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린스에 따르면 수렵채집자들(오스트레일리아, 칼라하리 사막 등에 살고 있는 미개 유목민 부족들)은 절대적인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풍요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미개인들은 어떠한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차차 버리면서 좋은 곳으로 이동해 간다. 생산 장치도 '노동'도 없다. 그들은 말하자면 여유가 있을 때 수렵하고 채집하며, 손에 넣은 것은 나누어 가진다. 그들의 낭비는 완전하다. 그들은 경제적 계산도 저장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단번에 소비한다. 수렵채취 생활자는 부르주아가 발명한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와는 완전히 무관하며, 경제학 기초도 전혀 모른다. 그들은 항상 인간의 에너지, 자연자원, 그리고 효과적인 절약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잠을 많이 자며, 자연자원의 풍부함을 믿는다. 이것이 미개인의 경제체제 특징이다. 반면에 우리의 체계는 인간이 쓸 수 있는 수단의 불충분함을 직면한 데서 나오는 절망에 의해, 시장경제와 보편화된 경쟁의 심각한 결과인 근원적이고 파국적인 극도의 불안에 의해, 그것도 기술의 진보와 함께 정점 강하게 특징지어진다.
미개사회의 특징인 집단전체로서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음'과 '낭비성'은 진정한 풍요의 표시다. 우리는 풍요의 기호(signes)만 가지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생산기구를 통해, 빈곤과 희소성의 기호를 쫓아낸다. 그러나 살린스도 말한 바와 같이 빈곤은 재화의 양이 적은 데 있지 않으며, 또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도 있지 않다. 빈곤은 무엇보다 인간들 간의 관계이다. 미개인들의 신뢰를 뒷받침해주고 또 그들이 기아 상태에서도 풍부하게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사회 관계의 투명성과 상호부조다. 그것은 자연, 토지, 도구 또는 노동의 생산물 등에 대한 그 어떠한 독점도 교환을 저지한다든가 희소성을 만들어낸다든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항상 권력의 원천이 되는 축적은 여기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증여와 상징적 교환의 경제에서는 적은 양의, 또 항상 유한한 재화만으로도 보편적인 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 재화들은 어느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부는 재화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구체적인 교환 속에서 생긴다. 따라서 부는 무한하게 존재하는 것이 된다. 제한된 수의 개인들 사이에서도 각 교환의 순환마다 교환된 사물에 가치가 부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의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변증법이 문명화되고 산업화된 우리 사회를 측정짓는 경쟁 및 차이화 속에서 결핍과 무한한 욕구의 변증법으로 역전되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미개사회에서의 교환은 각각의 관계가 부를 증가시키는데 비해, 현대의 차별 사회에서는 각각의 사회관계가 개인의 결핍을 증대시킨다. 왜냐하면 소유되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상대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의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풍요가 상실되었으며, 그 잃어버린 풍요는 한없는 생산성의 증대에 의해서도, 새로운 생산력의 해방에 의해서도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은 역설적인 것이 아니다. 풍요와 부의 구조적인 정의(定義)는 사회조직 속에 있기 때문에 사회조직 및 사회관계의 혁명만이 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
- <소비의 사회>(장 보드리야르 · 문예출판사 | 1992년 · 원제 : La societe de consommation, 1970년) p.9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