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한 지층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무엇이 한 지층에 통일성과 다양성을 부여하는가? 질료, 고른판(또는 안고른판)이라는 순수 질료는 지층들 바깥에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한 지층 안에서 분자들은 동일하지 않더라도 밑지층에서 차용한 분자적 재료는 동일할 수 있다. 모든 지층에 걸쳐 실체는 동일하지 않더라도 실체의 요소들은 동일할 수 있다. 형식들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형식적 관계들 또는 연결들은 동일할 수 있다. 생화학에서 유기체 지층의 조성 통일성은 재료나 에너지 층위에서, 실체적 요소나 기(基, 화학 반응에서 다른 화합물로 변화할 때 마치 한 원자처럼 작용하는 원자단)의 층위에서, 연결이나 반응의 층위에서 규정된다. 하지만 이것은 동일한 분자도 동일한 실체도 동일한 형식도 아니다. 우리는 조프루아 생-틸레르에게 찬가를 바쳐야 하지 않을까?
조프루아는 이미 19세기에 성층 작용이라는 웅장한 개념을 세울 줄 알았으니, 물질은 계속해서 더 나눠질 수 있어 크기가 작아지는 입자, 공간으로 방사되면서 "자기를 전개하는" 유연한 흐름 또는 유체로 되어 있다고 조프루아는 말한다. 연소는 고른판 위에 이렇게 도망치는 과정 또는 무한히 나누어지는 과정이다. 충전은 지층들로 이루어지며, 연소의 반대 과정이다. 충전 과정을 통해 비슷한 입자들이 모여 원자나 분자가 되고 비슷한 분자들이 모여 더 큰 분자가 되며 가장 큰 분자들이 모여 그램분자적 집합체가 된다. 이는 이중 집게 또는 이중 분절로서 "유유상종의 인력"이다. 이렇듯 유기체 지층은 특수한 생체 질료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질료는 모든 지층을 통해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기체 지층은 특수한 조성의 통일성을 상정하며, 하나의 동일한 <추상적인 동물>을 갖고 있고, 하나의 동일한 추상적인 기계를 갖고 있다. 유기체 지층을 이루는 분자적 재료들은 동일하고, 기관을 해부해 보면 똑같은 요소나 성분들이 발견되며, 접속의 형식도 동일하다. 하지만 조성된 기관들 또는 실체들, 분자들과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형식들도 다르다.
조프루아가 단백질과 헥산의 기(基)보다는 해부학의 대상이 되는 요소들을 실체적 단위로 선택했다는 점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어쨌거나 이미 그는 분자들이 놀이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층의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원리다. 즉, 형식들은 일치되지 않으나 동형적이며, 조성된 실체들은 다르나 그 요소들 또는 성분들은 동일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퀴비에(Cuvier)와의 대화, 아니 차라리 격렬한 논쟁이 끼어들었다. 마지막 청중을 붙들어놓기 위해서 첼린저 교수는 죽은 자들이 인형극 식으로 인식론적인 대화를 벌이는 희한한 광경을 상상해냈다. 조프루아는 <괴물들>을 불러오고 퀴비에는 모든 <화석>들을 정연하게 배열하고 바에르(Baer)는 <태아들>이 든 플라스크를 흔들고 비알통(Vialleton)은 <네발동물>의 <띠>를 두르고 폐리에(Perrer)는 <입>과 ,<뇌>의 극적인 싸움을 흉내내고 있었는데.......
조프루아 : 유기체 지층에서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옮겨갈 때에는 항상 '접어 넣기(pliage)'를 통해 갈 수 있다는 점이 동형성의 존재를 증명해 줍니다. 아무리 다른 두 형식 사이를 이행할 때에도 마찬가지지요. 예를 들어 척추동물에서 두족류(頭足類, 낙지, 오징어 등)로 가는 경우에는 척추동물의 등뼈 끝 부분을 갖다 붙여서 머리를 발쪽으로 가져가고 골반을 목덜미쪽으로 가져가면 되는 겁니다 ......
퀴비에 : (화가 나서) 틀렸어. 그건 사실이 아냐. 당신은 코끼리에서 말미잘로 이행하지 못해. 내가 해봐서 알아. 환원될 수 없는 축, 유형 분류학상의 문(門)이 있을 뿐이지. 기관들 간의 유사성과 형태들 간의 유비(=相似性)가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냐. 당신은 사기꾼이고 형이이상학자야.
비알통(퀴비에와 바에르의 제자) : 그리고 집어 넣기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누가 그걸 견뎌낼 수 있겠어요? 조프루아가 해부학적인 요소들만을 고려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 어떤 근육도 그 어떤 인대도 그 어떤 띠도 남아나지 못할테니까요.
조프루아 : 난 동형성이 있다고 말했지 일치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요는 "발전 또는 완성의 정도"를 끼워 넣고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재료들이 이런 저런 집합물을 구성하게 해주는 정도에 도달하는 것은 지층 내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해부학적 요소들은 분자의 충돌이나 환경의 영향 또는 이웃들의 압력에 의해 이곳 저곳에서 멈추거나 역류될 수도 있기 때문에 동일한 기관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 관계나 연결이 아주 상이한 형식과 배합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층 전반에 걸쳐 실현되고 있는 것은 동일한 <추상적 동물>입니다. 다만 그 <추상적 동물>은 정도가 달라지고 양태가 바뀔 뿐이며, 매번 주변의 것들과 환경이 허용하는 하는 만큼 온전한 모습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직 진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어 넣기와 정도는 후손이나 유래를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동일한 추상이 자율적으로 실현되도록 할 뿐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조프루아는 <괴물들>을 내놓는다. 인간 괴물들은 특정한 발전 정도에서 멈춘 태아들이며, 그 안에 있는 인간은 비인간적인 형식들과 실체들을 위한 외피에 불과하다. 그렇다. 샴쌍둥이는 갑각류이다.)
바에르 : (퀴비에의 지지자이며 다윈과 동시대인인데, 조프루아의 적대자였지만 다윈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오. 당신은 발전의 정도와 형태의 유형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동일한 유형이 여러 정도를 갖기도 하고 동일한 정도가 여러 유형 속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유형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비알통 : (바에르의 제자인데, 한술 더 떠서 다윈과 조프루아 두 사람 동시에 반대한다.) 더 나아가 태아만이 행하고 견뎌낼 수 있는 것들이 있지요. 태아는 바로 그 유형 덕분에 그것들을 행하고 견뎌낼 수 있는 것이지 발전의 정도에 따라 한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북>에게 찬미를 보냅니다. 거북의 목은 몇몇 원시 척추동물의 변동을 요구했고 거북의 앞다리는 새의 앞다리와 비교할 때 180도의 변동을 요구했습ㄴ니다. 당신은 배 발생에서 계통 발생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집어 넣기는 한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이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지요. 반대로 접힘(=습곡)의 형태들의 환원 불가능성을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유형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비알통은 동일한 주장을 하기 위해 서로 결합된 두 종류의 논증을 편다. 한편으로는 어떤 동물도 제 실체의 도움을 받아서는 행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배아만이 제 형태의 도움을 받아서 행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두 개의 강력한 논증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재기 어린 임기응변식 문답 속에는 그토록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그토록 많은 구분들이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계산 규칙이 있었다. 왜냐하면 인식론은 결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매우 온순한 조프루아와 진지하고 결렬한 퀴비에는 나플레옹 주위에서 전투를 벌인다. 퀴비에는 완고한 전문가였던 반면 조프루아는 항상 전문분야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퀴비에는 조프루아를 증오했으며, 조프루아의 가벼운 공식들과 유머(그래 ,<암탉>은 이빨을 갖고 있어. <가재>는 뼈에 피부가 있어 등등)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퀴비에는 <권력>과 <땅>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을 조프루아에게 느끼게 하려고 했다. 반면 조프루아는 이미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유목민적인 인간을 예고하고 있었다. 퀴비에는 유클리드 공간에서 숙고했지만 조프루아는 위상학적으로 사유했다. 오늘날 대뇌 피질의 습곡과 그것의 역설들을 떠올려 보자. 지층들은 위상학적이다. 그리고 조프루아는 집어 넣기의 명수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래서 그는 이미 비정상적인 소통을 하는 어떤 동물 리좀의 전조를, 즉 <괴물들>을 갖고 있었다. 반면 퀴비에는 불연속적인 사건들과 화석 사본의 견지에서 반응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분들이 모든 방향으로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다윈, 진화론, 신(新)진화론을 고려조자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결정적인 현상이 생겨났다. 우리의 인형극 극장은 점점 더 뭉게뭉게 피어났다. 다시 말해 집단적 · 미분적이 되었다. 우리는 한 지층 위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불확실한 관계들을 맺고 있는 두 요인들, 즉 발전 또는 완성의 정도와 형태의 유형 등을 원용했는데, 이제 그것들은 깊은 변형을 겪고 있었다. 이중의 경향을 따라, 형태의 유형은 점점 더 개체군, 무리, 군체(群體), 집단성 또는 다양체로부터 고려되어야만 하고, 발전의 정도는 속도, 율(率), 계수, 미분적 관계의 견지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중적인 깊어짐. 이것은 다윈주의의 근본적인 성과물이며, 지층 위에서 환경과 개체의 새로운 짝짓기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함축한다.
한편 어떤 환경 가운데 원소적인 개체군 심지어는 분자적인 개체군을 상정해 보자. 이때 형태들은 이 개체군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통계학적인 결과물이다. 개체군이 더 다양한 형태를 취할수록, 다양한 개체군이 다른 본성을 가진 여러 다양체들로 더 나누어질수록, 개체군 요소들이 상이한 형식을 부여받은 합성물들이나 질료들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개체군은 환경 안에서 더 잘 분배되고 환경을 더 많이 분할한다. 태아는 더 이상 닫힌 환경 속에서 절대적 형태가 미리 갖추어져 있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열린 환경에서는 어떤 형태도 미리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개체군의 계통 발생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중략) 땅 위에서의 생명은 그 경계가 종종 유동적이고 구멍도 뚫려 있으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동물상과 식물상의 합으로 나타난다. 지리학의 영역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카오스, 아니 더 좋게 말하면 생태학적 질서의 외부적 조화, 개체군 사이의 일시적 평형뿐이다.
다른 한편, 같은 시간 같은 조건 하에서의 정도는 미리 존재하는 발전이나 완성의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이고 전반적인 평형을 가리킨다. 정도라는 개념이 유효한 것은 그것이 환경 속에서 특정한 요소들과 특정한 다양체에 이득을 줄 때, 환경 안에서 그러한 변주가 일어날 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도는 더 이상 성장하는 완성, 부분들의 분화나 복합(=복잡화)에서 추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별 압력, 촉매 작용, 번식 속도, 증가율, 진화율, 돌연변이율과 같은 미분적 관계와 계수에서 측정된다. 따라서 상대적 진보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복합보다는 양과 형식을 단순함으로써, 성분과 종합의 습득에 의해서보다는 그것들의 상실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중요한 것은 속도이며, 속도는 미분적 차이이다). 어떤 것이 만들어지고 형태를 가지려면 개체군이 있어야 하고, 진보가 일어나고 속도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버려야 한다. (중략)
첼린저는 단언했다. 나는 지금 삼천포로 빠졌지만 무엇이 여담이고 무엇이 본론인지 나도 알 수 없소. 이제 문제는 동일한 지층, 즉 유기체 지층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관해 몇 가지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우선 하나의 지층은 분자적 재료들, 실체적 요소들, 형식적 관계들이나 형식적 특질들 등 조성의 통일성을 갖고 있다. 이로써 그 지층은 하나의 지층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재료는 고른판의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가 아니라 이미 지층화되어 있으며 "밑지층들"로부터 온 것이다. 그렇지만 물론 밑지층을 단순한 기층(基層)으로 봐서는 안 된다. 특히 밑지층의 조직이 지층보다 덜 복잡하고 열등한 것도 아니니 모든 우스꽝스런 우주적 진화론을 경계헤애 한다. 밑지층에서 공급 받은 재료는 분면 지층 내의 형성들보다 단순하다. 그러나 밑지층에서 그 합성물이 속해 있던 조직의 층위는 지층 그 자체의 조직 층위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쟈료들과 실체적 요소들의 차이라면 그것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다는 것, 조직 자체도 변화한다는 것이지 덜 조직되고 더 조직된다는 차이가 아니다. 공급된 재료는 해당 지층의 요소와 합성물의 외부 환경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재료는 지층에 대해 외부적이지 않다. 모든 요소와 합성물이 지층의 내부를 이루듯이 재료는 지층의 외부를 이루고 있으며, 양자 모두는 지층에 속해 있다. 후자는 공급되고 채취된 재료로서, 그리고 전자는 재료와 더불어 형식화된 것으로서, 나아가 이 외부와 내부는 상대적이다. 이 둘은 상호 교환에 의해서만, 따라서 서로를 관계 맺어주는 지층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결정체(結晶體) 지층을 보자. 결정체가 만들어지기 직전까지도 부정형의 환경(=매질)은 씨앗(=결정핵)의 외부에 있다. 하지만 결정체는 부정형의 재료 덩어리를 내부로 끌여들여 일체화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으로 결정체 씨앗의 내부는 시스템의 외부성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 시스템 속에서 부정형의 환경이 결정화될 수 있는 것이다(다른 조작을 취하려는 특성). 그야말로 결정핵 자체가 바깥에서 온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외부와 내부는 똑같이 지층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유기체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즉 밑지층에서 공급받은 재료는 이른바 전(前)생명 상태의 수프를 이루고 있는 외부 환경이고, 촉매는 씨앗의 역할을 맡아 여러 요소들과 내부의 실체적 합성물을 형성한다. 이 요소들과 합성물들은 원시 수프 속에서 재료들을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을 스스로 복제하여 외부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도 여전히 내부와 외부는 유기체 지층의 내부에 있으면서 서로를 교환하고 있다. 그 둘 사이에 경계, 막(膜)이 있다. 이 막이 여러 교환작용들, 조직의 변형, 지층 내부에 무엇이 어떻게 분포될 것인가를 조절하며, 지층 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형식적 관계들이나 특질들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의 분자적 재료들, 내부의 실체적 요소들, 형식적 관계를 나르는 경계 또는 막 등 조성의 통일성을 이루는 이들 집합을 어떤 지층의 중심층, 중심 고리라고 부를 수 있다. 지층 안에 감싸여 있으며 지층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동일한 추상적 기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른판의 <평면태(Planomene)>와 반대되는 <통합태(l'Oecumene)>이다. (...)
-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 새물결 · 2001년 · 원제 :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80년) <3. 기원전 1만년-도덕의 지질학> p.95~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