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non EOS 5D / Tokina 75-300mm / 양평 걸리버파크 / Photo by 이우
… 토머스 쿤은 포퍼의 색각과는 달리 과학이 결코 누적적으로 진보하는 것1)이 아니라, 혁명적인 단절을 겪는다고 주장하였다. 쿤은 이런 혁명적인 단절과 변화를 ‘패러다임(paradigm)'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중략) 패러다임이란 말은 ’패턴‘, '모델’, ‘예’를 의미하는 희랍어 ‘파라데이그마(paradeigma)’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쿤은 패러다임을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 풀이의 표본‘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실험실에서 10g의 마그네슘과 10g의 산소로 연소시키는 실험을 했다고 하자. 그러자 놀랍게도 연소결과물인 산화마그네슘의 질량이 25g으로 측정되었다. 실험을 하던 학생이 ‘질량 보존의 법칙’의 반례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선생님은 어떻게 대응할까? 아마 선생님은 학생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부주의로 5g의 산소가 더 공급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실험을 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 경우 선생님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던, 혹은 기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방금 우리는 어느 실험실에서 포퍼가 그렇게도 강조했던 반증 가능성, 추측, 논박, 비판적 이성 등의 개념들이 손쉽게 무력해지는 장면 하나를 목격한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고등학교나 대학에서의 과학 실험은 새로운 이론의 발견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습득하기 위한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정해진 패러다임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학적 활동을 쿤은 ‘정상과학’이라고 부른다.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의 붕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 때문에 발생한다. 쿤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중세시대까지의 물리학, 갈릴레이로부터 시작되는 근대 물리학, 아인슈타인 이후의 현대물리학은 각각 상이한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는 상이한 정상과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정상과학들 사이에서 패러다임의 단절, 혹은 과학혁명이 발생했던 것이다.
쿤은 각 시대를 장악하는 패러다임들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동시에 ‘통약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 두 가지 패러다임이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통약 불가능하다는 것은 두 가지 패러다임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 사이에는 질적인 단절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과학혁명이란 말 자체가 과학의 발전이 누전적인 과정이 아니라 단절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 (중략)
사실 우리가 특정 에피스메테2)나 패러다임이란 규칙에 의해 지배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기 힘들다. 오직 새로운 에피스메테나 패러다임으로 개종했을 때에만, 우리는 과거에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랐던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지 의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규칙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푸코나 쿤이 우리에게 던져 준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미래로 갈 수 없는 우리가 현재를 알기 위해서 뒤돌아볼 있는 유일한 곳은 과거뿐인 것이다. 과거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영위했던 다른 패러다임, 혹은 다른 에피스테메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때,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패러다임이나 에피스테메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외국에 나가 보았을 때 자신이 지금까지 따르고 있던 무의식적인 삶의 규칙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
-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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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포퍼(1902~1994)는 과학이나 사회의 발전에는 ‘인간의 비판적 이성이 핵심적인 역학을 담당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자신이 이론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경험을 통하여 비판하고 수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가 형성되었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이성의 합리적인 추론만을 맹신하지 않고 논라적인 추론을 항상 경험에 비추어 점검하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증가능성‘이라는 개념이다. 반증 가능성은 어느 이론이 과학적이려면 경험으로부터 반박되거나 수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2) 인식론적 지층. 푸코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에서 ‘한 문화의 어떤 시점에 하나만 존재하는 모든 지식의 가능성 조건’이라고 하면서, 르네상스 시기(1500년~1660년), 고전주의 시기(1660년~1800년), 근대 시기(1800년~1950년), 그리고 구조주의 시기(1950년 이후)를 서로 통약 불가능한 시대로 구분했던 적이 있다. 각각의 시대는 자신만의 고유한 에피스메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20세기 역사학적 상상력이 공유하는 한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를 연속적이고 누적적이라기보다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이라고 보려는 사유 경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