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일을 한다. 지금껏 일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노동을 정의하거나 조직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 과거의 자급자족 경제에서는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노동을 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제체제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을 한다. 자급자족 경제체제에서 노동의 결과물은 나 자신과 내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사냥터에서 잡이온 것, 내가 들판에서 잡아온 것을 나와 내 가족이 먹었다. 내가 생산한 것을 내가 소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분업에 기초한 외부공급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상황이 완전 달라졌다. 나는 나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노동을 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 자신을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노동을 한다.
여기에서 '나'는 어느 대기업의 인사담당 부서에서 일하는 회사원일 수도 있고, 기업들의 광고를 만들어주는 광고대행업체의 책임자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앞날을 이끌어 갈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일 수도 있고, 차에 물건을 한가득 싣고 날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화물차 운전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라도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생산화 재화를 직접 소비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분업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구조적인 박애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더 이상 도덕적이거나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촉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도록 사회가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보다 더 사회적으로 될 수 있겠는가!
물론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회사에서 일하고 받는 임금이나 지난 날 사냥을 해서 집으로 잡아온 사슴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임금노동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냥 가서 수풀을 헤치고 사슴을 잡는 것하고 노동시장으로 가서 일을 하고 임금을 받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일한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과거와 다른 결정적 차이이다. 이제 다른 사람들은 내 적대자들이 아니라 협력자들이다. 적대자들은 서로 싸우지만 협력자들은 서로 돕는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자급자족하던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는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일한 노동의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만약 내가 최선의 재화를 소비하고 싶다면, 나를 위해 그것을 만드는 다른 누군가가 최선의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
- 『기본소득, 자유와 정의가 만나다-스위스 기본소득운동의 논리와 실천』 (다니엘 헤니 · 필립 코브체 · 오롯 · 2016년 · 원제 : Was fehlt, wenn alles da ist?) p.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