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조선에서는 갑자기 ‘벽(癖)’ 예찬론이 쏟아져 나온다. 일종의 마니아 예찬론이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벽’이란 말은 이 시기 지식인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지금은 낭비벽, 도벽 등 좋지 않은 어감으로 쓰는 이 말이 이때는 긍정적 의미로 쓰였다.
또 ‘치(癡)’,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경향도 생겨났다. 관습적 기준으로 볼 때 미쳤다는 의미를 지닌 ‘벽’이 사회적 통념적으로는 ‘치’, 즉 바보 멍청이로 인식되었다. 이 시기 설치(雪癡), 치재(癡齋), 매치(梅癡), 간서치(看書癡), 석치(石癡) 등 치 자가 들어간 이름이나 호가 부쩍 많아지는 건 그 반영이다.
이들은 미쳤다거나 바보 같다는 말을 오히려 명예롭게 여겼다. 미치지도 못 하고 그럭저럭 욕 안 먹고 사는 건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근대화의 에너지가 뽑아져 나온다. 지식의 패턴이 달라지고 정보의 인식이 바뀌었다. 삶의 목표 또한 궤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중략)
이 시기 문인들의 호나 문집 이름에는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증폭되는 자의식을 암시한 것이 많다. 최근 발견된 이서구의 젊은 시절 문집 제목은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이다. 풀이하면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 자문한다’는 뜻이다. 심능숙은 자기의 문집 표제를 <<후오지가(後吾知可)>라 했다. ‘훗날의 내가 알아주면 그뿐’이란 말이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에는 아예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다. 박지원이 서문을 써준 역관 이홍재의 문집명은 <<자소집(自笑集)>>이다. 남에게 보여주고자 쓴 것이 아니라 그저 혼자 보고 웃자고 쓴 글이라 했다. 자못 포스트모던한 명명들이다.
용에게 여의주가 소중하듯이 말똥구리에게는 말똥이 소중하다. 사람들은 여의주만 귀하게 보고 말똥은 우습게 안다. 하지만 나는 내 말똥을 더 귀하게 여기겠다. 유금은 이런 취지에서 자신의 문집 제목을 <<낭환집>>이라 했다. 말 그대로 ‘말똥구리 문집’이다.
신의측은 ‘나에게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자를 ‘환아(還我)’라고 지었다. 이용휴는 그를 위해 <<환아잠(還我箴)>>을 지었다. 거짓 나를 쫓느라 잃어버린 참 나를 되찾아, 다시는 ‘나’를 떠나지 않는 주체적 삶을 살라고 권면(勸勉)했다. 그의 자는 엉뚱하게도 ‘하사(何事)’였다. 말 그대로 풀면 ‘뭔 일’쯤 된다. 이덕무는 흔해 빠진 명숙(明叔이)이란 자를 무관(懋官)으로 바꾸었다. 남과 나를 구분하기 위한 것, 나는 나만의 이름을 가져 내 목소리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중략)
스스로 아는 것이 없을 줄을 안다 해서 별호를 ‘자지자불지선생(自知自不知先生)’이라 짓는가 하면, 깔깔대며 웃는 사람이란 뜻의 ‘가가생(呵呵生)’이나, 멍청이란 의미의 ‘우부(愚夫)’, 들판에서 굶주리는 사람이라 하여 ‘야뇌(野?)’니 하는 이상한 이름을 즐겨 지었다. 신분이 천했던 시인 이단전의 호가 ‘필재(疋齋)였다. 단전(亶佃)은 ’진짜 종놈‘이란 뜻이다. 나는 진짜 종놈, 하인에 불과하다고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름으로 세상을 조롱한 것이다. (중략)
어려서부터 북벌을 국시로 삼고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치며 자란 지식인들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사통팔달로 쭉쭉 뻗은 길과 으리으리한 벽돌집 그리고 쉴 새 없이 오가는 우마차를 보고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북벌은 어느 순간 문득 북학(北學)으로 대체되었다. (중략) 연암이 중국에 가서 본 장관을 꼽으면서, 진짜 장관은 똥 덩어리와 벽돌에 있더라고 말할 때 변화는 이미 시작 되었다. 우물 안에만 있다 넓은 세상에 나가 상대를 보고 나니 나의 객관적 실체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고 지은 소설이 <허생전>이다. 경험의 확장이란 이런 것이다. 한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 없다. 각성된 의식은 잠재워지지 않는 법이다.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변화 앞에 18세기 조선 사회는 휘청했다. 한쪽에서는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외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제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화사치 풍조도 만연했다.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중국을 배워야 하는 까닭을 설파했지만, 중국제에 환장 들렸다 하여 당벽(唐壁), 당괴(唐魁)의 비난도 동시에 들어야 했다.
18세기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18세기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확실히 특별했다. 지식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해석의 틀도 바뀌었다. (중략) 18세기 들어 서구 중세의 형이상학적 관념이성은 합리주의적 계몽철학에 자리를 내준다. 이들은 삶과 세계의 질서를 과학적 질서로 재편하고자 했다. 종교의 속박, 이념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고, 구원의 미명 아래 자행된 온갖 우상과 폭력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자리에 주자주의(朱子主義)를 두면 조선의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서구 계몽주의가 합리적 이성과 함께 정열적(passion) 인간을 지향할 때, 18세기 조선은 주자학의 세례를 벗어던지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합리성과 동시에 벽(癖)과 치(癡)의 미친 열정을 옹호했다. 디드로가 <<철학적 사고>>에서 ‘사람들은 왜 정열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 이성을 모욕하는 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위대하게 고양시킬 수 있는 건 위대한 정열뿐이다’라고 투덜댈 때, 박제가는 ‘세상에 미치지 않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중략)
서양에서 위선과 강요된 경건함의 세월이 지나고 쾌락의 옹호와 관능의 광기가 휩쓸 때, 조선에서도 웰빙의 미명 아래 온갖 골동품 수집을 비롯하여 호화사치 풍조와 풍속의 타락이 자행되었다. 어디서나 하층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참혹한 것마저 꼭 같았다. 도덕론자들이 볼테르, 디드로, 루소 등을 감옥에 가두고 억압한 것처럼 박지원, 김려, 이옥 등은 불온한 문체로 불온한 사상을 전파한다 하여 반성문 제출을 요구받고 과거 합격이 취소되었으며, 반체제 인물로 낙인 찍혀 음습한 그늘에 묻혀 있어야 했다. ……
- 정민의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휴머니스트, 2007년) 서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