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론(理氣論)은 이(理)와 기(氣)의 범주를 사용하여 우주 현상과 인간의 도덕 실천의 문제에 관한 체계적인 해명을 추구하는 이론이며, 성리학(性理學)은 이기론에 바탕을 둔 학문이다. 성리학은 자연·인간·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만물이 생성·소멸하며, 그런 점에서 기(氣)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이(理)는 만물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氣)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 기(氣)의 운동법칙이다. 성리학에서 이(理)와 기(氣)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기본적인 명제가 ‘이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는 것이다. 특히, 성리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라고 하여 이(理)가 자연·인간·사회 등의 본성(本性)이라고 본다.
1559년부터 편지 왕래를 통하여 13년간 계속된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국내학술 사상 유례없는 본격적인 학술 토론이었던 점에서, 또 논쟁의 주제가 성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성론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더욱이 논쟁의 당사자인 기대승과 이황 두 사람은 비록 치열하게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나갈지언정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기대승과 이황은 사단(四端)으로 상징되는 도덕 감정을 주희 형이상학의 핵심 범주였던 이기(理氣)로 설명하려고 했던 철학자였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조선시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논리적인 도덕감정론이라고 할 수다.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맹자(孟子)에 의하면, 인간은 사단칠정(四端七)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사단(四端)이 도덕의 근간이며 자연·인간·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성(本性)이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논쟁은 정지운(鄭之雲)이란 유학자가 자신이 만든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이황에게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천명도설>에는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드러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드러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고, 이황은 이 구절을 수정해 “사단(四端)은 이(理)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드러난 것이다”라고 수정해 준다. 이것을 본 기대승이 이황에게 편지를 써 반박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황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사단(四端)이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인 반면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라고 한다. 인간의 이(理)와 기(氣)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理)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氣)의 발동으로 나눠지고 이(理)의 발동이 사단(四端)이며 기(氣)의 발동이 칠정(七情)이라는 것이다. 사단(四端)이 이(理)의 발동에 속한다면, 사단(四端)은 인간의 본성(本性)에 속한다.
그러나 기대승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서로 다른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겨난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하며 이황에게 편지를 보낸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모두 이(理)와 기(氣)가 함께 일으키는 것이지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으며, 비록 사단((四端)이 도덕 감정으로 고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칠정(七情)도 사단(四端)과 동일하게 이(理)와 기(氣)의 두 원리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도덕 감정)인 사단(四端)이 이(理)와 기(氣)가 함께 일으키는 것이라면, 이(理)와 함께 기(氣)도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단(四端)은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면서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랜 논박 끝에 이황은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나서 자신의 주장을 일부 수정해 “사단(四端)은 이(理)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드러난 것이다”라는 주장을 “사단(四端)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드러날 때 이(理)가 타는(乘) 것이다”로 수정한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모두 이(理)와 기(氣)라는 범주를 적용했지만, 사단(四端)에서는 이(理)가 중심적 역할을 하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황은 기대승의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理)와 사단(四端)의 우월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황의 이 절충안은 다시 이이(李珥)에게 다시 도전을 받는다. 성혼(成渾)이란 사람이 이황의 사단찰정론을 옹호하자 이이(李珥)는 기대승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주장한다.
“칠정(七情)이 기(氣)가 드러날 때 이(理)가 타는(乘) 것이라는 말은 옳지만, 단지 칠정(七情)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단(四端) 또한 기(氣)가 드러날나 이(理)가 타는(乘) 것이다. 갓난아이를 보는 순간 측은지심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갓난아이가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이후에야 측은지심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갓난아이를 보고 측은해지는 것은 기(氣) 때문이다.”
- 율곡 전서(栗谷全書) 중 <답성호원(答成渾源)>
이황이 사단(四端)을 이(理)에서 직접 드러나기 때문에 본성으로 보았다면, 이이는 사단(四端)이 기(氣)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절대적인 본성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를 두고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주리론(主理論)은 ‘이(理)를 중심으로 해 이기론(理氣論)을 펼친 사유’이라면, 주기론(主氣論)은 ‘기(氣)를 중심으로 해 이기론(理氣論)을 펼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이 “이(理)는 능동적으로 우리의 삶을 규율하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는 명제를 갖고 있다면, 주기론(主氣論)은 이(理)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이(理)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어서 이(理)로써 우리의 삶을 규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대승과 이황, 이이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다. 이 논쟁으로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생기고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당쟁(黨爭)이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승조는 진제와 속제가 서로 다른 세계를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세계, 곧 공한 현상계에 대한 언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격의불교의 이론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진제와 속제는 존재론적으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존재, 곧 현상계에 대한 언표로서 상호보완적인 위치에 있다.
진제나 속제 어느 하나라도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밝힐 수는 없다. 그것은 현상계의 공한 모습은 언어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계는 개념적인 사유로써 파악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상계의 참된 모습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 진제와 속제의 가르침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그러한 관념을 부정하여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속제라면, 진제는 이 속제의 가르침을 다시 고정관념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속제가 일상의 언어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진제는 가르침으로 사용된 언어에 대한 집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속제와 진제는 고정적인 형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매우 변증법적이다. 즉 그가 말하는 바 '속제로써 비유를 밝히고 진제로써 비무를 밝힌다'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세속인들이 세상은 實有(실유)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세상은 '유가 아니다(非有;비유)'라는 가르침을 사용한다. 이것이 속제이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상이 유와 대립되는 개념인 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하여 세상은 '무가 아니다(非無)'라는 가르침을 사용한다. 이것이 진제이다.
여기에서 진제의 가르침으로서의 非無(비무) 안에는 이미 非有(비유)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말은 참으로 진제의 말이다'라는 말을 통하여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진제와 속제를 모두 가르침으로 보는 이제론은 인도 중관학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승조만의 독특한 이론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언어가 가지는 한계성과 도구적인 유용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과 이제의 바탕 위에 성립된 그의 초월론에서는 당연히 현상계를 떠난 다른 세계로의 초월을 상정하지 않는다.
성인은 온갖 변화를 타지만 변화하지 않고, 온갖 미혹됨을 밟지만 항상 통한다. 이것은 만물이 스스로 텅 빈 것에 나아가서 텅 빈 것을 빌리지 않고서도 만물을 텅 빈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매우 기이하도다, 세존이시여! 참된 경지를 움직이지 않으시면서도 모든 존재가 설 자리가 되십니다. 참됨을 떠나지 않으시면서도 설 자리를 삼으셨기 때문에 서는 곳이 바로 참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하니 도가 멀리 있는가? 접하는 것마다 모두 참된 것이다. 성인이 멀리 있는가? 체득하면 바로 신묘하게 되는 것이다.
공이 현상계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 뿐, 현상계를 떠난 다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진제와 속제가 단지 도구적인 것으로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초월의 세계 또한 존재론적으로 현상계 밖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지혜를 얻은 성인은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본체를 체득하여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無化(무화)시켜버린 사람도 아니며, 존재론적으로 참된 존재인 현상을 주관적으로 무화시켜버린 사람도 아니다.
그는 현상이 공하다는 진리를 올바로 체득한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체득하기만 하면 곧 성인이 되
는 것이며, 초월하는 것이다. 그 초월의 세계가 현상을 떠난 것이 아니며, 체득의 내용이 현상의 올바른 모습이기 때문에, 그것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현상이 그대로 진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진리는 현상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참된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월의 세계가 세속적인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은 그에게 매우 분명한 것이다.
승조의 입장에서 볼 때 현상을 떠난 다른 곳에서 초월의 세계를 구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세계를 가정하고서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처럼 헛된 일일 뿐이다. 여기에서 초월계와 현상계는 더 이상 이원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공한 현상을 공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는 우리의 인식주관에 문제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초월은 인식주관이 현상의 참된 모습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서 성립하는 순전히 인식론적인 사건일 뿐이며, 어떠한 존재론적 변화도 수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깨뜨리고 현상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언어적인 가르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