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권력에의 의지』 : 자연에 있어서의 권력에의 의지

by 이우 posted Dec 15, 2020 Views 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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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8.
  지금까지 실현된 세계 해석 가운데 현재로서는 기계론적 세계 해석이 승리를 거두고 전면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분명히 이 세계 해석은 스스로의 입장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으며 또한 기계론적 절차의 도움을 빌어 쟁취해 두지 않았더라면 진보나 성공은 없었으리라고 어떠한 과학도 은근히 믿고 있다. 누구나가 이 절차를 알고 있다. 즉 <이성>이나 <목적>을 가능한 배제하고 소요되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음을 나타내며 식물이나 노른자의 <운명 속에 있는 외견상의 의도>도 역시 압(壓)과 충돌로 환원되었다면 노골적으로 심술궂은 웃음을 낄낄대고 웃어도 좋을 것이다. 요컨대이와 같이 진면목인 사항에 있어서도 농담투의 표현이 허용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우매한 원리에도 마음으로부터 굴복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 속에 있는 선발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서야말로 마치 이 이론이 스스로는 결정적인 결함이 될지도 모르는 어떤 결함을 갖고 있기라도 한 양 예감, 근심이 인정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걸 수 없는 곤혹에 빠져 있을 때 치명적이 되는 저 결함이다. 압(壓)과 충돌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원격 작용은 모면할 수 없다. 사람은 설명할 수 있다는 것, 그 일에 대한 신념을 상실해 버리고 가능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기술이라고 <공허한 공간>을 부인하며 원자라는 작은 덩어리를 끄집어내오는 역학적 세계 해석이 이윽고는 물리학자를 지배하기에 이를 것이라고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때 힘(Dynamis)에 어떤 내적 특질이 주어지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619.
  <힘(Kraft)>이라는 우쭐한 개념은, 그것으로 현대의 물리학자가 신과 세계를 창조한 것인데, 여전히 보완될 필요가 있다. 즉, 내가 <권력에의 의지>로서, 바꿔 말하면 권력을 표명하려는 혹은 권력을 행사하고 실행하려는 물리지 않는 욕망으로서 창조적 충동 따위로서 특정지워지는 하나의 내적 의지가 그것에 돌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학자는 <원격작용>을 그 원리에서 제거할 수 없다. 반발력 혹은 견인력도 도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모든 운동, 현상, 법칙은 내면적 사건의 증후로서만 포착되며 이 목적을 위하여 인간과의 유츄가 이용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동물에 있어서는 유기적 생명의 모든 기능을 이 유일한 원천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일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620.
  일찌기 이미 힘이 입증된 적이 있었을까? 아니다. 입증된 것은 결과이며 이것이 완전히 낯선 언어에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뒤를 쫓아 일어나는 규제적인 것에 길들여지고 말았으므로 거기에 있는 불가사의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증략)

  627.
  순수하게 기계적인 의미에서의 <견인>과 <반발>이란 완전한 허구이다. 즉 빈말이다. 우리는 의도라는 것 없이 견인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떤 사태를 정복하거나 그 권력에 대하여 몸을 지키고 그것을 되찌르는 의지, 우리가 이해하는 점은 이것이다. 즉 이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하나의 해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중략)

  631.
  어떤 현상들이 불변으로 잇달아 발생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은 <법칙>이 아니라 둘 혹은 그이상의 여러 힘 사이에서의 권력관계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불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동일한 힘은 어떤 다른 힘이기도 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상속관계가 아니라 삽입(相入)관계, 서로 잇달아 일어나는 개개의 계기가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제약하는 것이 아닌 과정이다.
  행동을 행동하는 자로부터, 시건을 그 발생시키는 자로부터, 과정을 과정이 아니라 계속 지속되고 있는 어떤 것, 실체, 사물, 물체, 영혼 따위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은, 사건을 존재하는 것의, 존속하는 것의 일종의 전위(轉位)나 전이(轉移)로서 포착하는 실험이다. 이낡은 신화야말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신앙이 언어적·문법적 기능 속에서 확고한 형식을 발견한 후에 이 신앙을 확립한 것이다. (중략)

  634.
  기계론의 비판. 우리는 여기서는 <필연성>과 <법칙>이라는 두 가지 통속적 개념을 멀리한다. 전자는 허위의 강제를, 후자는 허위의 자유를 세계 속으로 넣어 놓기 때문이다. <사물>은 규제적으로 행동하거나 규칙에 따라 행동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물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허구이다. 마찬가지로 사물은 필연성의 강제 하에서 행동하는 일도 없다. 여기서는 복종이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는 점, 있는 그대로의 강함을 가지며 있는 그대로의 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 이것은 복종이라든가 규칙이라든가 강제라든가의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항의 정도와 압도하는 권력의 정도, 모든 사건에 즈음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점이다. 우리가 산정(算定)을 평소에 사용할 수 있도록 이 사건을 공식이나 법칙으로 표현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만큼 유리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를 복종심 있는 것으로 허구했다고 하여 우리가 ,도덕성>을 세계 속으로 넣어둔 셈이 되지는 않는다. 법칙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권력이 어느 순간에라도 스스로의 최후의 귀결을 이끌어내고 있는 까닭이다. 다른 모양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산정의 가능성은 바로 이 점에 기초해 있다.
  권력량은 그것이 행동을 유발하는 작용과 그것이 저항하는 작용에 의하여 표시되고 있다. 행동의 유발도, 저항도 하지 않는 무관심은 그것 자체로는 사고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량은 본질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폭력에 대하여 자기 몸을 방위하는 하나의 의지이다. 그것이 자기보존은 아니다. 모든 원자가 모든 존재 속으로 행동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며, 권력의지의 이 조사(照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원자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만다. 이 때문에 나는 그것을 <권력에의 의지> 량(量)이라고 이름짓는다. 아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기계적 질서 그 자체를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 없이는 이 질서로부터 회피하여 사고할 수가 없는 성격인 것이다. 작용으로 구성되는 이 세게를 가시적인 세계 속으로 번역해 주는 것이 <운동>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무언가가 운동시켜지고 있다. (중략) 

  715.
  <가치>라는 관점은 생성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비교적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복잡한 형성물에 관한 보존·상승의 조건에 관한 관점이다. 지속성 있는 어떤 궁극적 단일체도, 어떠한 원자도, 단자(單子, Monade)도 없다. 여기에서도 또한 존재하는 것은 우리에 의하여 비로소 넣어 놓여진 것이다. 실제적이고 유용한 원근법적인 여러 근거로부터. <지배형태>. 지배자의 영역은 끊임없이 계속 생장하고 있다. 혹은 상황(영양)의 유리 또는 불리에 의해 주기적으로 감소하고 증대하기를 계속한다. <가치>는 본질적으로 이 지배적 중심의 증대 혹은 감소에 대한 관점이다. 이 중심은 어쨌든 <다수성>이다. 그러나 이 <단일성>은 생성의 본성 가운데에는 전혀 현존하고 있지 않다.
  언어라는 표현 수단은 <생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될 수 없다. <불변>이라든가 <사물>이라든가 하는 따위로 구성되는 조잡한 세계를 부단히 세운다는 것은, 우리의 내어던져 버릴 수 없는 보존 욕구에 속해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는 우리는 원자나 단자에 관하여 이야기해도 좋다. 게다가 극미한 세계야말로 가장 지속적이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어떠한 의지도 없다. 있는 것은, 부단히 그 권력을 증대 혹은 상실하는 의지의 점재(點在, Willens-Punktation)이다.

- 니체  『권력에의 의지』(청하. 1992년) <제4권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 <제2장 자연에 있어서의 권력에의 의지> p.37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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