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푸코 『지식의 고고학』 : 언표(言表)의 정의· 언어행위 분석

by 이우 posted May 28, 2020 Views 1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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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물학적 분류표는 언표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구(語句)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계통학적 나무, 회계 장부, 대차대조표들은 언표들이다. 어구들은 어디에 있는가? 더 나아갈 수 있다. n차의 방정식, 굴절법칙에 관한 대수식언표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매우 엄밀한 문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연언어에 있어 수락가능한 또는 해석가능한 어구를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동일한 규준은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그래프, 성장곡선, 나이 피라밋, 분배구름언표들을 형성한다. 그들이 동반할 수 있는 어구들이란 그들의 해석이거나 주석일 뿐이다. 그들과 등가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증거로 많은 경우 무한한 수의 어구만이 이러한 종류의 언표 속에서 명확히 공식화된 모든 요소들에 등가적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아 어구의 문법적인 특성에 의해 언표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 가장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경우, 어떤 언어표현의 행위―<담화행위(談話行爲, speech act)>, 영국의 분석가들이 말하는 <비표현적 담화행위(acte illocutoire)>와 같은 무엇*―를 확인하고 고립시킬 수 있을 때 언표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는 이 말에 의해 말하는 것(높은 목소리로 또는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쓰는 것(손으로 또는 기계로)과 같은 신체적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또 나아가 이 말은 말하고 있는 개인의 의도(그가 설득시키려 한다는, 복종시키고자 욕구한다는, 어떤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하고자 한다는 또는 그의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는 사실)를, 그가 말한 것의 결과(그가 설득시켰다는 또는 불신을 불러일으켰다는, 사람들이 그를 들어주었다는 그리고 그의 명령들이 수행되었다는, 그의 기조가 받아들여졌다는)를, 그 출현에 있어서의 언어표현 자체에 의해 실행된 조작(약속, 명령, 선언, 계약, 참여, 시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비표현적 담화행위는 언표의 순간 이전(저자의 사유 속에서 또는 그의 의도들의 놀이 속에서의)에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표 자체의 이후, 언표가 그의 뒤에 남겨놓은 주름살 속에서 생산될 수 있는 것, 언표가 야기한 결과들이 아니다. 그것은 언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표들의 개별화가 언어표현적 행위들의 지표화와 동일한 규준들을 가진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서로에 의해 그리고 정확한 상호성에 내에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상관관계는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즉 하나의 담화행위를 살행하기 위해서는 종종 하나 이상의 언표가 필요하다. 맹세, 기도, 약속, 증명은 대부분의 경우 구분적인 언어표현들이나 분리된 어구들을 요구한다. 이들 각자에 대해, 그들이 모두 유일하고 동일한 비표현적 담화 행위에 의해 관통된다는 구실로, 언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이 행위 자체는 언표들의 계열을 따라 계속 유일한 것으로 존속되지는 못하리라 말할 수 있으리라. 나아가 기도 속에는 구분적인 언표들에 의해 공식화된 요구들과 같이 제한된, 계기적인, 병치된 기도의 행위들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약속 속에는 분리된 언표들에 있어서의 개별가능한 계열만큼의 참여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러한 대답에 우리는 만족할 수 없다.

  우선 언어표현의 행위는 언표를 정의하는 데에 소용이 되지 않으며, 거꾸로 그것이 언표에 의해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에―물론 이 대답 또한 문제를 일으키며 개별화의 규준들을 요구한다. 또 어떤 비표현적 담화행위들은 다수의 언표들이, 각자가 그에 부합하는 자리에서 연결되엇을 때에만 그들의 단일한 통일성에 있어 완성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들은 이 언표들의 계열 또는 총화에 의해서, 그들의 필연적인 병치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들이 전적으로 그들 중 최소한의 것 속에도 현존해 있다고, 그 각자와 함께 그들은 새로워진다고 생각할 수 없다. 여기에서도 역시 언표들의 집합과 비표현적 담화행위의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의 관계를 수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언표들을 개별화하고자 할 때, 우리는 논리학으로부터, 문법으로부터, 그리고 언어분석으로부터 빌려온 모델들 중 어느 것도 아무런 유보없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경우에 있어, 우리는 제기된 규준들이 너무 많고 무겁다는 것을, 또 그들이 언표가 지니는 모든 외연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을, 종종 언표가 잘 기술된 형태를 취한다 해도, 그리고 그 형태들 안에서 정확히 정돈된다 해도 그것이 그들에 복종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합법적인 명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언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어구들을 확인할 수 없는 곳에서 언표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담화행위들을 가지고서 식별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언표들을 발견한다. 마치 언표는 보다 섬세하고, 규정성을 덜 담지하고 있으며, 보다 덜 강하게 구조화되어 있고, 이 모든 것들(명제, 어구, 담화행위)보다 더 편재적인 듯이, 마치 그 특성들이 보다 적은 수이고 결합하기에 보다 용이한 듯이, 그러나 바로 그렇게 때문에 그것은 기술(記述)이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는 어떤 수준에 그를 위치시킬 것인가, 어떤 방향에 의해 그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이상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상기시킨 모든 분석들을 위한 버팀목 또는 우연적인 실체일 뿐이다. 논리학적 분석에 있어 그것은 명제의 구조를 추상하고 정의했을 때 남는 것이다. 문법적인 분석에 있어 그것은 그 안에서 어구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또는 확인할 수 없는 언어적 요소들의 계열이다. 언어행위들에 대한 분석에 있어, 그것은 모든 기술적(記述的) 접근과의 관계에서, 그것은 잔여적인 요소, 순수하고 단순한 사실, 비관여적인 물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언표는 고유한 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언어에 관한 모든 분석들에 대해 이 분석들이 그들의 대상영역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 출발점을 이루는 외재적인 물질인 한, 적절한 정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기호들의, 그림들의, 그래프들의, 또는 흔적들의 어떤 계열도, 그의 조직화 또는 개연성이 무엇이든, 하나의 언표를 구성하기에 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문제되고 있는 것이 어구인가의 여부를 말하는 것은 문법에, 명제적인 형태를 포함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정의하는 것은 논리학에, 그를 관통할 수 있는 언어행위는 무엇인가를 정확히 하는 것은 언어분석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이 경우 병치된 여러 기호들이 존재하기만 하면, 또는 하나의 기호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언표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될 것이다. 언표의 문턱은 기호들의 존재의 문턱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도 역시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며 기호들의 존재와 같은 표현에 주어져야 하는 의미는 보다 정교화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기호들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언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호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존재한다(il y a)>에 어떤 단일한 지위를 부여해야 할까?

  왜냐하면 언표들이 하나의 랑그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그들의 대립적 특성들**에 의해 정의된 바의 기호들의 조합과 그들의 사용규칙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결국 랑그는 결코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의 총체성 하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차적인 방식으로만, 그리고 그를 대상으로서 취하는 하나의 기술을 이용해서만 랑그일 수 있는 것이다. 랑그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기호들은 언표들에 부과되는, 그리고 그들을 내부로부터 규제하는 형태들이다. 언표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랑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언표도 랑그가 존재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어떤 언표의 자리에서든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럼으로써 랑그를 수정하지 않을 어떤 다른 언표를 가질 수 있다. 랑그는 가능한 언표들을 위한 구성의 체계로서 존재할 뿐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 현실적인 언표들의 집합에 의거해 얻어진 다소간 철저한 기술(記述)로사만 존재한다. 랑그언표는 존재함의 동일한 수준에 있지 않다. 그리고 랑그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언표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었을 경우, 그들이 시간상의 어떤 순간에서,그리고 공간상의 어떤 점에서 출발했을 경우, 그들을 발음한 목소리와 그들을 만들어낸 몸짓이 그들에게 물질적인 실존의 차원을 부여했을 경우, 한 랑그의 기호들이 한 언표를 구성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내가 우연히 언표가 아닌 것으로의 예로서, 종이 위에 적은 알파벳 문자들은, 책을 인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인쇄활자들은―그리고 우리는 공간과 부피를 가지고 있는 그들의 물질성을 부정할 수가 없다―펼쳐진, 가시적인, 제시가능한 이 깋호들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서 언표로서 간주될 수 있는가?

  그러나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 두 예(인쇄활자들나에 의해 쓰여진 기호들)는 완전히 중첩되지 않는다. 내가 손 안에 한 움큼 쥘 수 있는 인쇄활자들, 또는 타자기에 장치되어 있는 문자판 위의 알파벳들은 언표를 구성하지 않는다. 이들은 기껏해야 그를 가지고서 언표들을 쓸 수 있는 도구들일 뿐이다. 역으로 내가 종이 위에 우연히 쓴 문자들, 그들이 나의 정신에 떠오른대로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무질서 속에서 하나의 언표를 구성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종이 위에 우연히 쓴 문자들, 이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존재를 형성하는가? 그들이 우발적인 방식으로 선택된 문자들의 표, 돌발적인 일 외에 어떤 다른 법칙들도 가지지 않는 알파벳의 계열의 아니라면? 마찬가지 방식으로, 통계학자가 사용하려고 하는 아무렇게나 써 있는 숫자판은 어떠한 통사론적 구조에 의해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일련의 수적(數的) 상징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표이다. 계기적인 산출들의 개연성을 증가시킬 모든 것을 제거하는 과정들에 의해 획득된 암호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는 언표. 다시 예를 들어보자. 타자기의 문자판은 언표가 아니다. 그러나 타자연습을용 책자에 열거되어 있는 A, Z, E, R, T라는 일련의 문자 자체는 프랑스 기계들에 의해 채책된 알파벳상의 언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사 하나의 일련의 부정적인 결과들에 직명하게 된다. 하나의 언표를 구성하기 위해 규칙적인 언어적 구성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표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요소들의 물질적인 현실화만으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기호들의 출현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언표는 랑그와 동일한 양식으로도 존재하지 않으며, 지각에 주어진 어떤 대상들과 동일한 양식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언표어구, 명제, 또는 담화행위의 동일한 종류의 단위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이들과 동일한 규준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표는 또한 자신의 한계와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 물질적 대상들과 같은 단위도 아니다. 언표란 완전히 언어학적이지도 그렇다고 배타적으로 물질적이지도 않은, 그의 단일한 존재양식에 있어, 우리가 어구, 명제, 언어행위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말할 수 있기 위해, 또 어구가 참인지, 수락가능한지, 해석가능한지, 그 명제가 합법적이며 잘 공식화되었는지, 그 행위가 요구에 부합하는지 또 훌륭히 수행되었는지의 여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무엇인 것이다. 언표 속에서 길게 또는 짧게, 강하게 또는 약하게 구조화된, 그러나 다른 것들처럼 논리학적, 문법적, 비수행적 담화행위 속에서 취해진 단위를 찾아서는 안 된다. 언표란 결국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의 한 요소, 어떤 분석수준에 있어서 지표화 가능한 한 단위이기보다는, 이 다양한 단위들과의 관계 하에서 임의적으로 기능하는, 그리고 일련의 기호들에 관하여, 그들이 거기에 현존하는가의 여부를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기능인 것이다.

  따라서 언표란 구조, 즉 가변적인 요소들 사이의, 아마도 무한히 많을 구체적인 모델들을 승인하는 관계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고유하게 기호에 속하는, 그들이 의미를 가지는가의 여부를, 어떤 규칙들에 따라 그들이 계기하고 병치되는지를, 그들이 무엇에 대한 기호인지를, 어떤 종류의 행위가 그들의 말해진, 또는 씌여진 언어표현에 의해 실행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의 기능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표에 있어서의 통일성에 대한 구조적인 규준들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즉 언표란 그 자체로서는 결코 단위가 아니며, 구조들의 그리고 가능한 단위들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그들을 구체적인 내용들과 함께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게 하는 하나의 기능인 것이다. 이제 그 자체로서의 즉 그의 실행 속에서, 그의 조건들 속에서, 그를 조절하는 규칙들과 그것이 그 안에서 실행되는 장(場) 속에서 기술되어야 할 것은 이 기능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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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stin과 Searle에 의해 개발된 개념. 우리가 말을 할 때 우리는 우선 <표현적 행위>를 하게 된다. 즉 입으로 소릴르 내거나 손으로 글을 쓴다. 다음 우리는 <비표현적 행위>를 하게 된다. 즉 우리가 발(發)하는 말을 가지고서 앿고을 하거나, 명령을 하거나, 진술을 하거나, 물어보거나, 경고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표현달성적 행위>를 한다. 즉 우리의 말이 어떤 일정한 결과를 야기시킨다.

  **즉 구조주의 언아학에서 말하는 언어의 특성.


  - 『지식의 고고학』 (지은이: 미셸 푸코 · 옮긴이: 이정우 · 민음사 · 1992년 · 원제 : L'Archeologie du Savoir, 1969년) p.12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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