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장르로서의 단편소설을 규정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단편소설이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 주위에서 조직될 때이다. 콩트*는 단편소설의 반대이다. 왜냐하면 콩트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 완전히 다른 물음으로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항상 뭔가 일어날 것이고 발생할 것이다. 장편소설의 경우에도 항상 뭔가가 일아나지만,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과 콩트의 요소들을 영구히 살아있는 현재(지속)의 변주 속으로 통합시킨다.
이 점에서 탐정소설은 특히 잡종 장르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탐정소설에서는 살인이나 절도에 해당하는 어떤 것 X가 일어났지만 일어난 것은 앞으로 발견될 것이고, 그것도 주인공인 탐정에에 의해 규정되는 현재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 상이한 양상을 시간의 세 차원에서 환원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뭔가가 일어났다는 말이나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각각 아주 직접적인 과거와 아주 근접한 미래를 가리킬 수 있다. 이것들은 각각 후설이 말하는 현재 그 자체의 다시당김(retention) 및 미리당김(protention)과 하나일 따름이다.**
하지만 현재를 활성화하고 현재와 동시간적인 상이한 운동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 사이의 구분은 정당하다. 그 운동들 중에서 한 운동은 현재와 함께 움직이지만, 다른 운동은 그것이 현존하자마자 이미 현재를 과거로 던져지며(단편소설), 또 다른 운동은 동시에 현재를 미래로 미래로 끌고 간다(콩트).
꽁트 작가와 단편소설 작가가 동일한 주제를 다루었던 예를 들어보자. 두 명의 연인이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방에서 갑자기 죽는다. 모파상의 콩트 <속임수>에서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향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것인가? 구원자인 제3자(의사)는 무엇을 발명해낼 수 있을까? 바르베 도르빌리의 단편소설 <진홍색 커튼>에서 모든 것은 "뭔가가 일어났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물음을 향해 있다. 냉정한 젊은 여자가 실로 무엇때문에 죽게되었는지, 왜 그녀가 어린 장교에게 보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자인 제3자(연대장)가 결국 일을 수습할 수 있었는지 결코 알 수 없으니까. (...)
이것들은 단편소설과 콩트를 앞에 두고 독자가 겪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숨가쁨들이며, 살아 있는 현재가 매순간 나누어지는 두 가지 방식이다. 단편소설에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며 어떤 일이 이미 일어났기를 기대한다. 콩트 작가와 단편소설 작가의 '현재(presence)'는 완전히 다르다. 장편소설 작가의 현재도 다르다. 따라서 시간의 차원들을 너무 내세우지 말자. 단편소설은 과거의 기억이나 반성 행위와는 별 관계가 없다. 반대로 그것은 근본적인 망각 위에서 작동한다. 단편소설은 "일어난 것"의 요소 안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인식할 수 없는 것 또는 지각할 수 없는 것과 관계시키기 때문이다. 그 역이 아니다. 단편소설은 우리에게 앎을 줄 가능성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과거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바로 이 아무 일도 아닌 것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만든다. "내가 내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고 이 편지를 보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단편소설은 근본적으로 비밀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 콩트는 발견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단편소설은 주름들이나 감쌈들로 존재하는 몸과 정신의 자세들을 등장시키는 반면, 콩트는 가장 뜻밖의 펼침들과 전개들인 태도를, 입장들을 작동시킨다. 바르베는 몸의 자세, 다시 말해 어떤 일이 일어나서 몸이 놀랄 때의 상태들을 선호한다. <악마의 자식들> 서문에서 바르베는 이렇게 제안하기까지 한다. 몸의 자세들에는 일종의 악마성이 있으며 이 자세들의 성(性), 포르노그라피, 분뇨담(糞尿談)이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몸의 태도들이나 입장들도 나타내는 성, 포르노그라피, 분뇨담과는 아주 다르다고 말이다. 자세는 역전된 서스펜스와 같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편소설을 과거와 연관짓고 콩트를 미래와 연관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편소설은 현재 자체 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의 형식적 차원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그 일어난 어떤 일이 아무 것도 아니거나 인식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기로 한 것처럼 말이다. 단편소설은 다음과 같은 연쇄를 갖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양상 또는 표현), 비밀>(형식), <몸의 자세>(내용) (...)
단편소설은 현존하자마자 현재를 과거로 던지며, 콩트는 현존하자마자 현재를 미래로 끌고 간다. 단편소설은 비밀(발견될 비밀의 질료나 대상이 아니라 끝까지 파악되지 않은 채 있는 비밀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 콩트는 발견(발견될 수 있는 것과는 무관한 발견의 형식)과 관련되어 있다. 단편소설은 주름이나 감쌈들로 존재하는 몸과 정신의 자세들을 등장시키는 반면, 콩트는 가장 뜻밖의 펼침들과 전개인 태도와 입장들을 작동시킨다. (...)
-<천 개의 고원>(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새물결 · 2001년 · 원제 :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1980년) p.367~370
.........................................
* 콩트(conte) : 인생에 대한 유머, 기지, 풍자, 교훈이 들어 있는 가벼운 내용의 아주 짧은 이야기
** 후설의 개념인 다시당김(retention) 및 미리당김(protention)은 보통 '과거 지향'과 '미래 지향'이라고번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