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 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는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이성, 역사의 발전, 신의 권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다. 전쟁의 체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고발 및 증언 앞에서 허망과 절망을 철학적, 문학적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생겨났다. 이렇게 우발적이고 허망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모든 것을 걸고, 이성으로 절망을 인식해야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과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 사이에 있는 모순이 부조리인데, 이것을 논리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즉 반항하며 허무감을 이겨내고 휴머니즘을 재건하게 된다.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여 주창된 이 사상은 후에는 야스퍼스, 가브리엘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실존’이란 말은 이들의 사고양태(思考樣態)나 표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실존은 ‘인간’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자아’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하여,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자아’와 세계를 연결지으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여기 있는 이 ‘물병’은 ‘존재(存在, being)’한다. 이 물병은 이 모양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어떤 제작자에 의하여 디자인되었을 것이다. 물을 담을 의도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물병은 특정 용도를 위해 제작되었고, 특정 모형 틀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존재를 가지기 이전에는 하나의 ‘본질(本質, 물을 담으려는 용도와 기능, essence)’로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그저 단순히 우선 ‘존재’할 뿐이다. 나의 인격은 전에 미리 계획된 모델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정해진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나는 늘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나의 ‘실존(實存, existence)’은 늘 열려 있고 나의 본질(용도와 기능)은 고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의 경우 다른 사물과는 달리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그리고 이것이 사물과 차별되는 인간만의 존재 양식, 즉 ‘실존’이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實存)’한다. (…) ‘본질’은 고정불변이지만 ‘실존’은 고정되지 않고 하나의 가능성 상태로 늘 열려 있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의 ‘본질’을 논할 수 없다. 내가 죽으면 그때서야 나의 ‘본질’이 무엇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실존’하는 것이다."
-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