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인은 일과 유흥을 두부 자르듯이 나누려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일반 시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드물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되기 위해 후에 다른 사람에게 가해질 온갖 악을 우선적으로 사유하는 수고를 할 경우에조차 기쁨이다. 그러한 일에 따르는 자유는 시민 사회가 오직 여가 시간에만 할애하고는 곧장 거두어 가버리는 바로 그 자유이다. 반대로 자유를 아는 자에게는 이 사회에서 용인되는 모든 유흥이 참을 수 없는 것이 되며 자신의 일―이 일에는 시민들이 '문화'라는 이름 아래 일이 끝난 후의 여가 활동으로 격하시킨 것들도 포함되는데―에서 벗어난 어떤 대체 기쁨에 대해서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아라'는 억압적인 자기 단련을 위한 기본 규칙의 하나다.
자식들이 좋은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명예에 관한 문제로 생각하는 부모들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자신들이 생각할 때 지나치게 정신을 긴장시키는 것을 결코 달가워할 수 없다. 그러나 학급 천재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통해 말을 한다. '절제는 이성에게 어울리는 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낡아빠진 가르침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분업, 즉 사람들을 서로 독립적인 기능에 배치함으로써 서로의 일이 겹쳐져 상대방에게 신경이 뺏기지 않도록 하려는 제도를 확고하게 정당화하려는 노력이다. 그렇지만 니체가 사무실에 앉아 앞방에는 비서가 전화를 챙겨 주고, 5시까지 책상을 지키고는 낮의 업무를 완수한 다음 골프를 치러 간다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의 압박 아래서는 일과 즐거움이 교묘하게 교차될 때에만 진정한 경험이 열릴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점점 갈수록 용인되지 않는다. 소위 정신적인 직업들마저 비즈니스에 접근하면서 즐거움을 완전히 박탈당했다. 원자화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속에서도 진행되어 그의 생활 영역을 갈기갈기 쪼개 놓는다. 일에는 어떤 충족감도 달라붙어서는 안된다. 부분적인 기능에만 머물러야 하는 절제를 잃어버릴지 모르니까. 자유 시간에는 어떤 번득이는 영감이 떠올라서도 안된다. 이것은 노동의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지 모르니까.
구조적으로 일과 유흥이 점점 비슷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구획선을 그어 둘을 점점 더 엄격히 분리시킨다. 비슷한 정도로 양자로부터 기쁨과 '정신'은 추방된다. (...)
- <미니마 모랄리아>(테오도르 아도르노 · 길 · 2005년 · 원제 :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a"digten Leben, 1951년) p.176~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