押梁郡) 남쪽에 있는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

  원효의 할아버지라고 말한 잉피공은 신라의 귀족으로 여섯 촌장 중 한 사람입니다. 잉피공의 사당이 적대연 옆에 있다고 했는데 적대연은 바로 이 글이 수록된 <삼국유사>의 작자 일연 스님이 살앗던 거처로 유명합니다. 물론 고려 때 이야기죠. 경상북도 청도에 운문산이 있는데 해발 800미터 지점에 운문사가 있습니다. 운문사 안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이른바 금족지가 있어요. 그곳에 적대연이 있습니다. 아무튼 원효는 신라를 대표하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출생과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합니다.

  " '사라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대사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는데 어머니가 임신한 뒤 달이 다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자 창황한 가운데 집으로 갈 겨를이 없어서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안에 누웠다. 그런 연유로 그 나무를 사라수라고 한 것이다. 그 나무 열매 또한 보통의 밤나무와는 달랐기에 지금까지 '사라밤'이라고 일컫는다."

  인용한 부분을 보면 원효가 사리수 아래에서 태오났다고 하는데 이 사라수는 밤나무죠, 아버지 옷(裟羅)을 밤나무에 걸쳐두었다는 전설에서 사라수라고 일컬은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 맥락이 겹쳐 있습니다. 우선 신주(神主)를 만들 때 밤나무를 사용합니다. 밤나무가 단단하다는 실용성이 첫번째 이유겠지만 밤이 음(陰)을 상징하는 물건이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결혼식 폐백례를 올릴 때 아들딸 많이 낳으라고 신랑신부에게 대추와 밤을 던져 주죠. 대추는 아들을, 밤은 딸을 뜻합니다. 대추는 씨가 하나고 밤은 알이 두 개 이상 있으니, 대춘는 양의 수이고 밤은 음의 수라고 보는 겁니다. (...)

  "원효대사는 출가한 뒤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고 절 이름을 초개(初開)라 하고, 밤나무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裟羅社)라 하였다. 대사의 행장에 이르길,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조고(祖考)를 따른 것이다. <당승전(唐僧傳)>에는 이르길,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하였다. (...)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로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다. 사방으로 돌아다닌 전말과 크게 불법을 퍼뜨린 성대한 자취는 <당전(唐傳)>과 행장에 갖추어져 있으니 여기서는 다 기재할 수 없고 다만 <향전(鄕傳)>에 기술된 한 두 가지 특이한 사적만을 남겨 둔다."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불리한 진술입니다. 기존의 권위에 의존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문호를 열기 위한 조건으로는 꼭 맞습니다. 공자도 일정한 스승이 없었거든요. 원효가 실제로 기존의 권위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예는 많습니다.

  "대사는 일찍이 어느 날 정신 나간 척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할까?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빚을까 하노라'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태종이 듣고서 말하길, '이 스님이 아마 귀부인을 얻어 현인을 낳겠다는 말인가 보다. 나라에 대현이 있으면 이로움이 그보다 더 클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다. 관리에게 명령하여 원효를 찾아 인도하게 하였다.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막 그를 찾았는데 원효가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원효가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대사를 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볕에 말리게 하고, 이어 그곳에서 하룻밤 묵게 하였다. 공주가 과연 임신하여 설총을 낳았다." (...)

  "원효는 실계(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뒤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다. 그 모양을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일체 무애인(無厓人 : 모든 일에 장애가 없는 사람, 완전한 자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無厓)라고 이름 짓고, 이어서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불법을 교화하고 읊조리며 돌아오니 간난하고 무지한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명호를 알게 되고 모두가 나무(南無)의 호칭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참으로 컸다."

  원효가 실계(失戒), 곧 계율을 어겼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계율이란 던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일반적으로 계율의 준수는 성실한 수행을 뜻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에 순응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계율이란 늘 일정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계율을 만든 자가 의도하는 것은 계율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사마천은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궁형을 받고 살아났죠. 지금도 "그냥 죽을래, 궁형받고 살래?"하면 궁형 받고 살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궁형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내면 가능했어요. 그런데 사마천은 돈이 없었죠. 왜 궁형을 박으면 살 수 있느냐? 후손을 낳을 수 없잖아요. 재산을 물러줄 수 없으니 속죄금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궁형은 일종의 신체적 계율과 같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제왕의 측근에 있던 환관들은 거세를 당했습니다. 권력자의 측근에게 후손이 있으면 자신의 재물과 권력을 후손에게 물러주려고 할 테고 자연스레 권력자에 대한 충성도가 약해지겠죠. 거세는 후손에게 무언가를 빼돌일 수 없게 하는 생물학적 계율의 강제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 사마천은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사기>의 콘텐츠를 더욱 풍부하게 구성할 수 있었지요. 서양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사제의 결혼11세기부터 금지되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제에게 자식이 있으면 자식한테 교회의 재산을 빼돌릴 수 있으니 금지한 겁니다.

  원효는 의도적으로 계율을 깨뜨림으로써 스스로 기존의 권위에서 벗어납니다. 그 일이 오히려 불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죠.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에 승복을 벗어버립니다. <삼국유사> '원효전'의 제목이 '원효불기(元曉不羈)'인데, '불기(不羈)'는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법을 깨달았지만 구속되지 않았기에 파계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

  "입적한 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9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하고 사모한는 마음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설총이 소상(소상,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곁에서 예를 갖추었을 때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일찍이 원효가 머물던 혈사(穴社)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원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설총이 예를 갖추자 소상이 돌아보았다'는 표현에서 원효의 지향이 홀로 피안으로 가는 데 있지 않고 당시 세상에 있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일연의 찬을 읽으면서 원효의 전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찬하여 말한다.
  각승(角乘)이 처음으로 삼매경을 열었으니
  박 들고 춤추며 온갖 거리 깨우쳤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에 돌아본 자취만 쓸쓸하구나."
  -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義解)」,  '원효불기(元曉不羈)'

  '각승(角乘)'이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인데, 여기서는 원효를 가리킵니다. (...)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 우리의 마음 또한 이와 같아서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움직일 때 생멸상(生滅相)을 떠나지 않으며 생멸하는 상(相)도 참된 마음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생멸상 또한 마음을 떤나지 않는다."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심생멸문(心生滅門)'

  다시 화쟁의 논리로 돌아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대승기신론소>에서 원효는 화쟁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파도도 물이고 바다도 물이죠. 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을 직접 볼 수 없고 파도를 보든가 고요한 바다를 보든가 푸른 바다를 보든가 하는 식으로 물의 여러 가지 응용 형태를 보는 것 뿐입니다. 응용 형태가 다른 것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싸우죠.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싸우고 옳고 그른 것을 나누어 싸우는데 그게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는 두 가지 상반된 양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걸 따로 독립적인 대상으로 보고 그걸 다시 사유합니다. 엄청나게 투철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라 한 가지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도 하나의 견해로 보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 일심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진여(眞如 : 범어로는 '타타타(tathata). 진실한 실상. 있는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라고 하면 깨달음인데 참된 모습,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무명(無明 : 범어로는 '아비드야(Avidya)'. 명지(明知)가 없는 상태)은 명이 없는 상태. 알지 못하는 상태, 무식한 상태입니다. 이 둘이 상반된 것 같지만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불생멸심(不生滅心)과 생멸상(生滅相)을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생멸심은 진리이고 생멸상은 비진리라는 식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되고, 그 둘이 서로 떠날 수 없으므로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일 뿐이라는 게 원효의 견해입니다. (...)

  그럼 화쟁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여기서 여러 가지 용어가 등장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식에는 일승(一乘)삼승(三乘), 중관(中觀)유식(有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상반된 견해가 수없이 많습니다. 원효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그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주요 불경을 거의 다 보고 그걸 근거로 제시하면서 주석을 붙여 나갔기 때문입니다. (...)

  삼승은 대승불교의 세 가지 가르침으로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萨乘)을 뜻합니다. 성문은 소리를 듣고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것, 부처의 말씀을 듣고 피안의 세계로 타고 가는 것입니다. 연각은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부처의 소리를 듣지 않고요. 보살은 일체 인간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걸 말합니다. 성문승은 부처에 의존해서 보는 것이고, 연각승은 자기가 직접 깨닫는 것이며, 보살승은 대승, 전체가 다 타고 가는(乘) 건데 각각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흔히 소승(小乘)은 작은 배를 타고 혼자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이고 대승(大乘)은 큰 배로 많은 사람이 함께 가는 거라고들 하지만 소승이 안 되는데 대승이 되겠습ㄴ니까? 둘이 아니죠. 그러니 대승과 소승이 회통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중관이나 유식의 경우, 용수보살(龍樹菩萨)과 미륵보살(彌勒菩萨)이 각각 세운 것인데 서로 다른 견해입니다. 중관은 용수가 펼친 공(空) 사상으로 상대적 대립물 중에 어느 한 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중도(中道)라고도 부르죠. 용수의 사상을 따르는 학파를 중관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윤회와 열반은 같다고 봅니다. 유식은 미륵이 펼친 주장으로 현실의 제법(諸法)은 실유(實有)가 아니라 공(空)이라고 봅니다. 미륵의 유식설을 따르는 학파를 유식파라고 합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견해와 서로 상반된 견해를 통합시키는 논리가 화쟁입니다.

  화쟁의 방법으로는 개합(開合), 여탈(與奪), 입파(立破)가 있습니다. 먼저 개합에서는 '개(開)'는 여는 것, '합(合)'은 합치는 것, 곧 닫는 것입니다. 원횬는 이 둘을 합쳐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개'는 하나의 불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치는 것이고, '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쳐진 불법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상반되는 것이 불법의 한 방편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 개합의 논리입니다. 여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與)'는 준는 것기고 '탈(奪)'은 빼앗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빼앗는 것이고 빼앗는 것이 주는 것이라는 논리죠. 입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立)'은 세우는 것이고 '파(破)'는 깨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논리를 자기가 깨는 것입니다. 선승들이 선문답을 할 때 서로 무엇을 가지고 소통하는지 일반인들은 도저히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개합 · 여탈 · 입파의 논리를 적용하면 명쾌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원효가 이야기하는 화쟁의 최종 종착지는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환귀일심(還歸一心). 하나의 마음, 곧 일심으로 돌아가면 불국토가 된는 것이고 극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대승(다 같이 불법의 세계로 가는 것)이니 열반(혼자서 깨닫는 것)이니 하는 것도 모두 일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승기신론소>에서는 환귀일심이 본각(本覺)이라고 강조합니다. 원초적 깨달음은 일심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이야기하며 만법귀일(萬法歸一)을 제시합니다. 만 가지 다른 법칙, 불법이 있지만 그걸 넘어서라고 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방편인데 그걸 회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만법귀일입니다. (...)

 - 『한국 철학사 -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사의 거장들을 만나다』 (전호근 · 메멘토 · 2018년) p.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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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개의 단어가 확인된다. 하나는 '추출된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통제된다'이다. 클라우드를 관리하려면 기능을 통제하는 모니터링 시스템이 필요하고, 이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사용자들로부터 숨겨진다. 역설적인 것은 손안에서 사용되는 작은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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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9
    Jan 2020
    19:00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④, 부채

    (...) 오늘날 자본주의는 유령에 쫓기고 있다. 유령은 부채라는 이름의 악령이다. 자본주의 강대국은 하나같이 이 유령을 쫓기 위한 숭고한 동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정말 부채를 정리하고 싶을까? 마리치오 라자라토*는 국가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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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19
    Jan 2020
    01:51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③, 미국식 개인주의와 공적 자금 · 세금

    (...) 미국의 유명 가스 프랭크 시나트라의 대표적인 노래인 '마이 웨이(My Way)'가 미국적 개인주의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일반적' 혹은 '관습에 맞게'란 뜻의 프랑스 샹송 '콤 다비튀드(Comme d'habitude)'가 '마이 웨이'의 원곡이라는 사실은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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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8
    Jan 2020
    23:31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②, 금융 위기(부채의 역설)

    (...) 미국은 생산한 것보다 다 많이 소비하면서도 수십 년동안 풍족한 삶을 누렸다. 더 근본적인 수준을 살펴보면, 부채의 역설적인 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해서는 안된다'는 슬로건의 문제점은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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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5
    Jan 2020
    22:32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동일성과 다양성 · 일반성과 특이성, 꿈의 평면과 행동의 평면(원뿔형 도식)

    (...) 신경계와 목적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우 다양한 지각의 기구들이 중추들을 매개로 해서 동일한 운동 기구들에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다. 감각은 불안정하다. 즉 그것은 매우 다양한 뉘앙스를 취할 수 있다. 반대로 일단 만들어진 운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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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4
    Jan 2020
    15:37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과거와 현재의 관계(원뿔형 도식)

    (...) 우리는 커다란 실용적 이점 때문에 사실들의 실제 순서를 역전시키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으며, 공간에서 이끌어낸 이미지들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기억이 어디에 보존되는 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물리화학적인 현상들이 뇌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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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4
    Jan 2020
    00:43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이미지 · 시간과 공간

    (...) 순수 기억이 어떻게 잠재적 상태로 보존되는가 하는 것은 그것의 근본적인 무력함(impuissance)을 볼 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가 무의식적 심리 상태들을 생각하는 데서 갖는 혐오감은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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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13
    Jan 2020
    09:57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기억·지속·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생성

    (...) 우리는 순수기억, 이미지-기억, 지각이라는 세 항들을 구별하였는데, 이 항들 중 어느 것도 사실상 단독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지각은 결코 현재적 대상과 정신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다. 지각에는 항상 그것을 해석하면서 완결시키는 이미지-기억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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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0
    Jan 2020
    20:02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①, 실업

    (...) 현재 한국의 상황을 보면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의 유명한 도입부가 절로 생각난다. '그때는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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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09
    Jan 2020
    17:18

    [철학] 푸코의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 : 계보학 · 권력의 미시물리학 · 신체의 정치경제학

    (...)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년)은 미셸 푸코의 사상적 변화 과정에서뿐 아니라 서구 지성사의 전개과정에서도 새롭고 큰 변화를 보여준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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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30
    Dec 2019
    09:22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신체의 능동성, 기억(mories)

    (...) 식별이 주의적인 경우에, 즉 이미지-기억들이 현재적 지각에 규칙적으로 결합하는 경우에, 지각은 기억들의 출현을 기계적으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기억들이 지각 앞으로 자발적으로 향해 가는가? (...) 외적 지각이 실제로 우리에게 그것의 핵심적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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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19
    Dec 2019
    21:41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사물의 실재성·기억·현대 유물론의 탄생

    (...) 우리 지각의 현실성(actuality)은 그것의 활동성(activities)으로, 즉 그것을 연장하는 운동들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더 큰 강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단지 관념에 불과하고, 현재는 관념-운동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고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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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8
    Dec 2019
    16:48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감각, 지각, 정념, 그리고 기억

    (...) 사람들은 모든 감각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비연장적이며, 감각이 연장에 덧붙여지고, 지각 과정이 내적 상태들의 외재화로 이루어진다고 결론짓는다. 사실상 심리학자는 자신의 신체로부터 출발하며, 이 신체의 주변에서 받은 인상들이 그에게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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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1
    Nov 2019
    06:56

    [철학] 『사생활의 역사』 : 사생활의 경계와 공간(응접실·사생활·공적 생활·공간의 분절·사회적 성층 작용·노동)

    (...) 사생활은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현실이다.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므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선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리고 사생활은 공적 생활과 관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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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2
    Nov 2019
    03:24

    [철학]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 주체의 죽음, 해체와 탈중심화

    인간 주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현대철학의 쟁점 가운데 가장 첨예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현대철학은, 주로 프랑스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절대화된 주체, 이성적 주체, 세계 의미 부여자로서의 주체는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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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9
    Oct 2019
    12:53

    [철학]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 서문

    (...) 시간은 유한한 존재의 진정한 한계인가, 아니면 유한한 존재의 신(神)과의 관계인가? 시간은 유한성과 반대로 무한성을, 결핍에 반대하여 자족성을 존재자에게 보장해 줄 수 없는 관계, 하지만 만족과 불만을 넘어서 덤으로서의 사회성을 뜻하는 관계이...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6363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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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14
    Oct 2019
    19:23

    [철학] 『말과 사물』 : 서문 · 분절(分節, articulation)의 문제

    (...) 이 책의 탄생 장소는 보르헤스의 텍스트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 존재물의 무질서한 우글거림을 완화해 주는 정돈된 표면과 평면을 모조리 흩뜨리고 우리의 매우 오래된 관행인 동일자와 타자의 원리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오래...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2404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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