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생을 닮은 사각의 프레임
진동선*
경멸과 찬사, 그 경계에 서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참 많이 놀랐다. 세상 저쪽에 있는 것이 순간에 이쪽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모두들 마법을 부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기를 마법 상자로, 사진가를 마치 사라져라 나타나라 주문을 외는 마법사로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법이었던 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빼닮음’이다. 초상 사진은 유령이었고 귀신이었다. 사진에 찍히면 혼이 달아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진의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말이 ‘살아 있는 그림’이란 뜻의 ‘타블로 비방(Tabeleux vivants)’이다. 타블로 비방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이다. 사진의 가장 높은 영역이고 또 닿아야 할 이상이다.
타블로 비방은 그러나 사진이 예술일 수 있게 하는 데 큰 장애였다. 그랬다. 사진의 생생함과 선명함은 예술이 되는 데 최대 악재였다. 화가들은 사진의 생생한 살아 있음을 비웃었다. 정신과 영혼이 결여된 기계의 묘사, 즉 인간의 영혼과 정신, 그리고 손의 장인성이 아니라 사진기가 만들어준 영혼 없는 모습이라고 멸시했다. 물론 세부 묘사에 놀란 일부 초상화가들의 공격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진은 바로 그날부터 회화의 적이 되고 그리하여 아주 오랫동안 예술이 되지 못한 운명의 프레임에 있었다.
사진이 회화의 오랜 경멸과 조소로부터 벗어나 당당한 예술이 된 때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사진은 비로소 모두가 인정하는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사진 발명으로부터 15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진이 오랫동안 미술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원인 중에는 영혼 없는 대중성이고, 다른 하나는 ‘말이 필요 없다’는 철학 부재다. 사실이다.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고, 생각 없이도 포착할 수 있으며, 누구도 머리 쓰지 않아도 무엇을 찍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은 분명 대중들의 멋진 취미이고, 멋진 장비이며, 그리고 누구나 사진에 대해서 한마디 할 수 있는 대중성과 철학 부재의 모습이었다. 사진은 그림과 달랐다. 텅 빈 캔버스에 사유 없이는 시작도 못하는 그림, 정신과 손의 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 어떤 이미지도 표현할 수 없는 그림과 너무 다른 프레임이었다.
사진, 드디어 대중과 시대의 부름을 받다
그렇다면 미술로부터 그토록 생각 없고, 영혼 없고, 철학 없다고 괄시 받았던 사진이 어떻게 현대 미술의 최고의 모습이 되었을까. 한마디로 세상의 변화, 시대의 변화, 삶의 프레임의 변화 덕분이다. 예술을 규정하는 것은 언제나 시대이고 또 동시대 문화이다. 사진이 여전히 누구나 찍을 수 있고, 누구나 철학 없이도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취미 오락의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 가장 각광받는 유망한 예술이 되는 것은 삶의 프레임의 변화,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프레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보라.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의 일상을 볼 수 있게 하는 예술이 있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중요성과 가치를 사진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술이 있는지, 우리가 매일 만나고 부딪히고 아파하는 생의 이야기를 사진보다 더 유창하게 말하는 예술이 있는지, 사진이 예술이 된 것은 이것이다. 미술이 사진을 폄하하고, 쉽게 만들어지는 싸구려, 혹은 천박한 예술이라고 조롱했지만, 시대와 삶의 호출로 예술이 되었다. 사진을 예술의 영역으로 이끈 것은 대중이고 문화다. 설사 예술이지 않더라도 사진은 우리 시대 유효한 수단, 사진이 아니면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작은 이야기, 작은 사건들을 위해 곡 필요한 도구다. 사진을 예술로 호명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새로운 시대, 대중들에 의해서 사진의 프레임은 변했다. 일상은 물론이고 대중문화 밑바닥에서부터 고양된 고급 예술의 전당까지 사진의 위상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아끼고 애호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힘도 따라 커지고 있다. 그 힘으로부터 이 땅의 사진예술도 변하고 있다.
돌이켜 보자. 2000년까지만 해도 사진은 시장도, 가격도 없었다. 시장은커녕 사진의 독자적인 공간도 없었다. 도처에 미술화랑이었지 사진을 내건 사진화랑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미술이 보여준 사진에 대한 편견도 대단했다. 빵떡모자를 눌러쓰고, 렌즈를 주렁주렁 가슴에 달고, 예쁜 모델을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며 누드사진이나 찍고, 아니면 초파일 연등 혹은 가을 산하에 단풍잎을 향해 신나게 셔터를 눌러내는 이미지 사냥꾼으로 여겼다. 그랬으니 사진을 살려는 사람이 없었고, 화랑들도 사진을 외면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화랑에서의 사진전을 마치 명예에 먹칠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철학과 인식의 틀, 나를 표현하는 한 컷의 사진
그랬던 화랑들이 사진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준 것은 확실히 프레임의 변화다. 사진이 미술의 견고한 프레임을 걷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단 한가지이다. 철학이 있는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철학 부재의 프레임에서 철학이 있는 프레임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일차적인 토대가 사진을 학문으로 가르치는 사진대학일 것이고,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사진가들의 철학적 소양의 함양일 것이다. 즉 사진가들이 아름다움만을 쫓는 단순성에서 벗어나 삶과 존재를 비추는 거울로 창으로서 사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진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진을 찍는 방법과 프로세스가 이전보다 더욱 간편해졌지만 사진에 대한 인식은 더욱 무거워졌다.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부담 없이 편하게 셔터를 누르게 되었지만 사진으로 소통하고, 사진으로 드러내는 나의 존재감은 더욱 진중하고 깊어졌다. 사진은 사진에 채워진 질긴 프레임을 스스로 걷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진이 미술이 되었고, 사진이 뜨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어느새 가격이 6천만원에 이르는 우리의 사진 작품과 만나게 되었다.
모든 것이 프레임이었다. 사진은 4각의 틀을 쓰고 이 땅에 왔다. 그 프레임이 어느 순간 우리 마음의 눈이 되고, 창이 되고, 거울이 되는 순간 송두리째 인식의 프레임이 바뀌었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사진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다. 사진의 프레임은 내 안의 어떤 프레임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고 그 프레임에 세상 저쪽의 무엇인가를 채우는 프레임이다. 나를 찌르고,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 내가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게 하는 인식의 프레임이다. 우리 삶은 그 프레임 안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바로 나의 존재감이고 나를 바라보게 하는 정체성이다.
예전 어떤 카메라 광고에 이런 카피가 있었다. ‘당신이 카메라가 될 때 카메라도 당신이 된다’. 그렇다. 사진은 세상과 직면한 존재들의 눈이고 마음이다. 모든 사람들의 주머니에 카메라가 들어 있어야 하는 이유이고, 단 하루도 사진과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며 사진만이 우리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에는 태생적으로 여러 가지 물리적 정신적 프레임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가치 있는 프레임은 바로 이것이다.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세상을 향한 너와 나의 창이 되고 거울이 되어주는 것. 예술보다 우선한, 한 인간의 영혼의 프레임이 가장 고귀한 사진의 프레임이다. 진정한 사진은 영혼의 프레임 속에서 빛난다.
- <하나은행> 계간지(2006년 겨울호, Vol. 8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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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선 : 현대사진연구소 소장이자 사진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작품 속에 숨은 작가의 메타포와 세계관은 예술과 대중을 잇는 메신저, 진동선을 통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진을 사랑하는, 사진을 위해 기꺼이 살아가는, 마중물 같은 남자. 언제나 반가운 진동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