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on Eos5D | 서울 문학의 집 | 이우
... 문체(style)라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바로 연속적 변주의 기법이다. 그런데 언어학이 세운 모든 이원론 중에서 언어학과 문체론을 분리시키는 이원론만큼 근거 없는 것은 없다. 문체는 개인의 심리적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위라는 배치물이다. 한 언어 속에서 한 언어를 만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목록을 아무렇게나 만들어 보자면, 또 한번 카프카, 베게트, 게라심 루카, 장-뤽 고다르 등을 언급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2개 국어를 병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어로 글을 쓴 체코의 카프카, 영어와 불어로 글을 쓴 아일랜드인 베게트, 루마니아 출신의 루카, 스위스인이 되고자 한 고다르. 하지만 이것은 상황이요 정황일 뿐이며 그런 정황은 다른 데서도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글만 썼던 것도 아니고 글쓰기에 우선적으로 매달렸던 것도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베게트의 경우 연극과 텔레비전, 고다르의 경우 영화와 텔레비전, 루카의 경우 다양한 시청각 기계들. 우리가 언어적 요소들이 연속적으로 변주되도록 조작을 가할 때, 언어 속에 내적 화행론을 도입할 때 화행론의 두 측면이 동일한 변주선 위에서, 동일한 연속체 위에서 결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몸짓과 악기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을 취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게다가 문체는 필연적으로 외적인 원천을 갖듯이, 관념은 외부로부터 먼저 오고 언어는 뒤따라온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이 저자들 각자가 나름의 변주 기법과 나름의 확장된 단음계를 가지며 나름의 속도와 음정을 미친듯이 생산한다는 것이다.
<정열적으로>라는 시에서 게라심 루카의 창조적 말더듬기를 보라. 고다르의 또 다른 말더듬기도. 연극에서는 밥 윌슨의 정해진 음높이 없는 속삭임, 카르멜로 베네의 올라가고 내려가는 변주들을. 말을 더듬기는 쉽다. 하지만 언어 자체가 말더듬이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모든 언어적 요소들을 변주로 만드는 일이며, 심지어 표현의 변수와 내용의 변수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마저도 변주로 만드는 일이다. 여기에 잉여의 새로운 형식이 있다. 그리고…그리고…그리고…. 언어에는 언제나 "etre"와 "et" 사이의, et와 er사이의 투쟁이 있다. 이 두 단어는 발음이 같고 스펠링이 비슷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언어 속에서 상수로 작용하며 언어의 온음계를 형성한는 반면, 후자는 모든 것을 변주시키며 일반화된 반음계의 선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중략)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걸작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진다." 그것은 말더듬기와 같은 것이다. 단지 파롤만이 아니라 랑그가 말더듬이가 되는 것이다. 외국인이 되어라. 하지만 모국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네 모국어 속에서 외국인이 되어라. 그렇더라도 하나의 동일한 언어 안에서 방언이나 사투리도 쓰지 말고, 사생아와 혼혈아로 존재하라. 하지만 혈통을 순화시키면서. 문체가 언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언어가 강렬하게 되는 것은, 값과 강렬함의 순수 연속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언어 안에 비밀스런 하위-체계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숨길 것 하나 없이 모든 언어가 비밀스럽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절제와 창조적 뺄셈을 통해서만 이 결과에 이른다. 연속적 변주에는 금욕적인 선(線)들이 있을 뿐이며 약간의 풀과 맑은 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 언어학적 변수든 취해서 이 변수의 두 상태 사이에 있는 필연적으로 잠재적인 연속선 위에서 변주시킬 수 있다. 더 이상 우리는 랑그의 상수들이 일종의 변이를 겪기를 기다리거나 변화가 파롤 속에 축적된 결과를 감수해야 하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변화의 선 또는 창조의 선은 충만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추상적인 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하나의 랑그는 필연적으로 개척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추상적인 기계는 이 가능성 또는 잠재성을 포괄해야 한다고 옐름 슬로우는 지적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재태(potentiel 또는 virtuel)"는 실재(reel)에 대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잠재태는 창조적인 것의 실재성이며 변수들의 연속적 변주로서, 오직 변수들의 상수적 관계의 현재적(actruelle) 결정에만 대립된다. 우리가 변주의 선을 그릴 때마다 변수들은 음운론적 특성, 통사론적 또는 문법적 본성, 의미론적 본성 등 이런저런 본성을 갖지만 선 그 자체는 비관여적이며 비통사론적이고 비문법적이고 비의미론적이다. ...
-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p.189~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