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싱(piercing)은 ‘꿰뚫는다’는 의미로 정확하게는 피어스(pierce)라고 해야 맞다. 귀나 신체부위를 뚫어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귀고리를 지칭한다. 최근 피어스가 유행하면서 귀고리를 단 남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피어스를 한 자신조차 그것이 서양에서 유래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피어스는 우리의 오랜 역사이기도 하다.
고대 사회에서 피어스는 천재지변과 각종 재난을 막기 위한 주술로, 또 부족과의 전투에서 용맹성을 드러내 보이는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귀고리는 심각한 고통을 초래하지 않는 간단한 신체변형으로 멋을 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널리 선호되었다. 신라 고분에서는 귀에 거는 ‘태환(굵은 고리)’, 귀를 뚫어 끼우는 ‘세환(가는 고리)’ 등 다양한 귀고리가 많이 출토된다. 삼국시대의 귀고리는 권력과 권위를 대변하는 장신구였다. 신라 고분에서 발굴된 여러 점의 귀고리는 모양이 매우 다양하며 세련된 장식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귀고리는 사대부 자제들의 멋이었다. 귀를 뚫고 귀에 하는 장신구나 귀고리를 <고려사>에서는 이식(耳飾)·이환(耳環)이라고 하였는데 글자 그대로 귀에다 구멍을 뚫고 다는 고리를 말하며, 단지 귀에 거는 귀걸이와는 다른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귀를 뚫고 귀고리 하는 풍조가 일반적이었다. 귀고리를 착용한 사람도 주로 남자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종은 “금·은은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므로, 금후 진상용·궁내용 술잔 및 사신접대용 그릇, 관대·명부(命婦)의 뒤꽂이·사대부 자손들의 귀고리 등을 제외하고는 일절 사용을 금한다”는 조치를 내리고 있다. 사용 연령층도 무척 어려서, 실록에 따르면 중종 26 년(1531) 1월 항목에 숭례문(崇禮門) 안에 열 살 남짓한 아이의 머리가 귀고리를 단 채 자루에 넣어진 것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 8년(1513)에 판의금부사(오늘날의 검찰청장)인 이손이 양평군을 사칭하고 다니는 만손을 탄핵했다. 이때 그는 본래 양평군 이름은 강수 아기[康壽阿只]이고, 중종반정 당시 그의 나이 9세였으며 큰 진주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는 기억을 왕에게 말했다. 의금부 당상 김응기도 양평군의 용모는 ‘얼굴이 희고 귀고리 꿴 구멍이 넓고 크다’고 하면서 만손은 얼굴이 검고, 귀고리 구멍도 없기에 가짜라고 증언하고 있다. 양평군이 했다는 큰 귀고리 구멍이 당시에 가짜 양평군을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선조는 비망기를 통하여 ‘신체발부는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초이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조소를 당하니 부끄러운 일이다’고 하고 귀고리 착용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국가가 금령을 내릴 정도로 남성들의 귀고리 풍조가 일반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임진왜란 때 당시 명나라 사신 접반사 이덕형이 경리 양호와 나눈 이야기 속에서 “근자에 조선군대가 군공을 다투는 과정에서 함부로 조선 사람을 죽여 거짓으로 왜적인양 꾸미는 일이 있다”는 추궁을 받았다. 이에 이덕형이 “가짜 왜적이라면 좌우의 귀를 살펴보아 귀고리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으면 알 수 있다”고 답하였는데, 이덕형도 왜적과 조선인을 구분하는 유력한 단서로 귀고리 구멍을 들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 조선인들 특히 남성들의 귀고리는 일반적이었다.
피어스가 단지 서양에서 넘어온 유행으로만 생각한다면 오해다. 고대의 피어스는 바람처럼 초원을 달리며 사냥하던 원시의 자유였으며 중세의 피어스는 권력과 지위였으며, 조선시대 피어스는 각박한 성리학적인 굴레 속에서도 나름대로 멋을 내며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