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 5D / Tokina 80-200mm / 2009공예트렌드페어 / Photo by 이우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신체는 영혼이나 정신에 비해 아주 낮게 평가되었습니다. 신체는 기껏해야 정신의 하수인에 불과했고, 심한 경우에는 정신의 이성적 작용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근대철학에서 욕망이란 것은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심지어 저주 받은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욕망은 식욕과 같이 생명체의 이기적인 것과 관련되거나 혹은 성욕과 같이 윤리적으로 위험한 욕구로 간주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 서양 정신으로 지배해온 그리스철학 전통과 기독교에서도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사유되었습니다.
욕망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견해는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적인 틀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서양 근대철학에서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적인 이유가 인간만이 가진 이성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서양 근대 철학에서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순수한 이성만을 가진 존재(신), 이성과 동물성이 섞여 있는 존재(인간), 그리고 순수하게 동물성을 가진 존재(동물)로 구분했습니다.
서구 사유의 전통에서 인간이란 이성과 육체(동물성, 욕망)로 분열된 '분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성과 같은 정신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구 사유의 전통은 이성으로 동물성(욕망)을 통제해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었고, 순수한 이성과 정신을 최고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인간의 정신(이성)은 몸(욕망)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을까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선언했을 때, 스피노자는 스피노자는 신체의 능력을 무시하고 정서에 대한 정신과 의지의 절대적 지배를 강조한 데카르트의 주장에 반기를 듭니다. 스피노자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영혼이나 정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굳게 확신한다.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의해서만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며, 오직 정신의 의지나 사고력에 의존하여 여러 가지를 행한다. 왜냐하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신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경험적으로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신체의 이러저러한 활동이 신체의 지배자인 정신에서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스피노자의 <에티카(erhica)> 중에서
스피노자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affection)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에 대한 관념으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정서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고 무언가에 대해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하는 모든 일들은 일차적으로 신체의 활동 능력과 관계합니다. 신체의 능력에 저해되는 것에 대한 관념은 자신의 정신의 능력, 즉 사유 능력에도 저해되기 때문에, 우리의 정서가 정신으로 하여금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대철학에서는 전체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정신보다는 몸을,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근대 이성은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결과만을 가져 왔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 근대철학이 만든 질서를 해제하려고 합니다. 흔히 이러한 일련의 경향을 두고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혹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유의 경향은 기존의 억압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를 극복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데카르트'나 '칸트'보다 '스피노자'나 '니체', '데리다'와 '들뢰즈' 철학에 열광하게 되었고, 육체와 욕망을 금기시해왔던 서양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육체와 욕망을 긍정적으로 응시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