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플레옹 3세 치하에서 파리의 근본적인 개조는 무엇보다 콩코르드 광장과 시청을 연결하는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아마 70년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파리의 건축상의 경관을 위해서는 하늘의 축복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플레옹 3세는 모든 도시구역을 개조할 의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슈타르는 1857년에 이렇게 쓸 수 있었다. "옛 파리를 보고 싶다면 서둘러야 한다. 새로운 통치자는 아무래도 옛날 건축을 가능한 한 남겨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기 때문이다."(아돌프 슈타르, <5년후> 1권, 올덴부르크, 1857년, 36페이지) (E 1, 6) (중략)
"지하는 가스배관 공사와 하수도 건설을 위해 철저하게 파헤쳐졌다. ... 과거 파리에서 이토록 많은 건축 자재가 운반되고, 이토록 많은 공동주택과 관이 건설되거나, 이토록 많은 기념 건조물을 보수하고 건립하거나, 석재로 마름질한 정면이 이토록 많이 건설된 적은 없었다. ... 서둘러야 했으며, 고가에 매입한 토지를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중의 자극제였던 셈이다. 파리에서 지하 저장소는 1층 만큼 지하로 파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지하 1층이 생겼다. 비카가 사용 원리를 발견한 콘크리트와 시멘트의 사용은 이들 지하층을 경제적이고 대담하게 건축하는 데 공헌했다."(E. 바르쇠르, <1789~1870년까지의 프랑스 노동계급과 산업의 역사> 2권, <파리, 1904년>, 528~529페이지. (E 1a, 2)
"1848년 혁명 직후의 파리는 더이상 마무도 살지 못하는 곳이 될 것만 같았다. 날마다 점점 더 멀리 연장되고 인접 국가의 선로와 연결되고 있던 철도를 통한 끊임없는 왕래로 인해 인구는 크게 증가하는 반면 생활은 불안정해져 갔는데, 이제 파리 주민들은 부패하고, 비좁고, 복잡하게 뒤엉킨 골목길에 어쩔 수 없이 갇혀 그곳에서 질식해가고 있었다"(뒤캉, <파리> , 6권, 253페이지) (E 1a, 3)
오스만 하에서의 토지수용, "몇 명인가 이 일을 일종의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들이 나타났다. ... 이들은 부동산 수용, 산업적인 용도의 공적인 토지 수용, 임대차물의 수용, 감정의 수용 등에 대해 법정에서 변론을 했다. 선조 대대로 내려온 집이나 손자들을 위한 요람이니 하는 말이 논거로 제시되었다. 벼락부자에게 '어떻게 재산을 모았습니까'라고 묻자 '토지가 수용되었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 왔다. ... 새로운 기업이, 토지를 수용당한 사람들의 이익을 챙겨준다는 명목으로 어떠한 사기 짓거리도 서슴치 않는 기업이 나타났다. ... 이러한 기업들은 소규모 기업을 찾아내 자세한 회계 장부나 가자 상품 목록, 가짜 상품을 제공해 주었다. 심지어 심사위원회가 정해진 날에 방문할 때에는 일부러 손님을 동원해 가게를 가득 메우기까지 했다. 용케 손에 넣은 낡은 공문서 용지를 이용해 임대차 계약서를 날조해 조건을 부풀리거나 기간을 연장하거나, 날짜를 당기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점포를 새로 도장하고 일당 3프랑으로 급히 조달한 점원들을 배치하기도 했다. 파리시의 금고를 강탈한 일종의 방드 누아르(bande noire)였던 셈이다."(뒤캉, <파리> , 6권, 255~256페이지) (E 1a, 4) (중략)
"도시의 재건은 ... 노동자들로 하여금 변두리 지구(arroundissement)에 살도록 강요함으로서 그때까지 부르조아들과 맺고 있던 이웃 관계의 끈들을 끊어버렸다."(E. 바르쇠르, <1789~1870년까지의 프랑스 노동계급과 산업의 역사> 2권, <파리, 1904년,775페이지. (E 1a, 2) (...)
"오스만의 설계도는 완전히 자의적인 것이었다. 도시 계획에 기반한 엄밀한 결론이 아니었다. 재정적 · 군사적 차원의 처리였다."(르 코르뷔지에, <도시 계획>, 파리, 1925년>, 250페이지. (E 2a, 1) (...)
"그(오스만)는 1864년 수도의 전제적인 체제를 변호하기 위해 보기 드물게 과감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파리는 주민들에게는 커다란 소비 시장, 거대한 노동 현장, 온갖 야심의 투기장이거나 아니면 그저 만나서 즐기는 장소일 뿐입니다. 고향이 아닌 것입니다.' 이에 대해 그의 논적들은 그의 평판에 무거운 돌이나 얹는 것처럼 이렇게 한마디 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파리에 와서 주위 상황을 존경할 만한 것으로 만들지만 ... 진짜 떠돌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시민으로서의 마음가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어 철도, 행정망, 전국적인 활동의 지부들 중 모든 것이 통한다는 것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집중화와 질서의 나라 프랑스에서 수도가 자치 행정 조직과 관련해 거의 언제나 비상 체제 하에 있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조르주 라론즈, <오스만 남작>, 파리, 1932년, 172~173페이지, 1864년 11월 28일의 연설에서. (E 3a, 1) (...)
"파리는 독자적인 표정과 생활 방식을 갖고 있는 소 시가지, 즉 사람들이 그것에서 나서 죽으며, 그곳에서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은 꿈조차 꾸지 않으며, 자연과 역사가 협력해 통일을 이루는 가운데 다양성을 실현시켜온 소 시가들의 집합이었으나 마침내 영원히 그렇지 않게 되었다. 중앙집권화, 과대망상벽이 인공의 도시를 만들어, 이제 파리 사람들은 이 도시 안에서 더 이상 편안한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틈만 나면 떠난다. 그리하여 휴가 강박증이라는 새로운 욕구가 생겨났다. 반대로 주민들이 떠나간 도시에는 정해진 시기에 외국인들이 도착한다.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국제적 교차로가 되어버린 자신의 도시에서 파리 사람들은 마치 뿌리 뽑한 것처럼 보인다."(뒤베크/데스프젤, <파리의 역사>, 파리, 1926년>, 427~428페이지) (E 3a, 6) (...)
- 『아케이드 프로젝트』(발터 벤야민 · 새물결 · 2005년) 1권, <오스만식 도시 개조, 바리케이드전> p. 365~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