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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 '여성'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by 이우 posted Jun 07, 2018 Views 1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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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나의우파니샤드서울_900.jpg


  自序
 
  시는 아마 길로 뭉쳐진 내 몸을 찬찬히 풀어,
  다시 그대에게 길 내어주는,
  그런 언술의 길인가보다.
  나는 다시 내 엉킨 몸을 풀어
  그대 발 아래 삼겹 사겹의 길을……
 
  그 누구도 아닌 그대들에게,
  이 도시 미궁에
  또 길 하나 보태느라 분주한 그대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너 이 놈, 나 죽었다는 말 못 들었니?
  나쁜 놈, 내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1994년 5월
  김혜순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서문



  新派로 가는 길 5
  김혜순


  걸어서 저 하늘까지
  저 하늘의 구름城까지 걸어가요
  저 구름城의 모습, 바로 내 모습이에요
  나는 걸어서 저 하늘의 내 안으로 들어가요
  구름城 문이 소리없이 닫히고
  城안에 나는 한없이 갇혀요
  뭉실뭉싯 살이 찌기도 해요 배가 부풀어오르고
  어느 날 살찐 아기가 튀어나오기도 해요 장딴지가
  파르테논 신전 기둥만해졌어요
  차암, 낯뜨거운 날 창문 열고
  나 한번 쳐다본 적 있으셨겠지요
  거 구름 한번 좋다 하셨겠지요?
  그러나 햇빛 양의 치맛자락 아래 그냥 그대 뜨거우시라
  놔두면서 나 혼자 마구 젖었던 거
  구름 기둥 같은 두 다리 싸안고 이리저리 뒹글었던 거
  보신 적 없다 말하진 않으시겠지요?
  내리지 않는 비로 누워서
  혼자 소용돌이치다 혼자 온몸 다 젖었던 거
  빗소리 어디서 아마득히 들리는데
  빨랫줄의 그대 속옷 하나 안 젖는 날
  있었던 거 생각나셨겠지요?
  큰 소리 마른 번개로 눈물 없이 울던 거
  말하려면 할수록 활자와 단어들이
  후드득 후드륵 뚱뚱한 내 뱃속으로 떨어지던 거
  입 안에 침만 고이던 거
  어느 날인가는 파랗게 눈 닦고
  그대 양철 지붕만 망연히 어루만지던 거
  차마 알아채지 못했다고는 안 하시겠지요?
  날마다 슬픔의 몸 바꾸며 소리쳐도
  내 몸 밖으로 물길 열리지 않던 거, 보셨겠지요?
  내 길 열어 그대 머릿결 따라 길을 내고
  그대 뺨 위로 길을 내고 싶어 눈 껌벅이던 거,
  이제 몇십번째의 이승길 걸은 듯하고
  저 높은 산 저 깊은 계속 저 神話의 굽이굽이
  다 지난 듯하여 水面 위에 내 말의 꽃 끝내 못 피우고
  그대 지붕 위에 물꽃 소리 못 피우던 거
  내 몸 혼자 뒤채고 부풀리던 거
  정녕 모르신다곤 않겠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30~31



  아직도 서 있는 죽은 나무
  김혜순


  초승달의 눈썹이 깜빡깜빡
  열렸다 닫히면서
  애무에 젖는다
  보이지 않는 구름의 손이
  보이지 않는 달의 몸을 만지듯
  달은 칠흑의 허랑방천으로
  천천히 밀리면서
  낌빡깜빡 죽었다 깨어난다

  은은히 숲 속의 나무들이
  달의 발가락처럼 흔들리는 가운데
  어두운 밤의 난간에 기댄
  죽은 나무가 아직도 눕지 않고 서서
  문틈으로 깜빡거리는
  눈썹을 보며
  밤새도록 흐르는 달의
  살을 훔친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6



  어쩌면 좋아, 이 무서운 아버지를
  김혜순


  얘야
  천년 묵은 여우는 백 사람을 잡아먹고
  여자가 되고, 여자 시인인 나는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만 아버지가 되었구나
  (망측해라, 이제 얼굴에 수염까지 돋게 생겼구나)
  백 명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그 허구의 이빨로 갈아놓은
  문장의 칼을 높이 치켜들고
  나 두리번거릴 때
  거기서 문장의 사이로
  나귀를 타고 걸어 들어오는 너의 모습
  엘리엘리

  너 심겨진 밭에 약을 치고 돌아오는 아버지
  네 팔을 잘라 나뭇단을 만드는 아버지
  네 밑동을 잘라 제재소에 보내는 아버지
  양손이 사나운 칼날인 아버지
  큰 구두를 신어 디뎌야 할 땅도 많은 아버지
  나하고 놀아요, 아버지
  하면 깜짝 놀라는 아버지
  나 아버지가 되기 싫어 크 소리로 말해도
  이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살해했으므로 그만
  아버지가 되어버린 아버지
  경찰 커튼 아버지 겈정 잉크 아버지 기계 심장 아버지
  칼날같이 갈아진 양손을 모두어야
  비로소 제 가슴이 찔러지는 그런 아버지
  얘야, 나는 그런 망측한 아버지가 되었구나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49~50


  사월 초파일
  김혜순


  저 아카시아 흐드러지게 터진 골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노고단
  지붕마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올라서서 수만 깃발처럼 펄럭거리네


  엄숙하고 경건한 장례 행력 거대한 영정 뒤로 상복을 입은 가족을 실은 검은 승용차 얘야 얘야 못 간다 에미 에비 뇌두고 네 맘대로 못 간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수천 개의 휘날리는 만장들 뒤를 이어 대오를 지은 수만 명의 조문객들 검은 리본을 단 연도의 시민들 이곳을 주검이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시나리오대로 길을 막는 방석모 방패 삼십 분 안에 행렬을 돌리지 않으면 최류탄을 발사하겠습니다 걔는 안 죽었어 이놈들아 한정 없이 살 거야


  땡볕 아래 한없는 대치 아스팔트에 앉거나 눕는 행렬 장기전이 될 거야 그 사이로 김밥장수 커피장수 마스크를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시루떡을 팔러 온 할머니의 양은 다라이 죽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처녀 아울러 김밥과 콜라를 먹는 조문객들 저녁 시간이야 흐르러지는 대오 그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껌을 파는 아이들 신문을 파는 청년들 그 신문으로 모자를 접는 여학생들 두둑해진 전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담배장수 시장보다 김밥 값이 두 배야 바가지야 여기가 해수욕장이냐 그 사이로 성스런 초파일의 연등 행렬 등장 낭랑한 반야심경 합장 어스름 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류탄 발사


  흐트러지는 대오 뛰는 아가씨의 벗겨지는 하이힐 우는 아이 탱탱 드럼통처럼 구르며 뜨거운 커피를 아스팔트 위에 쏟는 보온 물통 그걸 잡으려 뛰는 커피장수 밟히는 콜라 깡통 터진 김밥을 밟는 구두 골목으로 잠입하는 대오 두건을 쓴 사람들의 백 미터 이백 미터 달리기 어디서 물 쏟아지는 소리 깨어지는 떡시루 장삼을 펄럭이며 혹은 연등을 들고 혹은 연등을 버리고 뛰는 중들 연등 위로 넘어지는 옥색 한복 뜯기는 자주 옷고름 노랑 저고리에 붙는 불을 탁탁 손으로 치며 우는 여고생 연등을 밟는 검은 버선 전속력으로 우회하는 검은 지프


  큰일이 나긴 난 모양이야 저 연기
  바람 따라 퍼질 때마다
  눈발이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네
  설악 대폭설 때처럼 저 나방Ep
  흩어지는 너 나방떼
  먹으로 달려드는 저 새떼 먹으러
  하늘 검게 칠하며 돌처럼 달려드는
  저 자동차떼
  막혔다 터져 흐르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72~74



  서울
  김혜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마치, 난자를 만난 정자가 그녀의 집에 영원히 체포되듯 너는 거기에 속해 있다. 내부의 사람이면 누구나 유리문을 밀고 나가 또 하나의 유리문을 향해 걸어가야 하며, 그곳을 나와서도 또 하나의 유리문을 열어야 한다. 밤이 오면 어떤 유리문들은 네온 사인을 달고 여기가 정말 출구예요 말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길 잃은 파리가 윙윙거리는 방안에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이 뒤엉켜 누워 있고, 어떤 방문을 열면 네 시신 위로 구더기들이 한없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유리문은 빗속을 맹렬히 달려 너는 잦은 머리칼을 흔들며 죽어라 그 문을 향해 뛰기도 해야 하고, 어떤 유리문은 지하 깊숙이 미로를 개설하기도 한다. 지하 미로의 매달린 문들의 이름을 믿지 마라. 어떤 문엔 친절하게도 오류역이라 적혀 있기도 하고, 혹은 어떤 문엔 십리를 더 가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말을 믿지 마라. 이곳의 사람은 아무도 출구를 모른다. 설탕병에 빠진 개미처럼. 알생의 시간을 다 플어내어 만든 실뭉치 속에 숨어든 파리처럼. 이곳 가슴의 미궁은 그리 넓지 않아 새벽 네시경, 두 시간이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주파할 수 있지만 몸 밖으로 출구를 찾은 사람은 아직 없다. 가슴속 투명한 미궁의 주인은 오늘 또 세간살이를 몽땅 싣고 정읍에서 올라온 다섯 식구를 접수한다. 그들도 이제 들어왔으므로 출구를 모르리라. 미궁의 유리문들이 점점 늘어난다. 길 위에 길이 세워지고, 물길 아래 물길이 세워진다. 너는 늘 떠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벙어리 네 그림자는 말하리라. 땅바닥에 누워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서 말하리라. 이 길로 가서는 안 돼요. 그림자 언제나 길은 틀렸어요 말한다. 날마다 복선이 증가한다. 유리벽에 뭘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기려 하고 있구나.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데……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2~93



  新派로 가는 길 1
  김혜순


  종점 옆의 아파트에선 안 봐도 알지요. 이부을 덮고 그 위에다 잠을 덮고 있어도 다 알지요. 첫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 아직 잠이 들깬 조수가 내 귓속에서 하품을 아! 하는 소리. 그리고 내 속에서 w마들었던 당신이 외양간 문을 열고 나를 끌고 나오는 모습. 버스 위로 고무 호스 속의 물이 쏴아쏴아 쏟아지고 물걸레가 내 귓속을 쓰윽쓰윽 닦는 소리. 다시 물이 유리창을 타고 내리면서 어젯밤 내내 달라붙어 있던 내 눈길을 닦아내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커다란 솔로 내 가슴을 쓱쓱 쓰어주는 것. 아직도 어둠을 질질 흘리고 있는 버스를 다시 주유소 앞으로 끌고 가 덜컹 기름통 여는 소리. 이빠이 넣어 하는 소리 안 들려도 나는 다 듣지요. 그리고 당신이 나를 끌고 논둑길을 걸어가는 것. 나를 잠시 버드나무에 매어두고 샘물에서 물 한 바가지 떠 벌컥벌컥 마시는 것. 당신이 내 숨을 꼴깍꼴깍 넘어오는 소리. 당신 바짓가랑이를 점점이 적시는 물. 돈통을 든 남자가 슬피러를 지이익 끌며 버스로 가다말고 네 귓속으로 침을 칙 뱉는 소리, 그리고 당신이 당신 가슴을 쓸며 눈을 들어 머얼리 마을 앞 행길을 바라보는 것. 아 당신의 눈동자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행길. 다시 그 눈으로 망초꽃밭 한번 쳐다보는 것. 버스가 아무도 서 있지 않은 첫 정류장을 지나 귀 밖을 나서는 소리. 버스 꽁무니에서 솟아나는 어둠이 잠시 행길을 가리는 것 나는 다 보지요. 누워서도 다 보지요. 그리고 당신이 다시 나를 끌고 개울을 거너는 것. 윗옷 밑으로 빠져나온 희디흰 러닝셔츠. 나는 누워서 다 보지요. 당신이 지나온 망초꽃밭의 꽃들이 제각각 진저리를 치며 어둠을 털어내고 애타게 당신을 바라보는 것 나는 다 보지요. 시발점이라 하지 않고 종점이라 하는 종점 옆의 아피트에 누워선 안 봐도 다 알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99~100



  新派로 가는 길 4
  김혜순


  하얀 눈. 하얀 토끼. 밤새 하얀 눈 내려 하얀 밤. 하얀 토끼가 하얀 철창 바라보네. 하얀 가운. 하얀 시트. 하얀 팔뚝. 하얀 모자. 하얀 스커트. 돌아서는 하얀 종아리. 하얀 샌들. 하얀 눈 내려 난 하얀 아기를 낳았네. 하얀 우산을 쓰고 먹는 하얀 밥. 하얀 피 만드는 하얀 약., 나는 먹었네. 하얀 눈 속의 하얀 하나님, 창문만큼 높아지고. 라얀 눈 속의 하얀 비밀 있어요. 하얀 이불. 하얀 땀. 하얀 코. 하얀 우유 속에 우얀 쥐 너무 많아요. 하얀 숨 막혀요. 하얀 눈 자꾸 내려 길 없어요. 하얀 악마, 하얀 지옥. 너무 멀어요. 하얀 하품. 하얀 잠. 하얀 붕대를 풀어주세요. 하얀 종이 위의 하얀 글씨, 내 하얀 시를 지워야지. 하얀 하나님 무심한 순결, 내 피의 길을 밖으로 열어요.


  참 용하지
  매일 아침마다 하얀 눈꺼풀 열고 하얀 치약을 짜 하얀 이빨에 들이대면서
  하얀 장막을 찢고 대문을 나서는 거


  하얀 눈 속의 하얀 삽. 하얀 집 한 채. 하얀 창문. 하얀 커튼 속의 하얀 등. 하얀 할아버지 드세요. 하얀 맛나. 하얀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엄마 하얀 나비 좀 보세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이제 며칠째야. 하얀 엄마. 하얀 기침. 하얀 한숨. 하얀 젖가슴. 하얀 귀 뒤를 타고 내리는 하얀 눈가루. 책상 위에 소복소복. 하얀 눈 내리네. 하얀 처녀의 하얀 웃음. 차곡차곡 내려 쌓이는 하얀 새. 그 새들의 감은 눈. 하얀 새가 내리눌러요. 무거워요. 이불 좀 치워 주세요. 바닷속에 해파리들이 늘어나요. 묵처럼 단단해지는 바다. 하얀 바다. 하얀 가루처럼 부서지는 바다. 하얀 모래 위의 하얀 토끼. 하얀 팔뚝. 하얀 주사기.


  눈이 차오르네
  하얀 눈벽이 차오르네
  그래도 나 자꾸만 하얀 벽을 드높이 드높이
  오오랜 내 문명의 끝은 어디인가요?
  부드러움의 지옥
  하얀 설탕 지옥에 빠진 흰 개미
  녹아내리는 하얀 설탕
  하얀 개미를 꿀처럼 결박하는 하얀 설탕 지옥
  숨이 막혀요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05~107



  강변 포장마차
  김혜순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그 안으로 담배꽁초가 들어간다. 시들은 국화꽃이 구겨져서 들어간다. 코 푼 휴지가 들어간다. 쉰밥덩이가 들어간다. 남은 곱창이 쏟아진다. 국수 가닥이 말라비틀어져 들어간다. 지금 열차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단발머리가 들어간다. 말장화가 들어간다. 백납 같은 비구니 둘이 들어간다. 취한 얼굴이 트림을 데불고 들어간다. 문이 닫히려 할 때 아이 업은 여자가 들어간다. 쓰레기 봉지 안으로 씹다 버린 껌이 들어온다. 사과 깡치가 들어온다. 까만 하늘의 별도 들어온다.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가 나와 봉지를 묶어놓고 들어간다. 생리대와 생선 대가리 사이에서 인광이 터졌다가 제풀에 사라진다. 뭉게뭉게 냄새가 섞이고 아이의 머리가 불끈 솟은 다음 울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까만 하늘엔 까만 별이 뜨고, 파아란 하늘엔 파아란 별이 뜬다. 승객을 모두 바꾼 을지로 순환 전철은 88분 후에 정확히 강변역에서 다시 멈춘다. 까만 쓰레기 봉지가 강변 포장마차 앞에 놓여 있다. 높이 뜬 역 구내로 생리대가 올라간다. 생선 대가리가 올라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1



  황학동 재생고무공업사
  김혜순


  머리와 꼬리가 다르지 않은 뱀들
  입과 항문이 다 구멍인 저 뱀들
  칼로 내리쳐도 각각 다시
  살아나서 꿈틀거리는
  저 검은 고무 호스들
  불 꺼진 집
  한 칸을 가즉 채운
  구부러진 백만 마리의 뱀들
  눈꼽 낀 흑구렁이들
  그 중 긴 것은 시베리아에 머리를 두고
  부산 앞바다에 꼬리를 둔 것도 있다 하고
  땅 및 서울을 몇 바퀴나 빙빙 도는 징그러운 놈도 있다고 하지만
  이제 죽어 천 토막 만 토막 난 것들
  스쳐가는 오토바이의 불빛에
  잠시 등가죽에 붙은 애꾸눈으로
  창문 밖을 홀기는
  저 녹슨 구름 연통들, 혹은
  팽팽하게 긴장하며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쾌락에 전신을 맡기며, 또아리를 풀고
  힘차게 힘차게 땅속 깊은 곳의 물줄기를
  넓디넓은 정원 위에 내뿜던
  이제 갈갈리 찢어진 壯士들의 주둥이들
  주머니가 없어 욕망도 더 큰 검은 구멍 동체들
  이제 대낮이 와도
  머리와 꼬리 사이가 늘 밤인 저 연놈들
  어둠의 서식처들
  황학동 재생고무호스공업사 가득
  엉켜 잠들었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14~115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김혜순


  1.
  아침 일곱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동그랗구나
  숟가락들엔 모두 손잡이가 달렸다
  시끄러운 아스팔트 옆
  저 늙은 나무엔 일천이백만 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파리들이 달렸다


  2.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서울사람들, 두 귀를
  가죽배의 방향타처럼 쫑긋거리며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 속을 넘너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한밤중 서울의 일천이백만 개의 무덤은 인중 아래
  모두 봉긋하고 오오오
  또 한강은 일번이백만의 썩은 무덤 속을 헤엄쳐나온
  일천이백만 드럼의 정액을 싣고 조용히 내일로 떠난다


  다시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내다 걸면
  일청이백만 쌍의 태양이 눈을 번쩍 뜨고
  저 내장들의 땅속 지하 삼천 미터까지
  빛살 무늬 거룩하게 새겨진다


  -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문학과지성 시인선 · 김혜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p.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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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7
    Feb 2023
    18:07

    [사회]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 문명과 문화

    (...) 문명이란 나이프, 포크, 스푼을 어떻게 구해올 것이냐의 문제이며, 문화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문명이란 이를테면 도서관이나 혼인 관련 법률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의 문제이며, 문화는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이냐의 문제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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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06
    Jan 2023
    17:53

    [사회]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 시장 자유주의

    "세상은 마치 모든 개인들의 일상 활동에서 그들을 생산자와 소비자로 고립시켜 버리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처럼 작동한다. 이 개인들은 시장을 위해 생산하며, 시장으로부터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다. 이들이 제 아무리 자신의 동료들에게 봉사하기를 열렬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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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05
    Jan 2023
    21:05

    [철학]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문 : 속박과 해방, 자유정신

    3. 우리는 '자유정신'의 유형이 언젠가 완전해질 때까지 성숙하고 단맛을 낼 수 있도록 정신이 어떤 위대한 해방 속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사건이 전에는 얼마나 속박된 정신이었고 귀퉁이와 기둥에 영원히 묶여 있을 것처럼 보였는지 추측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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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15
    Dec 2020
    23:57

    [철학] 『권력에의 의지』 : 예술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794. 우리의 종교, 도덕, 철학은, 인간의 데카당스 형식이다. 이 반대 운동이 예술. 795. 예술가는 곧 철학자. 예술의 고차의 개념. 과연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 형태화할 수 있을 만큼 그들로부터 멀리 떼어놓을 수가 있을까? 그것을 위한 예비 훈련. 1.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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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15
    Dec 2020
    22:54

    [철학] 『권력에의 의지』 : 사회 및 개인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716. 원칙. 즉 개개인의 책임을 느낀다. 다수자는 개개인이 그 기력을 때마침 가지고 있지 않은 사항을 행하기 위하여 날조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모든 공동체 사회는 너무나도 약하므로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기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보다 더욱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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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15
    Dec 2020
    20:58

    [철학] 『권력에의 의지』 : 자연에 있어서의 권력에의 의지

    618. 지금까지 실현된 세계 해석 가운데 현재로서는 기계론적 세계 해석이 승리를 거두고 전면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분명히 이 세계 해석은 스스로의 입장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으며 또한 기계론적 절차의 도움을 빌어 쟁취해 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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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15
    Dec 2020
    19:49

    [철학] 『권력에의 의지』 : 인식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

    466. 우리의 19세기를 결정짓는 것은, 과학의 승리가 아니다. 과학에 대한 과학적 방법의 승리이다. (중략) 469. 가장 가치있는 통찰은 가장 늦게 발견된다. 그러나 가장 가치있는 통찰이란 방법이다. 현재의 과학의 모든 방법, 모든 전제는 몇 천 년 기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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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15
    Dec 2020
    01:43

    [철학] 『권력에의 의지』 : 이전 철학에 대한 니체의 비판

    406. 우리는, 철학자에 관해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었던 몇몇 미신에서 탈피하자! 407. 철학자들은 가상, 변전, 고통, 죽음, 신체적인 것, 감관, 운명이나 부자유, 목적 없는 것에 반항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1.절대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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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5
    Dec 2020
    00:30

    [철학] 『권력에의 의지』 : 니힐리즘

    1. 생존의 지금까지의 가치 해석의 귀결로서의 니힐리즘. 2. 니힐리즘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고의 여러 가치가 그 가치를 박탈한다는 것. 목표가 결여되어 있다. <무엇 때문에?>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3. 철저한 니힐리즘이란, 승인 받고 있는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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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2
    Dec 2020
    13:47

    [철학] 『권력에의 의지』 : 헌사·머리말

    권력에의 의지 모든 가치의 가치 전환의 실험 세계는 무한히 해석 가능하다. 모든 해석이, 생장의 징후이거나 몰락의 징후인 것이다. 통일 일원론은 타성(惰性)의 욕구이며, 해석의 다수성이야말로 힘의 징후이다. 세계의 불안하고 혼미한 성격을 부인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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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08
    Dec 2020
    18:58

    [철학]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생물정치·생물정치학·생명관리정치의 탄생

    (...) 군주가 생사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가 사람들을 죽게 할 수도 살게 내버려둘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중략) 결국 그들이 살 권리와 죽을 권리를 갖는 것은 전적으로 군주에게 달려 있다. (중략) 그러니까 삶과 죽음의 권리란 결국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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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
    Nov 2020
    21:54

    [철학] 마르크스·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헤겔 철학과 청년헤겔학파에 대한 비판

    (...) 사람들은 지금까지 항상 자신들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형성해 왔다. 사람들은 신이나 정상적 인간 등에 대한 자신들의 관념에다 자신들의 관계를 합치시켜 왔다. 인간 두뇌의 산물들은 벌써 인간들이 만만하게 다룰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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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04
    Nov 2020
    03:21

    [철학] 『천 개의 고원』 : 책 · 예술 · 언표행위 · 기관 없는 몸체

    (...)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짜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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