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 5D / Canon EF 50mm / Photo by 이우
… 권력이나 재력을 물려받지 못한 사람에게 신분 상승의 가능성은 학력을 높이는 길 외에는 없다. 실제로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학력을 하나의 ‘자본’으로 본다. 사회의 하층 계급에서 상층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자본이 필요하다면 여기에는 학력자본도 한몫을 한다. 고전적인 계급의 개념은 주로 경제적인 것으로, 생산수단이나 자본이 소유 여부에 따라 계급이 구분되었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아비튀스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계급을 설명한다. 아비튀스란 인간 행위를 생산하는 무의식적 성향을 뜻한다.
법대 교수인 김 씨는 카잘스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좋아하고, 전철역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박씨는 하루 종일 이미자의 뽕짝 카세트만 틀어놓는다. 일반적으로바흐의 음악은 이미자의 음악보다 고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 교수가 저명한 연극연출가인 아버지와 음악대학의 기악과 교수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다면 고급하다는 말의 의미가 사라진다. 그런 집안에서 그런 문화적 여건을 가지고 그런 교육을 받았다면 김 교수의 음악적 취향은 고급, 저급을 논하기 이전에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비튀스란 의식적인 취향의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이다. 흔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취미도 실은 무의식적 성질을 갖고 있다.
아비튀스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아비튀스는 복잡한 교육 체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화의 산물이다. 김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서양 고전음악에 붙혀 살았을 테고, 무의식적으로 그 취향에 대한 아비튀스를 키워왔을 것이다. 반면 박 씨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자칭 ‘공돌이’, 타칭 산업역군으로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던 짬짬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흪러간 가요’를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나름의 아비튀스를 키워왔을 것이다. 이처럼 아비튀스는 교육을 통해 상속된다.
부르디외는 교육을 문화적 자본이라고 부른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지배하지만 예전처럼 경제적 자본만으로 지배하는 게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경제적 자본의 지배보다 문화적 자본의 지배가 강화된다. 때로는 두 자본이 서로 결합해 지배하기도 한다. 경제적 자본을 가진 자본가(기업가)는 문화적 자본을 더 추구하며, 문화적 자본을 가진 자본가(교수, 판사 등)는 경제적 자본을 더 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류층의 ‘혼맥‘은 여기서 비롯된다.
경제적 자본만 아니라 문화적 자본도 상속된다. 물론 아비튀스는 무의식에 속하므로 의식적으로 한두 세대에 속성 배양할 수 잇는 것은 아니다. 서재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들이 가득하고 고전음악은 꼭 전집으로 사들이는 졸부들의 취향이 조잡함을 면치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중략) 졸부들도 대를 이어 열심히 노력하면 한두 세대쯤 지나 진정으로 고급한 아비튀스를 가진 후손을 둘 수도 있다. …
- 남경태의 <개념어사전>(들녘, 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