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서울N타워 / photo by 이우
… ‘소유’와 ‘존재’의 선택은 상식에 호소되지 않는다. ‘소유한다’는 것은 언뜻 보아 우리 생활의 정상적 기능으로 보인다. 즉, 살기 위해서 우리는 물건을 소유(所有)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우리는 물건을 소유해야만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최고의 목표가 소유하는 것인―더욱 많이 소유하는 것인―문화 속에서 어떤 사람을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소유’나 ‘존재’ 간의 선택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존재의 정수(精髓)가 소유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중략)… 마르크스는 우리의 목표는 ‘풍성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 우리의 교육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식을 소유물로서 '갖도록' 훈련하는 데 애쓰고 있으며, 그 지식은 그들이 후일 갖게 될 재산, 혹은 사회적 위신의 양과 대체로 비례한다. 그들이 받는 것은 최소한 그들이 일을 하는 데 불편이 없을 만큼의 양이다. 여기에 덤으로 그들 각자에게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사치스러운 지식을 모은 꾸러미'가 주어지는데, 각자의 꾸러미의 크기는 그 인물이 아마도 얻게 될 사회적 위신과 일치한다. 학교는 이 전면적인 지식의 꾸러미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 에리히 프롬, <소유나 삶이냐> 중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년에 저술한 <소유냐, 삶이냐>는 현대사회 인간존재의 문제에 대한 그의 사상을 총결산한 책이다. 범인의 일상적 경험에서부터 불타, 그리스도, 에크하르트, 마르크스 등의 사상까지 더듬으면서 그는 인간의 생존양식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 재산?지식?사회적 지위?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양식>과 자기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하는 <존재양식>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 양식의 삶에 대한 좀더 치밀한 관찰과 연구를 통해 구조적인 문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소유 양식>은 현대 산업 사회, 특히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주도적인 존재 양식이다. 프롬은 이러한 삶의 태도에 있어 현대 사회의 모든 해악이 기인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악은 급기야 핵 전쟁, 생태적 위기 등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인류는 점멸의 위기에까지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다. <소유 양식>은 주체와 객체를 사물로 환원시켜 버리기 때문에 그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죽은 관계’로 귀착되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끝 없는 생산과 끝 없는 소비의 악순환을 초래하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이 프롬의 관찰이다.
특히, 그는 현대의 물질 문명, 소비 지상주의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현대인은 소비하고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소외된 삶의 형태가 나타난다. 게다가 현대의 모든 체제―사회주의건 공산주의건―는 관료조직을 닮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에게 끝없는 복종과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정치적 선전과 대기업들의 광고에 이끌려 가는 현대인의 삶, 소비와 소유에 눈 먼 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존재의 위기에 다다른 현대인, 그러면서 자신은 그 사실조차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은폐하려 하는 현대인들 앞에서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구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프롬은 인류가 생존을 계속하며 평화와 안녕을 되찾는 길은 우리가 우리 삶의 자세를 <소유 지향>에서<‘존재 지향>, 즉 <존재 양식>으로 전환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존재 양식’은 어떤 사물이나 추상적인 개념까지도 소유의 대상으로 치환하여 집착하는 것을 버리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관계를 살아 있는 관계로 파악하려는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