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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35]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by 이우 posted Aug 04, 2014 Views 1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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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jpg   마르틴 하이데거(독일어: Martin Heidegger, 1889년 9월 26일 ~ 1976년 5월 26일)는 메스키르히에서 출생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하이데거 자신은 그러한 칭호를 거부하였다.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를 지냈다. 독일의 히틀러 집권시기에는 나치 독일를 공공연히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 한나 아렌트 등과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being, 존재자)와 현존재(existence, 존재)로 나누고, 삶을“시공간 속에 던져진 피투성으로서의 자신이 존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적 실존으로 전화해 감으로써 존재 매개의 지위를 획득해 가는 현존재의 실존성의 구조적 운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을 따라 나찌당원이 된다.

  "독일 국민은 독일의 미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미래는 총통과 함께 합니다. 국가의 완전한 존재에 도달하는 의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총통은 그 의지를 국민 전체게 고양시킵니다. 우리는 우리 지도자의 원대한 의지를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다는 것은 독일 민족이 자신의 유기적 통일성과 순수한 존엄성 그리고 진정한 힘을 다시 찾을 의지와 독일의 영속성과 위대함을 확보할 의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탁월한 의지의 소유자, 우리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승리 만세' 삼창을!"(하이데거의 연설 중에서)

  그러나 나치 독일 패전후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그의 정부였던 유태인 한나 아렌트의 증언등으로 처벌을 피했고 이후 5년 동안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다. 

  초기시절에는 리케르트의 가치 철학에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그의 철학은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 철학과 1930년~35년 사이의 소위 전회 이후의 후기 철학으로 나뉜다. 그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은 후설의 현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딜타이의 생의 철학 등의 영향하에 독자적인 철학을 개척하여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탐구하는 실존론적 철학을 수립하였다.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은 방법론적으로는 해석학적 현상학이며 그 대상으로 보자면 ‘현존재’, 즉 ‘인간실존’에 대한 존재론이다. 한편 현존재로부터 존재 자체로 핵심적 주제가 옮겨간 후기 철학은 역사적으로 존재 자체가 인간 현존재에게 어떻게 스스로를 현시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이래의 역사는 존재망각으로 점철되었으며 특히 오늘날과 같은 기술시대는 존재망각이 극단에 이른 시기라고 한다. 후기의 주요 저작으로는 철학에의 기여, 기술에 대한 논구 등이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이 플라톤 이후로 "어떠하다(성질)"라는 뜻을 "존재"라는 개념을 써서 접근하려고 했지,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에 대한 모든 연구가 특정한 성질에만 국한되어있고, 존재 자체를 어떤 성질이 있는 형질로 취급했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이미 상정하는 전제"를 분석하는 것이 어떤 대상을 탐구하는 데 우선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철학자와 과학자가 더 기본적이고 이론에 앞서는 존재를 무시했기때문에 그들의 이론을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잘못 되었으며, 우리가 존재와 인간 존재를 그릇되게 인정하였다. 이러한 뿌리깊은 몰이해를 피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철학의 역사를 하나 하나 되짚어 보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 속에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현존재라 하고, 현존재가 존재하는 그 자체를 실존이라고 하였다. 현존재가 어떻게 실존하는가는 미리 예정된 인간의 보편적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때그때 현존재가 실존하는 바로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즉 <현존재의 본질은 그 실존에 있는> 것으로 된다. 현존재를 이러한 각도에서 분석하는 것이 실존론적 분석이고 그 분석을 통하여 실존의 비본래성과 본래성이 구별된다. 비본래적인 실존이란 본래의 자기를 잃고 <사람(das Man)> 속에 몰입하여 세계 내부에 나타나는 눈앞의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이것은 시간에 입각하여 말하면,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를 예기하면서 그때그때 현재에 분산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과거로부터의 자기를 되찾아 장래를 향하여 앞서가면서, 순간을 두고 결의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본래적인 실존이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을 원형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의 하이데거는, 인간이 존재 그 자체의 밝음 쪽으로 나가는 것이 실존이며 <존재와 시간>에서의 본래적 실존에 나타나는 비극적·영웅적 색채는 사라졌으므로, 종래의 실존 대신 개존(開存;Ek―sistenz)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실존철학은 문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변증법신학은 키에르케고르·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실존분석법은 정신병리학에 이용된다.

□ 철학사상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전통적 형이상학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제까지 인간 실존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에  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물음과  대답만을 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인간세계 밖에  존재하는 선하고 참다운 것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극단적인 주관-객관의  이원론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주관-객관의 이원론은 근대 이후의 (세계없는 주관으로서 존재로 구성된)관념론과 (주관없는 세계로서의 존재자로 구성된)유물론의 스콜라적인 사변에 빠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세계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실존'을 무시한 채 추상적인 해답만을 찾으려 하면서 구체적인 '존재에 관한 물음'을 망각하도록 이끌었다. 

  하이데거에 있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존재론적 차이'를 구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존재자와 존재의 구별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전의 철학이  존재자에 대한 탐구에 종속되었다면 이제는 존재의 의미를 부활하여 존재자의 궁극적인 근원을  탐구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따라서 존재에 대한 규명작업일 수 있다. 실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인간 현존재에 대한 탐구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존재'라고 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인간이란 의미를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란 의미는 과거의 형이상학적 물음에서 기인하는 용어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이데거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의 가장 큰 특징은 탈존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초기의 생각으로 그것은 인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첫번째는 현존재는 존재자로서 사물들의 객관적 조건을 벗어나서 우리자신에 대해 물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의식에 대한  비판적이고 반성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인간 자신을 선행하여, 지금의 나에게 자아를 부여하는 본질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적인 cogito의 부정이다. 탈존으로서의 현존재는 이제 사물들의 객관적 존재를  아무런 선입견이나 장애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객관적 사물은 현존재의 영역안으로 들어와 그의 존재로서의 영역에서 참다운 모습을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탈존의 개념은 실상 주관적 관념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존재자들이 현존재에 의해 재해석된다는 입장에서  말해질 수 있다. 물론 현존재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탈하여 세계를 향한다고는 할지라도 결코  그것이 '모든 존재자가 너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것과 큰 차별성을 가지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또 다른 개념이 필요로 하는 데 그것은 '피투사성'의 개념이다. 피투사성은 현존재가 그를 구성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자 세계로 던져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모든 사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그를 구성하는  세계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는 현존재의 탈존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어지는 것이며, 진정한 존재자의 모습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하이데거에게서 다른 의미로 전개되어진다. 하이데거의 인간은 자기를 규정할  수 있는 선험적 자아에 대한 관념이 없다.(탈존으로서의 인간) 그는 세계에 던져지었지만(피투사성) 인간이 가진 본질인, 벗어나 있음(탈존)에 의해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존재자에 대한 물음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진리

  하이데거에게 진리란 존재의 숨어 있지 않음이다. 존재가 숨어있지 않고 자기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열려진 터가 필요한데 하이데거는 그것을 밝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밝음은 모든 존재자들보다 더욱 더 근원적인 것이며,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자가 그 존재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자에로의 통로와 입구를 선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밝음의 공간은 이중적이다. 존재자는 이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나  있는 채로 머물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모습을 숨기려고만 한다. 진리가 숨어있지 않음이며 자신의 드러냄이라고 했을 때 왜 그 드러냄의 공간인  밝음은 그와는 달리 존재의 숨김을 제공하고 있는가? 단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말하고 싶음인가? 아니면 진리에 대한 회의적 사고 -진리란 결코 취득될 수 없다-에서 인가?  진리가 언제나 숨어있지 않음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는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그 존재의  드러남만을 볼 것이고 존재망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는 비진리이다. 은폐성은 비은폐의 기본 전재이다. 존재는 항상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는 인간현존재에 의해 발견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역안으로 존재의 숨어있지 않음을 채취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대지위에 피투사되었지만 그는 그 자신의 존재영역을 구축하여야 한다. 존재의 숨어있지 않음은 이제 현존재의 세계안에서 의식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비진리성에 대한 언급은 매우 모호하다. 기실 하이데거는 사물들이 존재로서의 근원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데, 진리가 비진리로서 말해진다면 개별적인 인간의 사물에 다양한 접근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존재의 거부를 밝힘의 하나의 다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한, 그리고 위장을 통한 다른 모습의 드러남을 인정하는 한 진정 숨어있지 않음 자체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 예술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예술이란 예술작품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예술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 하이데거는  이를 위해 우선 예술작품과 사물에 대한 차이에 대하여 말한다. 이제까지의 사물에 대한  해석은 전통적 형이상학에 의해 규정되어 왔으며 이러한 전통적 형이상학은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나아가지 못했을 뿐더러 예술작품의 사물적 토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우리가 작품의 작품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판단하는 선입견 속으로 작품을 강제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만이 가지는 순수한 자립의 상태를 명백히 하려고 한다. 작품과 다른 사물과의 그 차별성을 규정함으로써만이 진정한 작품의 사물적 측면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이 그 도구적 성격 -유용성과 용도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촌 아낙네의 장화자체는 그것이 어디어디에 쓰이는 물건이라는  식의 그 쓰임에 의해서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만 고흐의 그림은 그것과는 다른 것을  나타내 준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은 그 안에서 세계를 열어 세운다고 한다. 세계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세계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사물적 존재를 통칭하기 위해 만들어 낸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실제하지만은 그렇다고 우리에게 항상 알려져 있는 사물 그대로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세계는 우리가 ......만질 수 있거나 인지할 수 있는 것들보다 더 존재적이다. 하지만 세계는 우리 앞에 놓여 보여질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은 결코 아니다. 세계는 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한, 우리가 그 속에 들어서 있어야 할 언제나 비대상적인 것이다.”

  세계는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 스스로 만들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현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세계는 우리 역사의 그 어떤 본질적인 결정들이 내려져서 그것이 우리의 의해 받 아들지기도 버려지기도, 오해되기도, 또 다시 물어지기도 하는 그곳에서 세계화한다. 따라서 돌, 식물, 동물들에게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직 촌아낙네만이 세계를 갖는다. 세계는 현존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히려 그 세계는 현존재에게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간에 작품은 세계를 열어 세운다. 세계를 열어  세우는 것은 작품이 뭇 존재자들의 나타날 수 있는 열린 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작품은 '작품으로 존재하면서 저 공간들을 공간화'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작품은 대지를 불러 세운다. 대지란 무엇이냐? 그것은  세계와 역사적 인간이 서 있는 발판이다. 현존재가 들어가 디디고 있는 존재자들이 그 존재그대로 있는 곳이다.  바로 어떤 것이라고 명명하는 것들이 아니라,  어떤 '있음'만이 스스로를 즐기는  곳이다. 작품은 이러한 대지를 자신속에 불러 세운다. 그것은 작품을 만드는데 쓰이는 재료들을 소멸시키지 않고 그 본래의 그것 자체로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작품은 스스로 대지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작품은 따라서 두 가지 본질적 성격을 지니는데 그것은 세계의 열어세움과 대지의 불러세움이다. 그런데 세계와 대지는 그 성격에서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다. 하이데거는 세계에 개시성의 의미를 부여하고 대지에는 폐쇄성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세계는 대지  위에 안식하면서 대지를 자신속에 끌어들인다. 그것은 스스로 개시한는 것이기에 어떤 것도 참지 못한다.  반면에 대지는 스스로를 감추는 것이기에  세계를 자신속에 끌여들여 자신가운데  속박하려한다. 어떻게 개시성과 폐쇄성이 공존할 수 있을까? 어느 때는  개시성으로 어느 때는 폐쇄성으로 작품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여기서 하이데거는 독일의 전통적 변증법적 철학에 의존하는 것같다. 하이데거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인정한다. 그는 오히려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반목과 질시의 부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근거 자체가 되며, 각자를 고양시킬 수 있는 동력으로 사고한다. 

  “세계와 대지는 서로의 존재근거가 된다. 그것은 이제 투쟁을 통해서 발전하여 나간다.  작품은 이러한 투쟁의 공간을 마련하여 준다.”

  세계는 밝음이다. 그 곳에서 존재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대지위에서만 존재한다. 대지는 어둠이다. 존재자는 그것 자체의 모습을 이 대지 속에서 숨기고 있다. 세계는 어둠에 빛을 던지려 하지만 어둠은 그 빛마저 숨겨 버리려 한다. 최초에 빛은 어둠에서 나왔으리라. 그건 현존재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현존재는 빛을 통해 어둠을 보려한다. 그 안에 고요히 존재하는 것들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작품이다. 예술작품은 현존재가 주위에 사물에 무관심하여, 그의 일상의 삶에 무관심하여 존재의 참모습을 보려고 하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고흐의 시골 아낙네의 구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흐의 세계안에서 보여진 어둠속에 놓여 있는 구두의 참모습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진리?존재의 숨어 있지 않음?가 드러나는 장소이다. 작품 속에서 대지와 세계의 투쟁은 결국 존재자가 존재하는 방식의 두 모습이며 그 두 모습을 제공하여 주는 것이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존재자의 예술작품으로의 자기정립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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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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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 생성하는 몸체는 머물지 않는다.

    (...) 즐겁도다., 광대한 바다에서 바람이 물들을 흔들 때, 육지에서 다른 이의 큰 노역을 바라보는 것은, 누군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달콤한 쾌락이어서가 아니라, 그대 자신이 어떠한 불행을 벗어나 있는지 깨닫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보기에 즐겁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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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9
    Aug 2017
    03:05

    [철학]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 자연은 스스로 무한(無限)을 정립한다.

    (...) 자연은 사물들의 총체가 스스로 자신에게 한계를 놓을 수 없도록 한다. 그것은 물체의 빈 공간에 의해서, 그리고 빈 공간인 것은 다시금 물체에 의해 한정되도록 강제한다. 이렇게 번갈음으로 해서 전체를 무한하게 만들면서, 혹은 최소한 이들 중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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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9
    Aug 2017
    00:33

    [철학]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 그 어떤 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무(無)에서 생겨나지 않음 (...) 그러므로 정신의 이 두려움과 어둠을, 태양의 빛살과 비치는 창들이 아니라, 자연의 모습과 이치로 떨쳐버려야 한다. 그것의 첫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에서 우리를 위한 시작점을 얻어야 한다 즉 그 어떤 것도 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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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4
    Jul 2017
    00:04

    [사회] 호모 데우스 : 유발 하라리가 던진 질문에 답해보라.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시장과 민주적 선거를 지지하는 이유는, 모든 개인이 저마다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권력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전개될 세 가지 실질적 상황이 이 믿음을 무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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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
    Jul 2017
    23:04

    [사회] 죽어가는 자의 고독 : 죽음을 배제하는 현대사회의 특수성

    (...) 현대 사회의 특수성에는 첫째, 선진사회에 속한 개인들의 수명이 포함된다. 평균 기대 수명이 75세인 우리 사회에서 20대나 30대에 죽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기대 수명이 40세였던 사회라면 사정이 다를 것이다. (...) 모든 생명체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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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0
    Jul 2017
    18:33

    [사회] 죽어가는 자의 고독 : 죽음에 대한 억압의 증후, 죽음의 배제

    (...) 삶을 마치는 것, 사망증명서와 묘지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죽어간다. 즉 많은 이들이 병약해지고 노쇠한다. 물론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이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이별은 그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된다. 종종 노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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