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한비야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Photo by 이우 )
… <홈 패인 공간>은 자동차길이나 수로처럼 홈이 파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선 오직 주어진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 옆으로 '샐'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학교 교육이나 공무원 체제가 거기에 해당된다. 구성원들로 하여금 단일한 방식으로만 행동하게 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 질주하거나 아니면 낙오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것인 <홈 패인 공간>의 속성이다. 그에 반해, <매끄러운 공간>은 초원이나 사막처럼 홈이 없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서 사방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 아이스링크장이나 알래스카의 설원을 연상하면 된다 …
-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중에서
육지와 바다를 환경학적으로 바라본다면, 육지는 바다에 비해 매우 척박하고 황량하다. 육지에 사는 생물은 더위와 추위, 비와 바람, 뜨거운 햇빛에 견뎌야 하는 것은 물론 생명에는 필수적인 물을 얻기 위해 생명마저 걸어야 하는 척박한 곳이다. 반면에 바다의 생물들은 육지에 비해 온도 차가 없고 비와 바람, 뜨거운 햇빛에도 덜 민감하고 육지보다 먹이 얻기가 용이하다. 환경이 좋기에 바다에 사는 생물들은 새끼를 배 속에 안기보다 알을 낳아 바다에 풀어 놓는다. 그러나 육지의 동물들이 이처럼 했다가는 종족 보존이 불가능하다. 천적이 너무 많고 가뭄과 기근에 시달려야 하고, 먹이를 얻기 위해 딱딱한 땅 위를 내달려야 하는 육지동물에게 알 낳기는 그야말로 위험천만이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은 새끼들을 배속에서 낳고, 그것도 모자라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배 안에서 키워내는 것이다. 포유동물의 탄생이다. 어느 미국의 생물학자는 ‘고래는 바다의 풍요로움을 찾아 육지를 떠났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여간, 그리하여, 그래서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은 고단하다.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드러다 본다면, 육지가 <홈 패인 공간>이고 바다는 <매끄러운 공간>이다.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의 하나>>에 나오는 개념이다. 삶에는 기하학적인 공간, 물리적인 공간, 도시 공간, 논리적 공간 등 많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공간 종류가 아니라 공간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다. 자동차길이나 수로처럼 홈이 파여져 있는 <홈 패인 공간> 속에서 갈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다. 앞으로 나가거나 혹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전후좌우 어디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어떨까. 수직적인 시간의 차원에서 본다면 병원에서 나고 학교 가고 취업하고 자식 낳고 집 장만하고 그러다가 늙고…. 수평적으로 본다면 도로의 방향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고…. 수직?수평으로 바라봐도 확연히 <매끄러운 공간>이 아니라 <홈 패인 공간>이다. 뜨거운 여름날의 휴가도 매끄럽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홈이 패여 있다. 어디 가서 무얼 먹고 어느 곳에서 잔다는 등 깊게 홈을 파고 그 안으로 다녔다. 여행이 아니라 관광을 하며 편안했다. 그래서, 행복했을까. 행복하든 하지 않든 누구인들 홈 패여 있고 싶겠는가. 어디든 나아가고 싶었던 젊은 날이 있었으나 척박한 환경들이 홈을 패 놓았다.
▲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한비야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 고미숙은 인문학적 사유를 따라 ‘열하’까지 갔다 왔고
한비야는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아 ‘바람의 딸’이 되어 돌아왔다. (Canon EOS 5D / Tamron 17-35mm / Photo by 이우 )
▲ 영화 <<김씨 표류기>>. 한강 밤섬으로 들어간 김 씨는 영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 전남 신안군 증도의 <<신안갯벌 소금축제>>. 지역마다 특색 있는 체험학습행사를 마련해
‘홈 패인 공간’의 사람들을 ‘매끄러운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Canon EOS D60 / Tamron 17-35mm / Photo by 이우 )
그래서일까. 이제 사람들이 <매끄러운 공간>으로 발을 내딛고 있다. 고미숙은 인문학적 사유를 따라 ‘열하(熱河, 중국의 리허)’까지 갔다 왔고 한비야는 늦은 나이에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돌아 ‘바람의 딸’이 되어 돌아왔다(한비야 에세이집, <<그건 사랑이었네>>). 자의든 타의든 한강 밤섬으로 들어간 김 씨는 영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 표류기)>>). 어찌 영화나 책뿐이겠는가. 책상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체험학습>이라며 길을 나서고 지역마다 특색 있는 체험행사를 마련하면서 마침내 사람들은 ‘아이 쇼핑’이나 ‘관광’이 아니라 유목민이 되어 <매끄러운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제, 체험이 없는 여행은 그야말로 ‘앙코 없는 찐빵’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홈 패인 공간>에 살다 보니 아직은 많이 서툴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쪼그려 앉아서는 일을 보지 못한다. 길을 벗어나면 두렵고 무작정 기다린다는 일이 무섭다.
뜨거웠던 올 여름, 나는 전남 신안군 증도라는 작은 섬 위에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달리고 섬과 섬 사이 바다 다리를 건너며 나를 그 먼 곳으로 부른 것은 이 바다에 펼쳐진 소금밭(염전, 鹽田)이었다. 바닷물은 25일 동안 햇빛 아래 말라 소금꽃을 피우고, 꽃잎을 떨구며 응고되면서 소금으로 태어난다. 나는 그 먼 바다로 와서 폭염 아래 피는 소금꽃들을 바라보며 행복해 했다. 동행자는 더운 여름날 그늘 하나 없는 이곳에 와서 뭘 하느냐며 허탈해 했다. 내가 폭염 아래 소금이 꽃을 피우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소금판매소에 가서 소금을 사고 있었다. 더운 물도 안 나오는 척박한 환경. 마침내 할 일이 없어진 그녀의 채근에 나는 그 원시의 바다를 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을 하며 소금밭의 이미지를 담고 돌아 왔으며, <홈 패인 공간>에 익숙한 그녀는 ‘관광’을 하며 소금 포대기를 안고 돌아왔다.
아직은 닫힌 공간에 익숙하고, 아직은 길 떠나기에 서툴지만 마침내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길을 떠나고 있다. 땅 위의 물류가 바다와 하늘로 흐르듯, 사람들이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가듯, 홈 패인 우리의 마음도 매끄러워지면 좋겠다.
................
* 이 글은 한국해운조합 사보 <해운스케치>에 게재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