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용들은 양태들 그 자체다. 양태들은 실체 혹은 그 속성들의 변용들이다(<윤리학>, 1부, 명제25, 보충 : 1부, 명제 30, 증명). 이 변용들은 필연적으로 능동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적합한 원인으로서의 신의 본성에 희해서 설명되는데, 신은 수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2) 두번째 단계에서는, 변용들은 양태에서 발생되는 것, 즉 양태들이 변형들, 어떤 양태에 따른 양태들이 미친 결과들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 변용들은 무엇보다도 신체적 이미지 혹은 흔적들이다. (중략) 그리고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은 변용되는 신체의 본성과 변용시키는 외부 신체의 본성을 동시에 포함한다(<에티카> 3부, 명제16). <우리는 인간 신체의 변형을 사물에 대한 이미지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데 이 변용에 대한 관념은 외부 신체를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표상한다... 그리고 정신이 이 신체들을 이 관계 아래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이 상상한다고 말할 것이다.>
(3) 그러나 이 변용-이미지 혹은 관념은 변용되는 신체와 정신의 어떤 상태(constiutio), 즉 이전 상태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완전성을 함축하는 상태를 형성한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한 이미지 혹은 관념에서 다른 이미지 혹은 관념으로의 전이(transitions, 체험되는 이행과 지속이 존재하는데, 바로 이것을 통해 우리는 보다 큰 혹은 더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더욱이, 이 상태, 변용, 이미지 혹은 관념은 지속과 분리될 수 없는데, 이 지속은 그것들을 이전의 상태에 결부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음 상태로 향하도록 만드는 지속이다. 이 지속 혹은 완전성의 지속적인 변이는 <감정(affects ou sentiments)>이라고 불린다.
사람들은, 변용(affectio)이 일반적으로 직접적으로 신체에 대해 말해지는 반면에, 감정(affectus)은 정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차이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차이는 신체의 변용과 외부 신체의 본성을 포함하는 관념을 한편으로 하고, 정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체의 경우에서 행위 능력의 증가 혹은 감소를 포함하는 감정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둘 사이에서 존재한다. 변용은 변용되는 신체의 한 상태와 관련이 있고, 따라서 변용시키는 신체의 현존(presense)을 함축하고 있는 반면, 감정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 그에 상응하는 변용시키는 신체의 변이에 대한 고려에 연관이 있다. 따라서 감정이 변용 혹은 관념의 특별한 유형으로 제시될 수 있지만, 변용-이미지 혹은 관념과 감정 사이에는 본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감정을 신체의 변용으로 이해하는데, 이 변용을 통해서 신체의 행위 능력은 증가하거나 감소하고, 도움을 받거나 방해 받는다>(<에티카, 제3부, 정의3). <우리가 정념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혼동된 관념으로서, 그것을 통해 정신은 자신의 신체가 이전에 비해서 갖는 더 크거나 더 적은 존재의 힘(force)을 긍정한다>(<에티카> 제3부, 감정들에 대한 일반적 정의). 감정이 이미지나 관념을 전제하며, 마치 자신의 원인인 것처럼 그것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은 확실하다(<에티카> 2부, 공리3). 그러나 감정은 이미지나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전이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아주 다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두 상태 사이의 차이를 포함하는 체험되는 지속 속에서 겪기 때문에 지시하고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감정은 관념들의 비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모든 주지주의적 해석을 다음과 같이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내가 이전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존재의 힘을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정신이 신체의 현재 상태와 과거 상태를 비교한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형식을 구성하는 관념이 신체에 대해 실제로 이전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실재성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에티카> 제3부, 감정들에 대한 일반적 정의).
한 존재 양태는 특정한 변용 능력에 의해서 정의된다(<에티카> 3부, 공준 1과 2). 다른 양태를 만날 때, 이 다른 양태는 그것에게 좋은 것일 수가 있다. 즉 다른 양태와 결합할 수 있다. 반대로 그 다른 양태는 그것을 해체함으로서 그것에게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첫번째 경우에, 그 존재 양태는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며, 두번째 경우에는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 이행한다.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자신의 행위 능력 혹은 존재의 힘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른 양태의 그것에 첨가하거나, 반대로 삭감하고 정지시키고 고정시키기 때문이다.(<에티카> 4부, 명제 18, 증명).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증가는 기쁨의 감정이라고 부른다.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감소는 슬픔의 감정이다.
이와 같이 행위 능력은, 외적 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용 능력은 동일하게 유지한 채 상이하게 변한다. 감정은 그것이 전제하는 변용-이미지 혹은 관념(우리의 신체에 적합하거나 적합하지 않은 신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감정이 자신의 기원이 되는 관념으로 되돌아올 때, 기쁨은 사랑이 되고, 슬픔은 증오가 된다. 이러한 다양한 계열의 변용들과 감정들은 항상적으로, 그러나 가변적인 조건들 속에서, 변용 능력을 실행한다(<에티카, 3부, 명제56).
우리의 감정이 다른 존재 양태들과의 외적인 만남으로부터 유래하는 한, 그것이 변용하는 신체의 본성에 의해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부적합할 수밖에 없는 이 신체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상태 속에 포함되어 있는 혼동된 이미지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러한 감정들이 정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적합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에티카> 3부, 정의2). 행위 능력의 증가로서 정의되는 기쁨에 토대를 두고 있는 감정들도 정념들이다. 기쁨은, <인간이 자기자신과 자신의 고유한 행위들을 적합하게 사유할 수 있을 만큼 행위 능력이 증가하지 않는 한>, 여전히 정념이다(<에티카> 5주, 명제 59, 증명). 우리의 행위 능력은 우리가 형식적으로(formellement) 그것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 아무리 물질적으로(materiellement) 증가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수동적이며, 그 능력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감정의 관점에서의 두 종류의 정념들, 즉 슬픈 정념과 기쁜 정념에 대한 근본적인 구별은 또 다른 구별, 즉 정념(수동)과 능동(actions) 사이의 구별을 준비한다. 감정은 언제나 변용에 대한 관념인 어떤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 관념이 혼동된 이미지가 아니라 적합한 관념이라면, 그것이 변용시키는 신체의 보질을 간접적으로 우리의 상태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관념이 내적인 변용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본질, 다른 본질들, 신의 본질의 적합성을 표시하는 자기-변용에 대한 관념이라면, 그렇다면 그 관념으로부터 나오는 감정들은 기쁨과 사랑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에티카> 3부, 명제 58과 59), 아주 특별한 기쁨과 사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기쁨과 사랑은 우리의 완전성이나 행위 능력의 증가에 의해서 더 이상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이 능력과 완전성의 온전한 형식적 소유에 의해서 정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능동적인 기쁨에 우리는 지복(beatitud)이라는 이름을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
- <스피노자의 철학>(질 들뢰즈 · 민음사 · 2001년 · 원제 :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제4장 윤리학의 주요 개념 색인> p.7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