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우리가 인류의 운명을 다시 한 번 계급의 개념으로 사유하고자 한다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 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planertaria) 소시민 계급 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소시민 계급은 이 세계의 상속자이고 인류가 허무주의를 이기고 살아 남은 형태다. (...)
엄밀한 정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파시즘과 나찌즘은 극복된 것이 아니며 우리는 여전히 그 영향 하에서 살고 있다. 물론 파시즘과 나찌즘은 시민적 위대함에 대한 망상으로 움직이는 잘못된 민중적 정체성에 여전히 사로잡힌 국민국가적 소시민 계급을 대표했다. 반면 행성적인 소시민계층은 그러한 망상과는 일찍이 결별하고 식별가능한 어떤 사회적 정체성도 거부하는 플롤레타리아적 태도를 전유하고 있다. 소시민계급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이 그것을 완고히 고수하는 것 같았을 때 보였던 바로 그와 같은 몸직으로 폐기하고 있다. 그 계급은 오직 비고유한 것과 비진정한 것만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에 고유할 수도 있었을 담화의 이념도 거부한다. 이 지구에 차례로 거주했던 민중들과 세대들에게 참과 거짓을 구성했던 것, 언어상의 차이, 방언상의 차이, 생활 방식과 성격의 차이, 관습상의 차이, 심지어는 개별 인간의 신체적 특징까지도. 이러한 것이 소시민 계급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도, 어떤 표현과 소통상의 가치도 갖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 실존의 부조리함은 허무주의라는 지하층에서 상속 받은 것인데 그 사이에 너무도 허무해져서 모든 파토스를 상실하였고 지상으로 아노자마자 매일의 볼거리로 변형되었다. (...) 소시민 계급의 모순은 그광고에서 자신을 기만하는 그 상품을 아직도 찾고 있다는 데 있으며 실제로는 고유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정체성을 승산 없어 보이는 데도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고집한다는 데 있다. (...) 주지해야 할 사실은 소시민적 실존의 무의미함이 모든 광고도 그 앞에서는 실패하고 마는 궁극적인 무의미함, 즉 죽음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소시민은 죽음 속에서 개체성의 궁극적인 박탈, 개체성의 좌절에 직면한다. (...)
이것은 인류가 자신의 멸망으로 치닫고 있을 때 아마도 행성적인 소시민 계급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또한 소시민 계급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놓쳐서는 안 될 인류역사상 전대미문의 기회를 나타낸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인간들이 이미 비고유하고 무의미한 개체성의 형상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계속 찾는 대신 그러한 것으로서 이러한 비고유성에 귀속되는 데 성공한다면, 또한 고유한 '이렇게 존재함'을 어떤 정체성과 개별 속성이 아니라 정체성 없는 특이성, 어떤 공통적인, 전적으로 유일한 '그 이렇게'로 존재하며, 자신들의 특이한 외부성과 자신들의 얼굴로 존재할 수 있다면, 인류는 최초로 주체도 전체도 없는 공동체에 들어서게 되며, 소통 될 수 없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어떤 소통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신행성적 인류의 특징들 중에서 그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것을 꼽아볼 것, 사악한 미디어적 홍보성을, 스스로만을 전달하는 완전한 외부성과 분리하는 얇은 가림막을 제거할 것, 이것이 우리 세대의 정치적 과업을 이룬다. (...)
- 『도래하는 공동체』(조르조 아감벤 · 꾸리에 · 2014년) p.8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