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 세계대전은 비극적이고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신중함이나 공조의 선의가 제 목소리를 냈더라면 최초의 무력 충돌에 앞선 5주간의 위기 동안 어느 때라도 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던 사건들의 사슬을 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했고, 첫 번째 충돌의 결과로 1,000만 명 이상의 목숨이 사라졌고 추가로 수백만 명의 정서적 삶이 고통을 당했으며 유럽 대륙의 호의적이고 낙관적인 문화가 파괴되었고 4년 후 마침내 대포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너무나 강력한 정치적 원한과 종족 간의 증오를 남겨 이러한 근원을 언급하지 않고는 2차 세계대전의 원인에 대한 어떤 설명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극적이었다. 인간의 생명은 다섯 배 많이 앗아갔으며 물질적조건에서는 헤아일 수 없을 만큼 많은 희생을 요구했던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전선의 투사였다가 동원에서 해제된 아돌프 히틀러는 1922년 9월 18일에 자신이 17년 후에 실현하게 될 도전을 패전국 독일에 제기했다. "200만 명의 독일인이 헛되이 쓰러졌을 리 없다. ... 아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요구한다. 복수를!" (중략) 1차 세계대전은 문명을, 유럽의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계몽된 문명을 훼손하여 영구히 악화시켰고, 이를 통해 세계문명에도 해를 입혔다. (...)
- 『1차세계대전사』(존 키건·청어람미디어·2009년·원제 : The First World War, 1998년) p.14~21.
(...) 1914년 여름의 유럽은 평화롭게 풍요를 누렸고, 그 풍요는 국제적 교류와 협력에 매우 크게 의존했기에 전면전이 불가능하다는 믿음은 가장 진부한 상식이었다. 1910년에 널리 퍼져 있던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분석한 『거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은 인기도서가 되었고 그 저자는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은 전쟁이 발발하면 불가피하게 국제신용이 붕괴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은 터지지 않거나 벌어진다 해도 신속히 종결될 것이라고 논증함으로써 거의 전 식자층을 만족시켰다. 당시 공업계와 상업계는 이 메시지에 크게 공감했다.
1873년에 오스크리아의 한 은행의 파산으로 촉발되고 원료와 공산품의 가격 하락으로 지속된 20년간의 불황이 끝난 뒤, 19세기의 마지막 몇 년에 산업생산은 확대되었다. 전기제품, 화학염료, 내연기관의 새로운 종류의 제조품들이 등장하여 구매자를 유혹했고, 저렴한 비용으로 수출할 수 있는 원료의 새로운 원천이 발견되었으며, 신용을 풍부하게 할 귀금속의 새로운 광산이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 188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인구는 35퍼센트, 독일은 43퍼센트, 영국은 26퍼센트, 러시아는 50퍼센트 이상 증가했는데, 이러한 증가 인구로 국내시장이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880년에서 1910년 사이에 2,600만 명이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는데, 이로한 이민으로 그 지역에서도 물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동시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공식적·비공식적으로 해외 제국이 엄청나게 팽창하여 수백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주요 산물의 공급자와 완제품의 소비자로서 국제시장에 이끌려 들어왔다. 운송의 2차 혁명으로―증기선의 수송량은 1893년에 처음으로 범선의 수송량을 뛰어넘었다―해외 상업활동이 크게 가속화되었고 확대되었다. 동시에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확충된 철도망―1890년에서 1913년 사이에 총 연장이 3만 1,000킬로미터에서 7만 1,000킬로미터로 늘었다―은(서유럽과 미국에서는 1870년이면 사실상 완료되었다) 곡물과 광물, 석유, 목재가풍부한 그 지역을 국제경제에 통합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 될 때, 은행가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20세기의 첫 10년에 금본위제에 입각한 자본이 연간 3억 5,000만 파운드씩 유럽에서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해외투자의 수익이 영국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의 개인 소득과 법인소득에서 중대한 몫을 차지하게 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도 작은 축에 드는 벨기에에는 1914년에 세계 6위의 강대국이었는데, 이는 이른 공업화의 결과였지만 벨기에의 은행가들과 무역상사들, 공업기업가들의 맹렬한 활동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철도, 남아프리카의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 인도의 직물공장, 아프리카와 말레이의 고무농장, 남아메리카의 가축농장, 오스트레일리아의 양 목장, 캐나다의 밀밭, 그리고 1913년이면 이미 세계 최대가 되어 전 세계 산업생산량의 3분의 1을 생산했던 거대한 미국 경제의 거의 모든 부문이 유럽의 자본을 나오자마자 삼켜버렸다. 이 자본의 대부분은 런던을 통했다. 영국의 중앙은행은 금 보유고는 적었지만―1890년에 프랑스은행의 보유고가 9,500만 파운드, 독일제국 은행의 보유고가 4,000만 파운드, 미국연방은행의 보유고가 1억 4,200만 파운드였던데 비해 겨우 2,400만 파운드였다―민간은행과 할인 상사, 보험회사와 상품회사, 주식과 농산물 교환이 전 세계적으로 연결되었기에 런던은 모든 선진국들에게 구매와 판매, 차입의 주요 매개체가 되었다. 런던의 우위는 노먼 에인절이 그토록 설득력 있게 제시한 믿음, 즉 런던이 조종한 신용 대차의 일상적인 유연한 균형이 깨지면 전 세계가 의존하고 있는 금융기구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도 파괴되리라는 믿음을 낳았다.
에인절은 1912년 1월 17일에 런던은행가협회에서 '은행업이 국제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상업상의 상호의존, 그것은 은행업의 특별한 표지로서 다른 어떤 직업이나 업종도 은행업만큼이나 상업상의 상호의존을 표지로 갖지 못한다. 한 나라의 이익과 지불능력은 다른 많은 나라의 이익과 지불능력에 묶여 있다는 사실, 상호간에 마땅히 의무를 이행하리라는 신뢰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은 도덕이란 결국 자기희생이 아니라 사리에 밝은 자기이익 위에 서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함께 묶어주는 그 모든 유대를 더 명백하고 더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더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한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사이의 관계도 개선되어 더욱 효과적인 인간의 협력, 즉 더 나은 인간사회를 만들 의식이 태동할 것이다."
(중략) 20세기 초에 국가 간의 상호 의존을 세계의 생존조건으로, 필수적인 조건이자 점차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은행가만이 아니었다(런던의 주요 은행가들 중 다수가 독일인이었다). 은행가들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정했는데, 대체로 아주 실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철도와 전신, 우편제도를 통한 통신 혁명은 여행과 통신의 새로운 기술과 관료 기구를 지원할 국제협력을 필요로 했다. 1865년에 국제전신조합(International Telegraph Union)이 설립되었고, 1875년에는 만국우편연합(International Postal Union)이 설립되엇다. 1882년에 철도 기술의 통일을 톡진하기 위한 국제협의회가 설치되었다. (중략) 세계의 기상 변화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1873년에 국제기상기구(International Meteorological Organisation)가 등장했으며, 1906년에는 국제무선전신조합(International Radiotelegraph Union)이 출현하여 새로운 발명품인 무선전신에 독립된 파장을 할당했다. 이 모든 조직은 정부기구로서 조약이나 회원국 법령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다.
그동안 상업계는 정부기구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필수적이었던 국제협회들을 자체적으로 설립했다. 1890년에 관세발표협회, 1883년에 특허·상표협회, 1895년 공업재산권·저작권·예술저작권협회, 1913년에 상업통계협회가 들어섰으며, 농산물 생산과 매매의 통계를 접수하고 발표했던 농업협회는 1905년에 출현했다. 특정 사업과 직종도 자체의 국제기구를 설립했다. 1880년에 상공회의소협의회가 설립되었고, 1895년에 보험회계사협의회, 1911년에 회계사협의회, 1906년에 국제전기기술위원회, 1897년에 해상법통일위원회, 1905년에 해상헌장을 표준화한 발트해·백해협의회가 설립되었다. 1875년에 국제도량형국이 조직되었고, 1880년대 초에 최초의 국제저작권협약이 조인되었다. 그러한 단체들이 없었다면 구매와 판매, 집하와 유통, 보험과 할인, 대부와 차입의 조직망은 런던의 금융가 스퀘어마일에서처럼 결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제적 협력은 단지 상업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지식과 자선, 종교에서도 국제적 협력이 존재했다. 진정으로 초국적인 종교운동은 로마제국의 몰락 이래로 늘 그랬듯이 로마 주교구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주교구를 설치한 가톨릭교회가 유일했다. 그러나 1914년 여름에 로마를 차지한 교황 피우스는 자진해서 바티칸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신학에서 모든 근대화 경향에 철두철미 반대했고, 신교만큼이나 가톨릭 안의 자유주의자들도 의심했다. 사교도 마찬가지로 루터파, 칼뱅파, 제세레파, 여러 색깔의 독립교회로 분열되었다. 그럼에도 몇몇 교단들은 최소한 선교활동에서는 협력하는 데 성공했다. 여러 개의 선교 교회가 연합한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는 1865년부터 활동했다. 1910년에 에딘버러에서 개푀된 세계선교사회의(Word Missionary Conference)는 그 추동력을 확대했으며, 1907년에 대학교의 기독교인들은 도쿄에서 국제기독교운동(Interational Christian Movement)을 창설했다. 그러나 이 기운은 유럽에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유럽 내 유일한 신교 연합조직은 1846년에 카톨릭에 반대하여 창설된 복음동맹(Evangelical Alliance)이었다. 그러므로 교리의 차이 탓에 기독교 간의 협력은 우연한 종교사업이 되었다.
노동조건도 박애주의의 관심사였다. 대규모 이민의 시대에 정부들은 먼 나라에서 새로운 생활을 찾는 자들의 복지를 규정할 수 없었고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아동 고용을 금지하려는 충동은 19세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국내법에 큰 영향을 미친 문제였으며 이후 국제적으로 힘을 얻었다. (중략) 전형적인 협정은 1904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이는 양국 시민에게 보험기관의 호환과 각국 노동법의 보호를 보장했다. 이 협정들은 국제적 노동운동, 특히 1864년에 런던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세운 제1인터내셔널과 1889년 파리에서 설립된 제2인터내셔널의 활동에 대한 국가의 대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로 이 운동들이 사회혁명을 설교했던 까닭에 정부들, 특히 1871년 이후 독일의 비스마르크 정부는 자위 수단으로 노동복지법을 제정했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오래된 자위 조치들도 국가 간 협정에 초함되었는데, 대개 원거리 무역선과 유럽 내 전염병 발생의 주 원천으로 간주된 근동 출신 이민자들의 검역이었다. 술과 마약의 판매도 국제적 통제를 받았다. 1912년에 12개국이 헤이그에 모여 아편회의(Opium Conference)를 열었다. 회의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개최 자체는 정부들의 집단 대응 의지가 증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정부들은 그럼으로써 해적 행위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정치범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우는 보통 제외되었지만, 범죄자들의 송환에 협력하곤 했다. 절대적 주권이라는 원리에 모두 헌신하는 상황이었으나, 자유주의 국가들에는 압제적인 정부의 통치를 지원하는 데 강하게 반대하는 정서가 존재했다. 그러나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기독교 국가들로 한정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소수민족에 대한 처우는 1827년에 그리스에서, 1860년에 레바논에서, 그리고 이후로 여러 차례 국제적 간섭을 유발했다. 1900년에 의화단*이 북경 대사관들을 포위하는 데 중국 정부가 공모하자, 일본의 수비대와 미국 해병대는 물론 영국의 수병과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 프랑스의 식민지 보병, 이탈리아의 저격병(Bersaglieri),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파견대로 구성된 전면적인 국제구조대가 파견되었다. 구조대는 완벽하게 성공했고, 유럽이 마음만 먹으면 협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물론 유럽은 생각하고 느끼는 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유럽의 교육 받은 계층들은 많은 문화를, 특히 이탈리아와 플란데린 르네상스의 미술,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 그랑도페라(grand opera), 중세와 고전 부흥기의 건축, 각국의 현대문학을 감상하고 이해하면서 공유했다. 톨스토이는 유럽의 거물이었고, 당대와 바로 이전의 여러 유럽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빅토르 위고, 발자크, 졸라, 디킨스, 만초니, 세익스피어, 괴테, 몰리에르, 단테는 유럽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적어도 이름만은 친숙했으며, 프랑스인과 독일인, 이탈리아인은 똑같이 외국어 수업시간에 그 작가들의 작품을 배웠다.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우위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호메로스와 투키디데스, 카이사르, 리비우스의 작품은 전부 한 벌의 책에 들어가 있었으며, 고전 작품의 연구는 여전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19세기에 헤겔과 니체가 사상의 혼란을 부채질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원리의 학습을 통한 철학의 조화도 엄연히 존재했다. 고전적 토대는 튼튼하게 서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적 토대보다 더 튼튼했을 것이다. 유럽의 대학교 졸업생들은 집성된 사상과 지식을 공유했으며, 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그들이 공유한 사고방식은 단일한 유럽문화라고 인지할 만한 것을 보존했다.
유럽문화는 증가일로에 있는 유럽의 문화 관광객들이 만끽했다. 보통 사람들은 거의 여행을 못했다. 선원, 가축 떼를 몰고 산악지대로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방목 목장주, 수확을 위해 이동하는 계절노동자, 요리사와 사환, 떠돌이 음악가, 행상, 전문 장인, 외국 기업가의 대리인이 1914년 이전에 유럽의 정착민이 만났던 외국인의 전부다. 돈 많은 관광객들만이 예외였다. 여행은 18세기까지만 해도 부자들의 소일거리였다. 20세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철도혁명과 그로써 힘을 얻은 호텔산업의 등장 덕에 중간계급에게도 여행은 오락이 되었다. 외국 여행객에게 필수 안내서인 카를 베데커(Karl Baedeker)의 여행 안내서는 1900년에 벌써 로마 안내서 13판, 동부 알프스 안내서 9판, 스칸디나비아 안내서 7판을 찍었다. 관광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정한 경로로 고정되었고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베네치아와 피렌체, 예루살렘, 라인 강변의 성들, ‘빛의 도시’ 파리였다. 그러나 중부유럽의 온천장 카를스바트(Karlsbad)와 마리엔바트(Marienbad),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리비에라, 알프스로 해마다 많은 사람이 이동하기도 했다. 좀 더 과감한 일부 여행객은 틀을 벗어났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즈 대학생들은 이미 지도교수와 함께 헬레니즘 세계를 여행하는 20세기의 관행에 착수했고, 베데커의 오스트리아 여행 안내서에는 보스니아도 포함되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라예보 항목은 이러했다. “무수히 많은 첨탑과 정원에 서 있는 작은 집들로 도시는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 강기슭의 거리는 주로 오스트리아 등지의 이주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반면, 터키인과 세르비아인의 집은 대부분 언덕의 비탈에 있다. ... 이른바 코나크(Konak)는 오스트리아 지휘관의 공관이다. 방문객들은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
- 『1차세계대전사』(존 키건·청어람미디어·2009년·원제 : The First World War, 1998년) p.23~30
...............................
*의화단(義和團) : 19세기 말 청나라 말기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청나라의 전복'과 '외세의 배척'을 목표로 무장 봉기를 일으킨 단체이다. 식민지 개척을 반대하고 식민 통치에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