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패란 본능의 내부가 무정부 상태로 위협 받으며, '생명'이라 불리는 정동(情動)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 침해, 폭력, 착취를 서로 억제하고 자신의 의지를 다른사람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것 : 이것은 만일 그 조건이 주어진다면--말하자면 각 개인의 역량과 가치 척도가 실제로 유사하고, 그들이 같은 조직체에 소속되어 있다면--어떤 개략적인 의미에서 각 개인 간의 선량한 풍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폭넓게 받아들여 혹시 사회의 근본원리까지 만들려고 하자마자, 바로 이것은 삶을 부정하는 의지로, 해체와 타락의 원리로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그 근거를 생각해서 감상적인 허약함을 배격해야만 한다.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좀 더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침해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냉혹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 해도 적어도 착취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옛날부터 비방의 의도가 새겨져 있는 바로 그와 같은 말을 언제나 사용해야 하는가?
앞에서 가정한 것처럼, 각 내부에서 각 개인이 서로 동등하게 행동하고 있는 저 조직체 또한--이것은 모든 건강한 귀족 체제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조직체이며 죽어가는 조직체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각 개인이 그 안에서 서로 억제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조직체에 대해 스스로 행해야만 한다. 그 조직체는 살아 있는 '힘에의 의지'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성장하고 뻗어나가려 하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우위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도덕성이나 비도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이야말로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인의 일반적인 의식은 다른 어떤 점에서보다 이 점에서 그 가르침을 더욱 싫어한다. 사람들은 오늘날 곳곳에서 심지어는 과학의 가면까지 쓰고 '착취적 성격'이 없어져야만 하는 장래의 사회 상태에 열광하고 있다. 이것은 내 귀에는 마치 사람들이 유기적 기능을 멈추게 하는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처럼 들린다.
'착취'란 부패된 사회나 불완전한 사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기체의 근본 기능으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한다. 이것은 생명 의지이기도 한 본래의 '힘에의 의지' 결과이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혁신이라 할지라도 현실로는 모든 역사의 근원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할 정도로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것이다! ....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ose)> 25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