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 중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 된 아이의 신경에 고통을 가하는 순간, 즉각 그 아이의 몸을 가르고, 아주 조심스럽게 관찰하지 않으면, 절대 그 부분은 해부학적으로 완벽히 밝혀질 수 없어.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의술의 발달을 지체시킨다는 것은 도대체 내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수백만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를 희생시키는 것인데, 그 가치를 따져 봐야 하나? 법에 입각한 살인은 우리가 수술을 시행함으로써 저지르는 살인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토록 현명하다고 하는 법률이 죽이는 대상 역시, 1천명을 구하기 위하여 죽어가는 하나의 희생물 아닌가? 따라서 그 무엇도 우리들을 막지는 못해.”
“오오! 물론!‘ 다른 사람의 대꾸였습니다. (...)
- 『미덕의 불운』(D. A. F. 드 사드 · 열린책들 · 2011년 · 원제 : Les infortunes de la vertu, 1787년) p.94
(...) “ (...) 가난한 자도 자연의 질서 속에 나름대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힘에 있어서 불평등하게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자연은, 우리의 문명이 그의 법칙에 변화를 가져오는 상황 속에서도, 그 최초의 불평등이 보존되기를 열망하는 스스로의 의지를 우리들에게 역설한 것이야. 내가 이미 말했듯이 가난한 자가 이제는 약자를 대신하게 되는데, 그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확립된 질서를 무산시키는 일이고, 자연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며, 자연의 경이로운 조절의 근간이 되는 균형을 뒤엎는 짓이야. 그것은 또한 우리 사회에서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평등을 획책하는 일이고, 무기력과 빈둥거림을 고취하는 일이며, 도움이란 것이 가난한 자로 하여금 일하지 않고 그것을 얻는 습관을 갖도록 하기 때문에, 부자가 혹시 도움을 거부할 경우, 결국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서 도둑질을 하라고 가르치는 일밖에 되지 않아.”
“아아! 당신의 그 원칙들은 너무나 비정합니다! 당신이 항상 부자로 살아오지 않았다면 그러한 말을 하겠어요?”
“내가 항상 부자였다는 말은 어림도 없는 소리야. 다만 나는 나의 운명을 제어할 줄 알았고, 우리들을 교수대 아니면 양로원으로 결국 이끌어가는 그 미덕이라는 유령을 짓밟아 버릴 줄 알았으며, 종교라든가, 선행, 인정, 따위 등이 재산을 축적하려는 사람에게는 발부리에 부딪히는 돌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을 줄 알았을 뿐이야. 그리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 내동댕이친 그 잔해 위에 나의 재산을 튼튼히 쌓아 올렸지. 신성한 율법이건 인간의 법률이건 모두 비웃고, 만나는 약자들은 여지없이 희생시키며, 다란 사람들의 신뢰와 어수룩함을 악용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는 파산으로 몰아넣고 부자들로부터는 훔쳐냄으로써, 드디어 내가 숭배하던 그 까마득히 드높은 신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야. 너는 왜 나를 본받지 않지? 행운이 이미 너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래, 그 행운 대신 네가 선택한 그 백일몽 같은 미덕이 너의 희생을 얼마나 위무해 주었지? 어무 늦었어. 가엾은 여자야, 너무 늦었어. 지난 날의 네 오류를 맘껏 한탄해 봐. 그리고 계속 고통을 받으며, 네가 그토록 숭배하는 유령들 속에서, 너의 고지식함 때문에 잃은 것을 힘 닿는 데까지 찾아봐.”
그 망을 지껄이면서 달빌르는 저에게 덮쳐 왔습니다. (...)
- 『미덕의 불운』(D. A. F. 드 사드 · 열린책들 · 2011년 · 원제 : Les infortunes de la vertu, 1787년) p.179~181
(...) ‘오! 부인!’ 제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범죄에 힘입어 거두셨다면, 필경에는 의로운 섭리가 그것을 오랫동안 누리도록 방관하지 않을 거예요.’ ‘잘못된 생각이에요.’ 뒤부와 부인이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섭리가 항상 미덕을 보호한다고 믿지 마요. 행운이 잠시 당신을 찾아왔다고 해서 그러한 오류에 빠지면 안 돼요. 한편에서는 미덕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악덕에 빠져 있다고 해도, 섭리의 법칙을 유지하는 데는 마찬가지예요. 섭리에게는 대등한 악의 총화와 미덕의 총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의 개인이 어느 편을 택하든 그에게는 지극히 무관심한 일이예요. 내 말을 잘 들어봐요. 쏘피,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 봐요. 당신은 기지를 가지고 있으니 당신을 설득하고 싶어요. 인간이 악덕과 미덕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선택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미덕도 아덕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양자 증 구태여 어느 것을 제쳐 두고 다른 것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길로 들어서는 것이 중요해요. 그 길을 벗어나는 사람이 잘못이에요. 모두 미덕을 지키는 세상이라면 나 역시 당신에게 미덕을 권장하겠어요. 그러나 온통 썩어 빠진 세상이라면 오직 악덕 이외의 다른 것은 구너하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다르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파멸해요. 그가 만나는 모든 것과 충돌하게 되는데, 그가 가낭 약하기 때문에 결국 파괴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에요. 숱한 법률이 질서를 회복하고 인간을 미덕으로 다시 인도해 오려고 하지만 그것은 헛수고예요. 그 일을 시도하려는 법률 자체가 우선 너무 사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에는 너무 약하여, 이미 닦인 길에서 인간을 잠시 떼어 놓을 수는 있으되 그 길을 영원히 버리도록 할 수는 없어요. 다수의 이익이 인간들을 부패로 이끌어가고자 할 때, 어느 특정인이 자기만은 부패하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다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되고, 결국 전체의 이익에 대항하여 투쟁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끊임없이 다수의 이권에 반대만을 일삼는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 행복은 무엇이지요? 물론 당신은, 인간의 이익을 방해하는 것이 악덕이라고 하겠지요? 나 역시 악덕과 미덕이 대등한 비율로 구성된 세상이라면 당신의 말에 찬동하겠어요. 그러한 경우, 한편의 이익이 다른 한편의 이익에 드러나는 충격을 주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전체가 썩어버린 사회 속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그 반대로, 나의 사악함이 침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악하기 때문에, 나의 악이 그들 속에서 다른 악을 태동시키고, 그것이 그들이 받은 해악을 보상해 주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은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어요. 악덕은 오직 미덕에게만 위험한데, 그 이유는 미덕이 나약하고 소심하여 결코 아무 것도 감행치 못하는 속성 때문이에요. 미덕이 이 지상에서 완전히 추방되기를! 악덕의 침해를 받는 사람들이 모두 사악하기 때문에, 그 악덕이 이제 아무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또 다른 악들을 꽃피우게 할지언정 그것들을 미덕으로 변질시키지는 않아요. 미덕의 긍정적인 효과를 예로 들어 나를 반박하겠어요? 또 다른 궤변이에요. 그 효과라는 것은 약자들에게나 유용한 것이지, 자신의 힘으로 자족하며, 운명의 변덕을 제어하는 데 오직 자신의 민첩함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에요. 아가씨,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끊임없이 역행하면서, 어떻게 당신의 일생을 망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만약 당신도 급류에 자신을 맡겼더라면 나처럼 항구에 닿았을 거예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는 사람이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만큼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겠어요? 한 사람이 역행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은 순응하여 자신을 맡겨 버려요. 당신은 나에게 항상 섭리를 역설하지만, 그 섭리가 질서를 좋아하며 나아가 미덕을 사랑한다고 누가 증명해 줘요? 그 섭리가, 끊임없이 자신의 불의와 부당함의 실레들만을 당신에게 제공하지 않았던가요? 인간에게 전쟁과 흑사병, 기근을 보내주며, 어느 구석 예외 없이 사악한 우주를 만들었는데, 당신의 눈에는 그 섭리가 미덕에 대한 극도의 사랑을 타나내는 것처럼 보여요? 섭리의 행위 자체가 사악함 뿐이고, 모든 것이 악과 부패 뿐이며, 그의 의도나 이루어 놓은 일들이 온통 죄악과 무질서투성이인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사악한 사람들이 그의 마음에 거슬린다고 생각해요?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악으로 이끌어 가는 힘을 누구로부터 받았지요? 그 힘을 보여준 것은 바로 그의 손 아닌가요? 우리의 의지나 감각들 중 그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어요? 그러니, 그에게 아무 소용 없는 것에 대한 애착을 그가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든가 혹은 부여했다는 말이 타당성 있을까요? 따라서 사악함이 그에게 유용할진대. 무엇 때문에 사악함을 반대하려고 하며, 무슨 권리로 악을 파괴하려 애를 쓰고, 무슨 이유로 악의 목소리에 귀를 막으려 한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에 철학이 조금만 더 있어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며, 법률가들이나 법관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토록 가혹하게 비난하고 처벌하는 악들이 어떤 때는, 항상 아무 보상 없이 부르짖는 미덕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거예요.”
‘그러나, 부인, 제가 나약하여 저 자신을 부인께서 주장하시는 그 끔찍한 원칙에 내밭길 경우, 끊임없이 제 가슴 속에 생기는 회한을 부인께서는 도대체 무슨 수로 없애겠습니까?’ 제가 반박했습니다. (...)
“ (...) 우리에게 회한을 안겨주는 것이 범죄뿐이라는 생각은 진실이 아니에요. 범죄란 기실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자연의 총체 속에서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면, 범죄라는 것을 저지르면서 느끼는 회한을 정복하는 것 역시 쉬울 거예요. (...) 우선 사라들이 범죄라고 칭하는 모든 것을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돼요. 또한 사람들이 범죄라고 규정하는 것들이 모두 그들이 만든 법률이나 국가적 인습을 위반하는 행위에 불과하며, 프랑스에서는 범죄라고 하는 것이 불과 몇 천 리 밖에서는 범죄가 되지 않고, 이 지상 어디에서나 진실로 범죄 취급을 받을 수 있는 행위는 단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에 입각하여 근본적으로 범죄라 칭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모든 것이 견해와 지역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일부터 시작해야 돼요. (...) 회한이라는 것이 금지라는 조치를 고려할 때에만 성립하는 개념이고, 억압을 파괴한다는 것 때문일 뿐, 결코 행위 자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자기의 내부에 그것이 잔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이겠어요? (...) 회한을 가져다주는 행위를 돈담무심하게 고찰하는 습관을 가지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윤리와 관습을 깊이 고려하여 그 행위 자체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해요. (...) 쏘피, 30년전부터 악과 범죄의 끊임없는 연쇄작용이 나를 한 발 한 발 융성을 항해 인도해 와, 이제 그것에 닿게 되었어요. 두세 차례만 더 성공한다면, 태어날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가난과 거지생활을 청산하고, 5만 리브르 이상의 연금을 누릴 수 있는 신분으로 돌입하게 되어요. 그 찬연한 과정을 밟아오는 동안, 단 한순간이나마 회한이라는 것의 뜨거운 가시를 내가 느껴 보았다고 생각해요? (...) 사람들이 나의 졸렬한 솜씨를 탓할지는 모르되, 나의 의식은 언제나 평화 속에 있을 거예요.” (...)
- 『미덕의 불운』(D. A. F. 드 사드 · 열린책들 · 2011년 · 원제 : Les infortunes de la vertu, 1787년) p.187~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