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Vs 바디우(1)
철학을 정의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묘사적이고 하나는 정립적이다. 질 들뢰즈는 묘사적 방식의 사례를 이룬다. 철학적 노동을 벌거벗긴 뒤, 그로부터 철학 자체의 고유한 특질을 도출시키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정립적 방식의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철학은 존재에 대한 사고라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들뢰즈는 니체를 통해 베르그손을 구출하고, 바디우는 칸토르를 통해 플라톤을 구출한다. 이것은 둘이 합류하는 점이기도 하고, 대립되는 지점이기도 한다.
들뢰즈는 “개념들을 형성하고 발명하고 제작하는 기술”을 오직 철학에 귀속시킨다. 그러나 바디우는 철학이 진리를 창조할 수 있음을 부정한다. (...) 들뢰즈는 개념들의 창조라는 용어가 이끄는 실천을 묘사한다. 이때 개념들은 “자기정립”된 것으로 유동적이고, 강도의 장소들이 이동함에 따라 재모델화되는 여러 요소들이 응축된 것이다. 창조란 오직 “무한한 속도로 비행하는 상태에 있는 지점”의 이미지로만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 들뢰즈가 철학의 모델을 생산의 사실성 위에서 확립했고, 사고가 실천의 움직임 속에서 창조해 내는 것을 그려냈으며, 기혹을 정의하는 수준으로까지 도정(道程)을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바디우를 이끄는 말은 진리성(verite)이다. 즉 그 또한 진리가 생산되는 공정들을 진술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공정들은 사고의 움직임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 관건이 되는 것은 참된 담화로 확립될 수 잇는 것이고, 연역의 연산 장치를 작동시킴으로써 참된 담화가 도래하도록 해주는 조건들이다.
_ <조건들(conditions)>(p.14~15)
들뢰즈 Vs 바디우(2)
들뢰즈는 연속을 사고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연속은 바디우가 “유기체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의도에 따라 확장되기도 하고 수축되기도 하는 하나의 탄력적인 전체가 그것이다. 반면 존재론에서 연속이란, 비록 익명적이고 ’아무런 것(quelconque)'이지만 다수의 구성과 동질적인 덧붙임일 뿐이다. 즉 그것은 다수의 이론에 의해 파악되는 덧붙임이다. (...)
심지어 <접힘>에서조차 들뢰즈는 판별 불가능한 것이라는 극히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사용하길 거부하고, “개별적인 것”에 입각한다. 사건-개념이 비육체적으로 개별적인 것은 명백하고 “그 각각의 구성요소들도 일반적인 것이나 특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화하거나 일반화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개별성으로 파악도어야 한다”는 것이다. (...)
바디우의 반박은 명쾌하다. 즉 사물들 상태들 또는 사실들에 있어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운행은 일반적인 일반성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반면, 확실하게 개별적인 것 또 그처럼 구별되는 것은 유적 공정이다. 전체가 집중되는 지점으로서가 아니라 다수에 우연히 덧붙여지는 것으로 말이다. (...)
우리는 바디우에게서 주체의 흔적이 어디에 기입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자명한 것은 주체 층위가 없다면 개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주체는 우발적이고, 드물고, 개별적이고, 특정하다. “법은 주체가 있도록 명령하지 못 한다.” 주체는 “상황의 초과적 짜임새다.” 언제나 국지적인 주체는 “진리를 지탱해준다.” 구체적으로 행위와 주체의 개입은 사건적 거점과의 만남, 정원 외적인 이름, 그리고 항상 상황 사이로 투척된 앙케트다. (...) 결국 주체는 투사(鬪士)이다. 도래할 진리의 투사이다.
_ <조건들(conditions)>(p.31~34)
들뢰즈와 바디우(3)
주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몸씨 싫어하는 들뢰즈는 내면성을 외적인 다수가 안으로 접히고 응축된 것으로,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세계와 같은 것이고 세계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일 뿐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내면성의 이중적 운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표현이 성립한다. “나라고 말하는 것은 두뇌이고, 그러나 나는 타자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적 충실성을 지닌 바디우는 단지 지식의 범주일 뿐 실체적 주체를 파면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주체를,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곳에서, 그 어떤 것도 어떤 법칙도 강요하지 않는 추구를 실행하는 것으로 복원시킨다. 이것이 진리의 도래와 분리될 수 없는 주체의 형상이다. (...)
그렇다면 이제 주체에게 어떤 존재 유형을 귀속시킬까? 진리성과 마찬가지로 주체도 존재론이 사건에 대해 표명하는 금지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성의 실존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실존도 존재론과 양립 가능할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다. 그리고 진리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듭은 출발점의 존재론적 상황에서 주체로 하여금 지식의 자의 없이 가각의 유적 공정을 순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들의 실존이다. 즉 그 조건들은 주첼 하여금 그의 개입으로 인해 생산될 수 있었을 것의 정당성, 즉 진실성을 상황으로부터 발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 그래서 그 공정들의 진실성을 통해 우리는 주체의 존재가 가능한 것으로 입증된다는 것을 안다. “한 주체의 실존은 존재론과 양립가능하다.”
_ <조건들>(p.3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