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성직자, 경제학자, 그리고 도덕가들은 이처럼 정신 나간 생각에 반대하기는 커녕 노동의 주위에 광채를 드리우고 있다. (...)
유럽의 탐험가들은 패픽(Paeppig)의 말을 빌리자면 "문명의 유독한 숨결"에 더럽혀지지 않은 원시 종족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자부심에 넘치는 그들의 당당한 태도 앞에서 경이로움과 찬탄을 금치 못한다. 오세아니아 제도의 원주민들에 대해 조지 캠벨(George Campbel) 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 한 번 보고도 이처럼 우호적인 인상을 팍 심어줄 수 있는 민족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옅은 구리빛의 부드러운 피부, 금빛 곱슬머리, 행복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간단히 말해 이들의 외모 전체가 새롭고 멋진 제누스 호모(genus homo) 즉 인류라는 종의 전형을 대변하고 있다. 이들의 외모와 건장한 신체는 이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종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
이는 프롤레타리아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1848년 6월 노동자들은 손에 무기를 쥐고도 이러한 노동을 요구했고, 게다가 노동을 가족들에게까지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장주들에게 아내와 아이들을 넘겨주었다. 본인들 스스로의 손으로 단란한 가정을 허물어버렸다. (...) 바쿠스의 연인이자 대담하고 솔직하게 수다를 떠는 그네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늘 이곳저곳 마실 다니기를 좋아하고? 요리를 들기며, 언제나 노래를 부르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고통 없이 건강하고 활기에 넘친 아이를 낳는 매력적인 여자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공장에 다니는 젊은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들은 빈혈에 걸린 데다 위는 그만 병들어버렸으며 팔다리는 밑으로 축 처져 있어, 마치 생기 없이 시들어버린 꽃을 보는 듯하다. (...) 우리의 시대는 노동의 세기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 불행, 부패의 세기이다. (...)
우선 알자스 지방의 제조업자인 미에그 씨로부터 '돌퓌, 메에그 회사(Dollfus, Mieg & Co.)의 공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과거의 장인의 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1813년 근대 기계공업이 막 태동하려고 하던 때)에 뮐루스에 살던 노동자들은 읍과 주변 마을에 거주하는 농민들로서, 거의 모두가 집 한 칸과 약간의 전답을 갖고 있었다." 그 시기는 노동자들의 황금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에 알자스 지방의 공업은 목화로 세계를 장악하거나 돌퓌와 케클랭과 같은 공장주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25년 후에 빌레르메가 알자스 지방을 방문했을 때는 근대의 미노타우로스 즉 자본주의 공장이 그곳을 정복해버린 후였다. 인간의 노동을 끝없이 욕망하는 공장은 노동자들을 단란한 가정에서 끌어내 날이 갈수록 처참하게 착취하면서 노동력을 비틀어 짜냈다. 기적 신호가 울리면 노동자들은 수천 명씩 떼지어 몰려들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수"라고 빌레르메는 말하고 있다. "노동자 17,000명이 어쩔 수 없이 이웃 마을에 많은 집세를 내며 숙박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일터인 공장에서 3, 4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노나하의 뮐루즈에서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하상 아침 5시 정각에 작업이 시작되어 저녁 8시 정각에 끝난다. 그들이 아침마다 도싱 도착하여 저녁에 다시 떠나는 모습은 정말 장괸이었다." 그들 중에는 창백한 안색에 종종 맨발로 진흙땅을 걸어다니는 여자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비나 눈이 오면 우산이 없어 앞치마나 스커트를 머리에 뒤집어쓴다. 이들 못지 않은 수의, 아니 더 많은 어린이들이 마찬가지로 몸은 더럽고 안색은 창백하며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작업하는 동안 기계 기름이 떨어져 온몸은 기름투성이였다." (...)
상품의 과잉생산과 제조과정에서의 질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을 달라 일을 달라고 애원하며 시장을 가득 메웠다. (...) 일단 일할 기회가 생기면 모두 와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에 대한 게걸스러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12, 14시간의 노동을 요구한다. 하지만 다음 날에는 노동에 대한 이러한 집착을 다시 부추길 수 있는 음식물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쫓긴다. 매년 철 따라 모든 공장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한 생물체를 파괴하는 과잉노동 다음에는 두 달 혹은 넉 달 동안의 절대적인 휴식이 이어진다. 그리고 일을 멈추면 당연히 그나마 벌어들이던 약간의 수입도 끊기게 된다. 노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쁜 버릇은 마치 악마처럼 노동자 가슴에 착 달라붙어 있다. (...)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불량에 걸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뺏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 (...)
오! 게으름이여, 이 오랜 고통에서 자비를 베푸소서!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 (…)
-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그 · 새물결 · 2005년 · 원제 : Le droit a la paresse, 1880년) p.2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