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키 반정부 시위의 빌미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공리의 부가", <주류 규제 강화법안>.
시위대는 정부가 정부에 대한 비판과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위 초반 정부는 시위대를 '극단주의자와 '약탈자'라고 비난하며 '평화의 적'으로 간주했다.
전쟁 기계의 자율화, 자동화가 현실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전쟁 기계는 이제 새로운 적대 관계가 이 기계에 작용하게 된 결과 전쟁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평화, 정치, 세계 질서를 짊어지고 이들을 대상으로 삼기에, 요컨대 목적이었던 것도 하나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의 공식은 뒤집어진다. 즉, 정치가 전쟁의 연속이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이미 제3차 세계대전 중에 있다. 전쟁 기계는 “경제-세계”를 포위하고 있는 연속적인 것의 역량으로서 공리계 전체를 지배하고 세계의 모든 부분을 접촉시키고 있다. 세계는 다시 매끄러운 공간(바다, 하늘, 대기권)이 되었지만 동일한 단 하나의 전쟁 기계가 이 모든 부분을 대립시키면서도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전쟁은 평화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다. 국가는 전쟁 기계를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가 전쟁 기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방식으로 이 기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
공포 또는 억지라는 절대적 평화 속에서 전쟁 기계는 새로운 목표를 찾아낸다. 전쟁 기계는 기술과 과학의 “자본화”를 행한다. 전쟁 기계는 전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들이대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 전쟁 기계가 강요하고 또 이미 만들어낸 매우 특수하고 현실적인 평화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이 전쟁기계는 특수한 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리계의 요청에 따라 내부와 외부의 “불특정한 적(개인, 집단, 계급, 민족, 사건, 세계)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화된 전쟁, 조직된 불안 또는 계획된, 분배된, 분자화된 공황(恐慌)이 새로운 안전 개념으로 등장한다.
_ <천 개의 고원>(p.893~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