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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서문 : 종교는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

by 이우 posted Sep 29, 2018 Views 14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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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을 확실한 계획에 따라 행할 수 있거나 매순간 행운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사람들은 미신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어떠한 해결책도 없는 낭패를 당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믿을 것이 못 되는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속에서 두려움과 희망 사이를 안쓰럽게 오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들의 의식은 무엇이든 믿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어느 때고 그가 의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아주 조그만 자극도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에 충분하다. 평소에는 극도로 확신에 차 있고 거만하며 교만한 그를,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흔드는 것은 아주 조그만 자극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믿는 것처럼 이것을 스스로 깨닫지는 못하지만, 나는 누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행복할 때는 대부분, 비록 미숙하기는 하지만 지혜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이 충고를 해주려고 하면 그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에 처했을 때는 누군가에게 충고를 간청하고, 그것이 부적당하다고 불합리하고 기괴하기까지 하더라도 그것을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회복을 기대하고, 다시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에 흔들릴 때 지나간 행복이나 불행을 기억하게 되면, 그들은 그것이 행복하거나 불행한 결말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이 그들을 매우 놀라게 하면 그것은 이나 지존자의 분노를 나타내는 기적이며, 미신적이고 비종교적일지라도 제물을 바치고 서원(誓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끝없이 만들어내고, 그들의 광기를 공유하듯 특이한 방법으로 자연을 설명한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불확실한 것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갖고 모든 형태의 미신에 빠지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해 있고 도움을 받지 못할 때 그들이 서원과 연약한 눈물로 거룩한 도움을 간청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본다. 그들은 공허한 목표에 대해 확실한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성을 맹목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인간의 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반면 환상과 꿈, 황당무계한 난센스의 산물신의 응답으로 생각한다. *이 그의 방식을 벗어나 정신이 아닌 동물의 오장육부에 그의 결정을 써넣거나, 신의 영감과 격려에 의해 바보, 멍청이, 새의 결정을 알려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인간을 이러한 광기로 몰아간다. 미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며 풍성하게 만드는 원인 또한 두려움이다.

  이미 말한 것에 대한 특별한 예를 원한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수시디스 협곡에서 운명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미신에 빠졌고, 처음으로 점쟁이에게 물었다(쿠르티우스, 5권 4장). 그러나 다리우스를 이긴 후에는 불운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경악하게 될 때까지―자신은 상처를 입고 녹초가 되어 바닥에 누워 있는데 박트리아 사람들이 그를 배신하고 스키타이 사람들이 그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상황―그는 선견자와 점쟁이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쿠르티우스 7권 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렉사드로스는] 다시 인간 정신의 광적인 상태인 미신에 빠졌고 제물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경박한 믿음을 의탁했던 아리스탠더(Aristander)를 불러들였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다. 이는 두려움이 지속되는 한에서만 인간이 미신에 의존해 행동할 것이며 인간이 잘못된 종교에 빠지는 것은 오직 의식이 슬픔에 빠져 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는 사실, 즉 그것은 곧 환상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국가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때 흔히 점쟁이가 일반 백성을 지배하고 왕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되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사람은 누구나 앞에서 말한 원인들로, 미신에 빠질 가능성을 선천적으로 안고 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신성에 혼란스러운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정신의 모든 광적인 형태유혹적인 영감처럼 미신도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수시로 변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미신은 희망과 미움, 분노와 거짓 속에서 기반을 발견한다. 미신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욕망,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활동적인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다양한 종류의 미신을 불러일으킨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인간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같은 정도의 불행에 직면하기 마련이어서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롭고 아직 미혹되지 않았던 것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러한 불안정이 많은 혼란끔찍한 전쟁의 원인이 되엇다. 불안정은 종교의 모양을 하고 쉽게 사람들을 유혹해서, 신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왕을 숭배하게 할 수도 있고, 왕들을 저주하고 인류의 역병처럼 혐오하게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했으며, 쿠르티우스 4권 10장에서도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미신보다 효과적으로 대중을 지배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악을 예방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이든 거짓이든 종교에 제의 형식을 갖추는데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모든 사람이 종교를 의미심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람들이 언제나 종교에 최고의 신앙심을 바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훌륭한 예는 터키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해 토론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고 생각했고, 개인의 판단력에 대해서도도 매우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 정신에 건전한 이성이란 없으며, 의심할 능력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욕을 유지하려는 군주제적 통치의 최고 비밀은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과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두려움을 종교라는 아름다운 이름 속에 숨기는 것이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웠고, 인류의 명예를 위해 피와 생명을 내어준는 것을 오명이 아니라 최고의 명예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한 일들은 자유로운 국가 제도에서는 더 이상 조작되거나 시도될 수 없다.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을 편견을 갖고 받아들인다거나 어떻게 제한한는 것은 보편적 자유와 전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구실로 삼는 박해란 오직 다음과 경우에만 가능하다. 사람들이 사변적인 것을 법률로서 공포하고, 신념을 범죄와 같이 처벌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박해하며, 공공의 행복이 아니라 그들의 적대자에 대한 미움과 분노 때문에 그 신념의 지지자와 추종자를 희생시키는 경우에 종교룰 구실로 삼는 박해가 발생한다. 국가의 법에 따라 '행동만을 판단하고 말은 처벌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박해는 법의 행세를 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신념의 다양성이 박해라는 형태로 악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신을 믿을 수 있는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어 있고, 자유가 가장 소중하고 훌륭한 선으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살 수 있는 드문 행운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자유가 국가의 신앙심과 평화에 해를 끼치지 않고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평화와 신앙심과 함께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시도가 달갑지 않은 것도 아니며, 소용 없는 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이것이 이 책에서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먼저 종교에 대한 특별한 편견, 즉 오래된 예속의 흔적을 드러내는것이 필요했다. 다음으로는 최고 권력의 권리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우 파렴치한 횡포로 이 권리의 많은 부분을 빼앗으려 했다. 그들은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이교도의 미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권력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며, 결국 모든 사람들을 예속의 상태로 떨어뜨린다. 여기서 나는 이 논문집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의 순서를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이책을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할 것이다.

  나는 사랑, 기쁨, 평화, 절제, 성실을 강조하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증오의 태도로 서로 싸우고 매일 잔인한 미움을 서로에게 내뿜는 것에 종종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독교의 덕목들[사랑, 기쁨, 평화]보다 증오나 미움에 의해 그들의 믿음을 더 쉽게 인식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단지 그들의 외적인 태도와 예배로 각각의 종교를 구별할 수 있었고, 또 이미 오래전부터 이 예배 또는 저 예배에 참석하고, 이 견해 또는 저 견해를 좋아하고, 이 선생의 또는 저 샌생의 말씀에 맹세하고, 이곳 또는 저곳을 쫓아다니며 살아왔다. 그것은 기독교인이든 터키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마찬가지다. 그밖의 삶의 방식 역시 모든 사람의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불행한 상황의 원인은, 일반 사람들이 교회의 직위를 권위로, 교회의 직무를 성직록(聖職錄)으로 간주하고, 성직자에게 높은 존경의 표하는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나타난다. 교회에서 이러한 남용이 자행된 이래로, 사람들은 영적인 직무를 장악하려는 가장 저질적인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거룩한 종교를 확장하려는 열망은 추잡한 탐욕과 야심으로 신의 집을 극장으로 타락시켰다. 그곳에서는 교회의 교사가 아니라 연설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거기서는 일반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그들을 경이로운 것으로 열광시키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며 그들 대부분이 놀랄 만한 새롭고 별난 것만을 가르치는 일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엄청난 불만과 시기, 증오가 생겨났고, 그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적인 제의 형태(일반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고 알랑거리는 듯이 보이는 것을 포함해서) 외에는 옛 종교에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믿음은 속기 쉬운 성질이나 편견과 다름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얼마나 대단한 편견인가! 그것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에서 동물로 만드는 것이며, 인간이 판단력을 사용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을 전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며, 오성(이해력)의 빛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공들여 고안된 것이다. 신앙심, 영원한 신, 종교는 모순된 비밀 속에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성을 무시하고 오성을 본질적으로 타락한 것이라 배척하고 혐오하는 사람은 가장 부정한 방식이긴는 하지만, 거룩한 빛을 받은 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빛의 조그마한 불씨라도 가졌다면 그 정도로 불합리하게 교만하지 않을 것이고, 훨씬 이성적으로 신을 믿는 것을 배울 것이며, 지금처럼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대신 더 많은 사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증오에 차서 박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진실로 거룩한 빛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성서의 심오한 신비에 대해 무한한 경탄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플라톤주의자의 사변 이상의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방인의 추종자로 여기지 못하도록 이 철학자들의 입장에 성서를 꿰맞추었다. 그들은 이 그리스 사람들과의 불합리한 동거에 만족하지 못했고, 예언자들까지도 이 그리스 사람들의 광기를 공유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들이 성성의 신성함을 꿈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성서의 신비에 열광하면 할수록, 그들은 원래 성서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서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할 뿐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서의 모든 구절의 의미가 진실되고 거록하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성서를 이해하고 성서의 진실한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에서 이미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성서 해석을 위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세운다. 먼저 그들의 이해력과 엄격한 시험을 확실하게 통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조작이 아니라 성서 자체에서 더 잘 추론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편견 없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새롭게 성서를 시험하고, 성서 자체에서 아주 분명하게 추론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또는 성서의 가르침으로 여기지 않을 것을 굳게 결심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연의 빛을 단순히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의 원인으로 저주하고 있는 상황, 단순히 인간의 추측에 불과한 것을 거룩한 가르침으로 여기며, 쉽게 믿는 성질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상황, 대단한 열정으로 교회와 국가에서 철학자들의 다툼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그로부터 사람들을 쉽게 분노하게 만드는 미친 듯한 증오와 불화,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다른 병적 요소들이 생기는 상황 등이다. 이러한 것들을 경계하며 나는 성서를 해석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세웠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질문에 도달했다. 예언이란 무엇인가? 은 어떤 방식으로 예언자들에게 나타나는가? 왜 이들이 신을 기쁘게 하는가? 이들이 신과 본성에 대해 최월적인 이해를 가졌기 때문인가? 또는 단순히 이들의 신앙심 때문인가?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확실성을 얻은 후에 예언자들의 권위는 단지 삶의 방식과 진실한 덕(德)에 관한 질문에서만 중요하며,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들의 입장이 우리와 상관 없단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렸다. 이러한 인식에 이른 후 계속해서 무엇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을 신의 선택을 받은 백성으로 부르는지 질문했다. 그러나 이유가 단지 신이 그들을 위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확실한 지역을 선택했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졌다. 신이 모세에게 계시한 율법은 단순히 히브리 사람들의 국가를 위한 법 질서였다는 것, 그들 외에 누구도 율법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 물론 그들 자신도 그들의 나라가 있는 한에서만 그 율법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오성이 선천적으로 타락했다는 결론이 성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보편적 종교나, 전 인류를 위해 예언자와 샤도가 보여주었던 거룩한 율법은 자연의 빛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과연 다른지를 연구하고자 했다. 계속해서 기적이 자연 질서에 반해서 생기는 것인지, 우리가 기적의 제1원인을 통해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신의 존재와 섭리를 증명하는 것인지에 대해 연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에서는 이성과 일치하지 않거나 대립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외에도 예언자들이 아주 단순한 것, 즉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신에게 헌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설명을 통해 그들의 가르침을 요령 있게 드러냈고, 그렇게 해서 그 가르침을 공공히 했다. 그러므로 성서가 이성을 전혀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 성서가 철학과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는단는 것, 다른 것처럼 신학도 독립해 있다는 것을 강하게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전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를 강조할 것이다. 성서에 대한 해석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성서 해석과 영적인 주제에 대한 전체적 이해는 자연의 빛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서 자체에서 추론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미신에 빠지고 과거의 찌꺼기를 영원 자체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신의 말씀 자체보다 성서의 문서들을 더 믿는 것에 다루고, 이를 통해서 그로부터 발생한 편견을 입증할 것이다. 그리고 계시된 신의 말씀은 한정된 문서가 아니라 거룩한 정신이라는 단순한 개념 속에 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거룩한 정신은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사람들이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진심으로 신에게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서 신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이해력과 입장에 따라 성서의 가르침이 다르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믿음의 원칙을 설명하고 나서 난 뒤에 순종만이 계시된 인식의 목표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목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원칙과 방법에 있어서도 자연적 인식과 완전히 다르며 그것과 아무 것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더욱이 각각의 인식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각자 독특한 영역을 갖고 있으며,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상황이 매우 다양하고, 각자에게 더 어울리는 각각의 다른 입장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웃음거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적합한 예배가 있기 때문에 말한 것과 관련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믿음의 원칙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에게 판단의 자유와 기회를 허락해야 하고,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개인의 믿음은 오직 그의 행위에 따라서만 평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이 마음을 다해 자유로운 의지로 신에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존중할 것이다.

  계시된 거룩한 법이 각 사람에게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연구의 두번째 단계로 옮겨가, 국가의 자유와 최고 권력의 권리에 상관없이 이러한 자유가 허용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즉 평화에 치명적인 위험이 없고 국가 전체에 대한 치명적 손해가 없다면 자유를 단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각 개인의 자연적인 권리에서 시작해, 개인의 탐욕과 권력이 확장되는 것처럼 자연적 권리도 크게 확장된다는 것과 자연권에 따라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의지에 맞춰 살아서는 안되며 각자가 자기 고유의 수호자라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 밖에도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누구도 스스로 이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과,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과 함께 자연의 권리를 양도받은 그 사람은 개인적 권리에 따라 자신의 소신대로 살기 위해 제한되지 않은 이러한 자연의 권리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최고 정부 권력의 소유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권리를 갖는 것, 그들은 단지 법과 자유의 수호자일 뿐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은 모든 문제에서 그들의 결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길 수 없기 때문에, 즉 그것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누구도 자신의 자연권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으며, 자연권에 따라 국민들은 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국가에 치명적인 위험이 없다면 거부할 수 있는 권리, 그러므로 암암리에 그들에게 귀속되는 권리나 그들이 분명하게 정부 권력의 소유자에게 약속해야 하는 권리 등이 이에 속한다.

 이로한 고찰 후에 히브리 사람의 국가라는 주제로 옮겨가서, 어떠한 근거에서 누구의 결정을 통해 종교가 법적인 힘을 갖게 되었는지를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계속해서 알아둘 가치가 있는 다른 중요한 것들을 소개할 것이다. 그로부터 최고 정부 권력의 소유자들은 시민법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법에 대해서도 수호자이며 해석자라는 사실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신앙이 있는 것이고 무엇이 신앙이 없는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가 그들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보일 것이다. 사람들 각자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이 권리를 가잘 잘 수호하고 정부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일 것이다.

  현명한 독자들이여, 이러한 주제들이 그대들에게 생각해 보도록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 책 전체와 각 장이 갖는 목표의 중요성과 유용성을 고려하여 이 주제들이 환영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주제들에 대해 더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의 서문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철학자들은 중요한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 논문을 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내게는 어떠한 점에서이든 이 논문이 그들의 마음에 들기를 희망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앙심의 탈을 쓰고 받아들인 편견이 얼만나 끈질기게 정신에 달라붙어 있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서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미신을 제거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일반 사람들이 고집이 매우 세며, 그것이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칭찬과 비난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에서 우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반 사람들과 그들과 같은 욕망을 나누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 책에 부담을 갖고, 늘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해석을 내리기보다는 차라리 이 책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를 원한다. 그들의 부당한 태도는 그들 자신에게 유익한 점이 아무 것도 없을 테지만, 자유롭게 사색할 수 있는 사람들, 즉 이성은 신학은 하녀여야 한다는 것과 같은 주장에 방해받지 않을 사람들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다. 나는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유익할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읽을 여유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이 논문의 결론으로, 나는 내 조국의 권력이 행하는 정사(精査)와 판단에 대항하는 어떤 것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말한 것이 국법에 대립되거나 공공의 행복에 해를 미치지 않는지 판단하려 하겠지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나도 한 사람의 인간이며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도 각각의 관점에서 내 조국의 법과 신앙심, 휼륭한 도덕에 상응하는 것을 쓰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다.

  -  『신학-정치론』** (지은이 :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 옮긴이 : 김호경 · 책세상 · 2002년) p.13~27

 
  註) ....................

  * : 여기서 스피노자는 성서의 하느님을 뜻하는 단어로 Deus(God)을 사용한다.

  **신학-정치론 : 종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신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으며 종교를 맹신하던 중세 유럽에서 기존의 종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종교와 신을 제시한 스피노자. 그는 시대로부터 외면당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사상을 전개한, 시대를 앞선 사상가이다. 스피노자는 신을 자연의 모든 것을 창조한 초월적 존재가 아닌 자연 속에 실존하는 존재로 파악했으며,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과 성서 해석, 철학과 신학의 분리를 통해서만 진정한 종교와 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스피노자는 올바른 종교는 사람들에게 관용과 자유를 주어야 하며, 왜곡된 성서 해석과 종교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종교가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로 인한 다툼과 분쟁,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오늘날 스피노자의 사상은 올바른 종교와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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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개의 단어가 확인된다. 하나는 '추출된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통제된다'이다. 클라우드를 관리하려면 기능을 통제하는 모니터링 시스템이 필요하고, 이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사용자들로부터 숨겨진다. 역설적인 것은 손안에서 사용되는 작은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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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9
    Jan 2020
    19:00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④, 부채

    (...) 오늘날 자본주의는 유령에 쫓기고 있다. 유령은 부채라는 이름의 악령이다. 자본주의 강대국은 하나같이 이 유령을 쫓기 위한 숭고한 동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정말 부채를 정리하고 싶을까? 마리치오 라자라토*는 국가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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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19
    Jan 2020
    01:51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③, 미국식 개인주의와 공적 자금 · 세금

    (...) 미국의 유명 가스 프랭크 시나트라의 대표적인 노래인 '마이 웨이(My Way)'가 미국적 개인주의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일반적' 혹은 '관습에 맞게'란 뜻의 프랑스 샹송 '콤 다비튀드(Comme d'habitude)'가 '마이 웨이'의 원곡이라는 사실은 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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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18
    Jan 2020
    23:31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②, 금융 위기(부채의 역설)

    (...) 미국은 생산한 것보다 다 많이 소비하면서도 수십 년동안 풍족한 삶을 누렸다. 더 근본적인 수준을 살펴보면, 부채의 역설적인 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해서는 안된다'는 슬로건의 문제점은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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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5
    Jan 2020
    22:32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동일성과 다양성 · 일반성과 특이성, 꿈의 평면과 행동의 평면(원뿔형 도식)

    (...) 신경계와 목적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우 다양한 지각의 기구들이 중추들을 매개로 해서 동일한 운동 기구들에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다. 감각은 불안정하다. 즉 그것은 매우 다양한 뉘앙스를 취할 수 있다. 반대로 일단 만들어진 운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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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4
    Jan 2020
    15:37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과거와 현재의 관계(원뿔형 도식)

    (...) 우리는 커다란 실용적 이점 때문에 사실들의 실제 순서를 역전시키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으며, 공간에서 이끌어낸 이미지들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기억이 어디에 보존되는 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물리화학적인 현상들이 뇌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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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14
    Jan 2020
    00:43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이미지 · 시간과 공간

    (...) 순수 기억이 어떻게 잠재적 상태로 보존되는가 하는 것은 그것의 근본적인 무력함(impuissance)을 볼 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가 무의식적 심리 상태들을 생각하는 데서 갖는 혐오감은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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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13
    Jan 2020
    09:57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기억·지속·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생성

    (...) 우리는 순수기억, 이미지-기억, 지각이라는 세 항들을 구별하였는데, 이 항들 중 어느 것도 사실상 단독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지각은 결코 현재적 대상과 정신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다. 지각에는 항상 그것을 해석하면서 완결시키는 이미지-기억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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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0
    Jan 2020
    20:02

    [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①, 실업

    (...) 현재 한국의 상황을 보면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의 유명한 도입부가 절로 생각난다. '그때는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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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09
    Jan 2020
    17:18

    [철학] 푸코의 『감시와 처벌 - 감옥의 역사』 : 계보학 · 권력의 미시물리학 · 신체의 정치경제학

    (...)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년)은 미셸 푸코의 사상적 변화 과정에서뿐 아니라 서구 지성사의 전개과정에서도 새롭고 큰 변화를 보여준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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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30
    Dec 2019
    09:22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신체의 능동성, 기억(mories)

    (...) 식별이 주의적인 경우에, 즉 이미지-기억들이 현재적 지각에 규칙적으로 결합하는 경우에, 지각은 기억들의 출현을 기계적으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기억들이 지각 앞으로 자발적으로 향해 가는가? (...) 외적 지각이 실제로 우리에게 그것의 핵심적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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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19
    Dec 2019
    21:41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사물의 실재성·기억·현대 유물론의 탄생

    (...) 우리 지각의 현실성(actuality)은 그것의 활동성(activities)으로, 즉 그것을 연장하는 운동들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더 큰 강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단지 관념에 불과하고, 현재는 관념-운동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고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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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8
    Dec 2019
    16:48

    [철학]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 감각, 지각, 정념, 그리고 기억

    (...) 사람들은 모든 감각이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비연장적이며, 감각이 연장에 덧붙여지고, 지각 과정이 내적 상태들의 외재화로 이루어진다고 결론짓는다. 사실상 심리학자는 자신의 신체로부터 출발하며, 이 신체의 주변에서 받은 인상들이 그에게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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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1
    Nov 2019
    06:56

    [철학] 『사생활의 역사』 : 사생활의 경계와 공간(응접실·사생활·공적 생활·공간의 분절·사회적 성층 작용·노동)

    (...) 사생활은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현실이다.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므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선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리고 사생활은 공적 생활과 관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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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2
    Nov 2019
    03:24

    [철학]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 주체의 죽음, 해체와 탈중심화

    인간 주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현대철학의 쟁점 가운데 가장 첨예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현대철학은, 주로 프랑스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절대화된 주체, 이성적 주체, 세계 의미 부여자로서의 주체는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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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9
    Oct 2019
    12:53

    [철학]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 서문

    (...) 시간은 유한한 존재의 진정한 한계인가, 아니면 유한한 존재의 신(神)과의 관계인가? 시간은 유한성과 반대로 무한성을, 결핍에 반대하여 자족성을 존재자에게 보장해 줄 수 없는 관계, 하지만 만족과 불만을 넘어서 덤으로서의 사회성을 뜻하는 관계이...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6358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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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14
    Oct 2019
    19:23

    [철학] 『말과 사물』 : 서문 · 분절(分節, articulation)의 문제

    (...) 이 책의 탄생 장소는 보르헤스의 텍스트이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에게 존재물의 무질서한 우글거림을 완화해 주는 정돈된 표면과 평면을 모조리 흩뜨리고 우리의 매우 오래된 관행인 동일자와 타자의 원리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오래...
    Category철학 By이우 Views12404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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