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재미있지만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그림자 옆에 생기는 그늘, 그러니까 그림자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망량(罔兩)과 그림자(景)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내용이 있습니다. 망량(罔兩)이 그림자에게 묻습니다. ‘전에는 자네가 가더니 지금은 자네가 서 있고, 전에는 자네가 앉아 있더니 지금은 자네가 일어나 있으니, 어찌 그렇게 지조가 없나?’ 이 물음에 그림자가 대답합니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 그리고 내가 의지하는 것도 또 의지하는 것이 있어 그렇겠지.’ 그림자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의지하고 있는 그것 무엇’이 서 있거나 앉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망량문경왈(罔兩問景曰). 낭자행(?子行)터니, 금자지(今子止)하고, 낭자좌(?子坐)터니, 금자기(今子起)라, 하기무특조여(何其无特操與)아? 경왈(景曰). 오유대이연자사(吾有待而然者邪)인저? 오소대우유대이연자사(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인저? 오대사부조익사(吾待蛇??翼邪)인저? 오식소이연(惡識所以然)이라! 오식소이불연(惡識所以不然)이로다!
이 이야기가 가볍지 않은 것은 단지 그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개별자로 이 세상에 나온 ‘나’가 나와는 상관 없이 다른 무엇인가에 따라 규정되고 다른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 존재라면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왜 가치로운 존재인 것일까요?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존재론), 나아가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인식론)에 대한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실천론, 윤리)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그 무엇인가에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세계 또한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무엇인가’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실천이 있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 우리는 새로운 ‘나’,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립니다. 전자를 따를 경우, 나는 목적어(目的語, object)로 살게 될 것이고, 후자를 따른다면 주어(主語, Subject)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주어(主語, Subject)란, 술어가 나타내는 동작이나 상태의 주체가 되는 문장 성분입니다. 이를테면 ‘철수가 공을 차다’에서 ‘철수’가 주어로 ‘공을 차는’ 주체가 됩니다. 반면에 목적어(目的語, object)란 글의 서술어인 타동사의 움직임의 대상이 되는 말로 예시의 ‘공’에 해당됩니다. 목적어로 살아간다는 것은 철수에게 차이는 ‘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서구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선언을 통해 인간을 주어로 파악했지만(주체의 정립),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해 인간은 그저 환경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목적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주체의 해체, 구성되는 주체). 그러나 구조주의 시기를 거치고 닿은 현대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은 다시 한 번 주어 선언을 합니다(주체의 재정립, 구성하는 주체).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면, ‘세계는 차이(差異, difference)로 존재하며(존재론?인식론)’, 그래서 ‘나’는 ‘새로운 의미와 차이를 생성하라(실천론)’는 것입니다. 철학사에서는 이 흐름을 두고 ‘주체의 정립→주체의 해체(구성되는 주체)→주체의 재정립(구성하는 주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망량(罔兩)의 이야기를 하는 장자는 어떤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요? 노장사상에서 도(道)란 핵심어입니다. 망량(罔兩)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그 무엇’은 바로 도(道)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도(道)에 대한 생각은 장자와 장자의 스승인 노자는 서로 의견을 달리합니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 노자(老子) 42장
“도는 걸어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다.(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노자가 도(道)란 ‘나’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들 간의 절대적인 원리라고 생각했다면, 장자는 도(道)란 것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생각을 따라가면 ‘도(道)’를 따라 살아야 할 것이며, 장자의 생각을 따라가면 ‘도(道)’를 만들며 살아갈 것입니다. 노자가 이미 정해진 길을 가고자 한다면, 노자는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노자의 사유가 목적어(object)처럼 수동성을 함유하고 있다면, 장자의 사유는 주어(subject)처럼 능동적입니다. 장자의 사유가 능동적이라는 것은 ‘제물론(齊物論)’이라는 제목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齊’가 ‘가지런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제물(齊物)은 ‘물(物)을 가지런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망량(罔兩)과 그림자(景)의 이야기는 장자가 세상에 내던지는 반어법이라고 해야 맞을 겁니다. 당신은 그림자인가, 혹은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인가라는 질문이고, 또 누구, 그 무엇의 그림자, 혹은 그림자의 그림자로 살지 말라는 경구(警句)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실 ‘나’의 삶은 어떤 것에 기대거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을 놓고 본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지 않은 채 세상에 낳지만 이런 사회, 저런 사회 속에서 규정되었고, 직장으로 본다면 이런 규정, 저런 지시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차이(差異, difference)로 존재’하고 그래서 ‘새로운 의미와 차이를 생성하라’는 들뢰즈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A와 B라는 사회가 다르고, C와 D라는 직장이 서로 다르니 차이(差異, difference)로 존재하고 있고, 그 속에 있는 ‘내’가 ‘새로운 의미와 차이를 생성’하면 A가 B라는 사회로, C가 D라는 사회로 바뀔 수 있으며, 과거의 ‘나’가 현재의 ‘나’가 아니듯 지금의 ‘나’는 나중에 지금과는 다른 ‘나’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의 장을 활짝 열어 보인 겁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렵게 직장을 구한 F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고객들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직장은 모 백화점의 매장 매니저였고 짓궂은 어른들이나 아이들 때문에 근무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얼마후 F가 저를 찾아와 고맙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회사의 규정?지시가 항상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것이어서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고객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짓궂은 어른들이나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당할 때마다 ‘고객 친절’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출근해야만 하는 시간만 되면 머리가 아플 정도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고객이 주어, 자신이 목적어였던 겁니다.
F는 자신이 주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고 ‘고객’을 ‘사람’으로 생각하기로 했던 것이지요(존재론?인식론). 차이,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 것이지요.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A라는 고객은 어머니로, B라는 고객은 ‘남동생’으로, C라는 아이들 고객은 ‘조카’라고 생각하자 ‘친절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의해 친절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친절해지기 시작했답니다. 그 동안 자신에게 고객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는데 생각을 바꾸자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고객에게 스스로 다가가는 능동성이 생겼습니다. 수동적이었던 목적어에서 능동적인 주어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진급까지 했다고 합니다.
세계가 차이(差異, difference)로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가 고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새로운 의미와 차이를 생성하라’는 것은 그 세계 안에 있는 ‘나’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나 ‘세계’나 그 무엇이라고 고정되지 않은 채 존재하지만, ‘그 무엇에’, ‘그 어떤 것’에 의해 고정되거나, 혹은 변화하는 것이지요. 그 사이에서 세계와 나는 끊임 없이 관계를 맺습니다. 애당초 ‘나’는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고, 그림자나 혹은 그림자의 그림자도 아니었습니다. 애당초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존재론), 나아가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인식론)에 따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실천론)에 달라집니다. 그래서 샤르트르가 이런 말을 남겼을지 모릅니다. ‘삶은 B(birth, 출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선택(choice)’이다.
노자의 말처럼 도(道)는 이미 만들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장자의 말처럼 걸어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요((道行之而成)? 그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노자와 장자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221년) 때의 사람이라, 노자의 말이 맞는 것인지 장자의 말이 맞는 것인지, 나아가서는 이런 해석이 맞는지조차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맞다’, ‘아니다’가 아니라 어느 것이 ‘나’와 ‘우리’를, 나아가 ‘사회’와 ‘세계’를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하느냐는 것일 겁니다. 분명한 것은 ‘나’는 ‘목적어(object)’가 아니라 ‘주어(subject)’로 있을 때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어(subject)'이신가요, 아니면 ‘목적어(object)’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