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튀세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호명할 때 그에 응답함로써 탄생하는 것이라면, 버틀러의 주체는 그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 부분을 남김으로써 완전한 복종도, 완전한 저항도 아닌 복종을 하는 것이다. 즉 승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주체의 몸은 잔여물로써 구성적 상실 속에 살며 몸의 틀을 잡고 규제하는 동시에 규제를 파괴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푸코의 역담론처럼 법의 호명 앞에 완전히 복종하지도 않고 남은 잔여물은 잉여로써 완전한 총체적 일원체계를 위협하는 전복력을 갖게 된다. 주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사실 이는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발화이거나 기계음일 수도 있다. 불린 것이 내 이름이라고 인식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 이름이 설정한 주체인 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름이 불리면 응답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게 되고, 이름이 수행하는 총체화된 정체성의 환원에서 오는 사실상의 폭력이 정치적으로 전략적인 것인지 아닌자, 또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것인지 등의 문제도 제기된다.
말하자면 지속적인 오인의 가능성 속에서 호명된 이름이라는 상징적 요구와 그 이름을 점유하는 데 있어 불안정성과 비예측성 사이의 통약 불능성 때문에, 주체는 호명된 이름이 지칭하는 정체성을 완전하게 달성할 수 없다. 오인이라는 상상계적 요소는 법에 의해 선취되고 구조화되는 것이지 법에 즉각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정된 상징적 정체성의 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령에 실패한 정체성은 상징계에 의해 완전하게 총체화될 수 없다.
버틀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전복적 저항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라캉의 상상계는 상징적 법의 효능을 방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재형성을 요하거나 초래하는 그 법을 후퇴시킬 수는 업다. 그런 의미에서 라캉 식의 심리적 저항은 결과적으로 법을 방해할 수는 있어도 법이나 그 법의 효과를 수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라캉의 심리적인 저항은 이전의 상징적 형태에서 법의 지속성을 가정하고 그 상태로 법의 지속성에 기여하므로 영원히 패할 수밖에 업는 운명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푸코의 역담론이 가지는 전복의 가능성을 들어 라캉적 접근의 한계를 지적한다. 따라서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호명은 법의 무의식이 반복적으로 호명하는 정체성의 침해를 통해서만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이는 재의미화의 가능성들이 새로이 주체의 형성, 재형성에 성공할 수 있어야만 복종에 대한 열정적 집착을 새롭게 수정하고 동시에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 <젠더 트러블-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주디스 버틀러 · 문학동네 · 2008년 · 원제 : Gender Trouble, 1990년) p.27~28 <옮긴이 조현준의 해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