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년 4월 26일 - 1776년 8월 25일)은 1711년 4월 26일 에든버러 북쪽에 위치한 천사이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흄(John Home)’은 변호사였다. 그는 1734년 성을 ‘Hume’으로 개칭했는데 이는 잉글랜드의 발음이 스코틀랜드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흄은 에든버러 대학교에 12살의 나이로 조기 입학하였다. 그는 처음에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이후 철학을 공부하였다. 후일 흄은 자서전에서 "어찌할 수 없는 혐오와 철학과 일반적 지식에 대한 추구 때문에 가족들이 보에와 비니우스를 강권하는 동안 몰래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를 탐닉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18세에 철학에 대한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경험하였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그 "지평"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설명하지 않아 갖가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사고의 지평으로 인해 그는 십대 시절을 온통 읽고 쓰는 데 소비하였으며 결국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졸업 후 흄은 가정교사와 상업 사무원 사이에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는 1734년 브리스톨에서 몇달 간 사무원 생활을 하였다. 그 후 그는 프랑스 앙주의 라플레체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데카르트가 수학한 것으로 유명한 라플레체의 예수회 관할의 프리타네 군사학교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4년여의 시간에 걸쳐 그의 첫 철학 저서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을 집필하면서 그 동안 저축한 돈을 모두 소진하게 된다. 흄은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내 문필의 향상 외에는 모든 것이 초라한 간신히 부지하는 삶이었다"고 기록했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는 26세 때 완성되었다. 오늘날 철학 학자들은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철학 사상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지만 당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비평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당대의 비평은 이 책이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흄은 낙담했으나 곧 그의 쾌활한 성품으로 실망을 딛고 철학에 대한 열정을 되살렸다. 흄은 1744년 도덕과 정치에 관한 논문으로 에든버러 대학교의 교수직에 응시하였으나 그 자리는 윌리엄 클랙혼에게 돌아갔다. 후일 당시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이 흄을 무신론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흄은 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았으나 친분 있는 젊은 성직자들의 변론으로 재판까지 받는 일은 피했다. 그러나 흄의 형이상학에 대해 애버딘의 토머스 레이드와 같은 철학자들은 여전히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흄은 글레스고 대학교의 철학 수석 교수직을 얻는 데 실패하였다. 흄은 1752년 에든버러로 귀향하였다. 1752년 에든버러 도서관장을 지냈으며, 1763년 주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서 루소와 사귀었다.
흄은 일찍이 논고 <종교와 미신에 대해>에서 모든 종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흄 당대에서 종교에 대한 언급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흄이 태어나기 15년 전, 18세의 학생이었던 토머스 아이크해드는 기독교 신앙은 비상식적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는 이유로 독신죄가 인정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흄은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책속의 등장인물을 통해 말하게 하는 등 우회적으로 표현하였으나 종교에 대한 그의 논문은 1776년 사망할 때까지 출간되지 않았다. 흄의 종교에 대한 저작인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는 흄의 사후인 1778년이 되어서야 여전히 저자의 이름이나 출판사의 이름도 표기하지 않은 채 출간되었다. 이러한 조심스런 대처에도 불구하고 흄은 생시에도 이미 자연신론자 또는 무신론자로 의심받았다. 1763년 흄은 파리에서 헤트포드 경의 비서로 일했으며 말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1776년 사망하여 에든버러에 묻혔다.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서문에서 "인간 과학은 유일하게 다른 모든 과학을 뒷받침하는 과학"으로 "체험과 관찰"이라는 경험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는 과학이라고 주창하였다. 흄의 이러한 견해가 정확히 어떠한 것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의견이 엇갈려 왔다. 논리실증주의는 흄의 이 발언을 근거로 과학은 오직 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학문으로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참이나 거짓으로 판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흄은 논리실증주의의 선구자로서 경험에 의한 것만을 바탕으로 철학을 펼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논리실증주의가 흄이 스스로를 소극적인 회의론자로 파악한 것에 반하여 확증된 원칙을 세워 회의론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평한다.
흄은 다방면에 걸쳐 연구를 남기고 있다. 흄은 <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서두에서 인간 심리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흄은 인간의 오성을 이성과 감성으로 나누고, 감성이 대상에 대한 직관적이며 강렬한 인식이라면 이성은 감성에 의해 받아들여진 대상을 반추하여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라 정의하였다. 한편, 흄의 논리학은 후일 학파에 따라 논리실증주의적인 입장과 회의론적 사실주의의 입장, 또는 그 둘의 절충으로 해석된다.
흄은 로크, 버클리의 영국 경험론을 따르면서도, 과학의 시대와 많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흄은 영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대개의 경험론자들은 ‘우리의 지식은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형성되어진다’고 말한다. 이성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 줄 수 없는 만큼, 우리는 사물의 본성을 경험을 통해서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흄은 이런 이성에 대한 경험론자들의 회의보다 그 회의의 폭이 더 넓었다. 인과성이란 언제나 함께 발생하는 두 사건의 문제로서, 그 두 사건을 연결해 주는 어떠한 고리가 있으며, 이런 '어떠한 고리'의 자리에 위치하는 것은 우리의 '심리적 경향'이다. 그리고 이 '심리적 경향'을 그는 '습관'이라 불렀다. 예를 들어서 '아침이 왔다'와 '해가 동쪽에서 떴다'라는 두 사실을 놓고 보자. 우리는 아침이 왔으니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라고 생각한다. 흄에 의하면 이러한 결과는 습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흄은 이렇게 말한다. “인과법칙은 습관의 산물이다.”
버클리는 ‘지각된 것을 관념이라고 하고 지각하는 것을 정신’으로 주장하면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며 ‘지각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각하는 정신은 지각되는 게 아니지만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흄은 이런 예외 조항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흄은 ‘사물을 보고 생긴 것은 인상’이고 ‘그 인상의 기억이나 결합이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흄에 따르면 ‘정신’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관념과 인상의 다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철학의 붕괴를 의미하고 있다. 근대철학에서 ’나‘. ’주체‘,. ’자아‘, ’정신‘이라고 부리는 것은 그저 인상과 관념의 묶음일 뿐이다. 그래서 마침내 흄은 ’정신‘이나 ’주체‘라는 근대철학의 범주를 해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