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푸코 『지식의 고고학』 : 언설·담론·에피스테메(episteme)

by 이우 posted May 23, 2020 Views 122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책_지식의고고학.jpg


  (...) 19세기의 정신병리학이 관련되는영역에 있어, 일찍부터 경범죄의 범주에 속하는 일련의 대상들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살인, 그리고 자살, 치정사건, 성적인 경범죄, 여러 종류의 절도, 부랑죄, 그리고 그 후 이들을 통해서 상속권, 신경증을 야기실 수 있는 환경, 공격적 또는 자해적 행위, 패륜, 범죄 충동, 피암시성 등. 여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이 어떤 발견의 결과들이라고 말한다면 부절절할 것이리라. 어느 날 정신의학자에 의해 행해진 범죄적 행위와 병리학적 행동 사이의 유사성의 해독 또는 어떤 비행청소년들에 있어서의 소외의 교전적인 기호들의 현존에 대한 발견, 이러한 사실들은 실제적 탐구의 저편에 놓여 있다. 결국 문제는 무엇이 그들을 가능하게 했는가, 그리고 이 뱔견들이 어떻게 그들을 다시 취하고, 수정하고, 교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제거해 버린 다른 발견들을 낳았는가를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대상들의 출현들을 19세기 부르주아 사회에 고유한 규범의, 강화된 경찰적 내지 형법적 구획의, 범죄정의의 새로운 코드 수립의, 정상참작의 도입과 사용의, 범죄성의 증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은 결과적으로 드러난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만으로는 정신의학적 언설을 위한 대상들을 형성할 수 없었다. 이 수준에서의 기술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이번에는 우리가 탐구하는 것의 이편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사회(유럽)에 있어 그리고 주어진 시대에 있어, 경범죄가 심리학화되고 병리학화되었다면, 위반적인 행위가 지식의 일련의 대상들을 낳았다면, 이는 정신의학적 언설 속에 일정한 관계들의 집합*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형법적인 범주들, 경감된 책임성의 정도와 정도와 같이 특이화의 평면들과 심리학적 특성화의 평면들(재능, 태도, 발전과 퇴화의 정도, 환경에의 반응방식, 획득된 또는 본유의 또는 유전된 성격의 유형) 사이의 관계, 의학적 결정의 심급과 사법적 결정의 심급 사이의 관계(사실상 매우 복잡한 관계, 왜냐하면 의학적인 결정이 범죄 및 그의 상황과 그것이 받을 만한 비준의 정의를 위해 사법적 심급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범죄의 생성에 대한 분석과 연루된 책임성의 평가는 자신을 위해 냠겨두었기 때문이다), 사법적 심문, 경찰의 교육, 법률적 정보의 조사와 모든 도구에 의해 구성된 여과장치 및 의학적 질문서, 임상적 검사, 선행조건들의 탐구, 전기적 이야기들에 의해 구성된 여과장치 사이의 관계, 개인들의 행동에 있어서서의 가족적, 성적, 형법적 규범들과 병리학적 징후들의 표 및 그 징후들이 보여주는 병들 사잉의 관계, 병원적인 환경에 있어서의 치료적 제한(그의 특수한 문턱들, 치료의 규준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제한하는 방식)과 감옥에 있어서의 형벌적 제한(그의 징벌과 교육의 체계, 좋은 행동의, 개량의, 석방의 기준) 사이의 관계, 정신의학적 언설을 담고 있는 작품들에 있어, 다양한 대상들의 집합의 형성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이 관계들인 것이다. (중략) 이로부터 몇 가지의 주의점과 결과들이 따라나온다.

  1. 어떤 언설의 대상이 나타나기 위한 조건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상이한 말들을 할 수 있기 위한 역사적 조건들, 그것이 다른 대상들과 친족관계를 맺게 되는 영역 속에 새겨질 수 있기 위한, 그들과 함께 유사성, 이웃관계, 소원함, 차이, 변환의 관계를 수립할 수 있기 위한 조건들은 다양하며 무겁다. 즉 사람들은 아무 시대에나ㅡ 무엇에 관해서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무엇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또한 새로운 대상들이 밝혀지기 위해 그리고 겨우 그들의 최초의 명료함을 얻기 위해 눈을 열고, 주의를 기울이고, 의식을 긴장시키는 것만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려움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를 어떤 장애물―권력이 배타적으로 그의 발견을 은폐시키고, 방해하고, 막아버리는, 사물들 자체의 말 없는 고집 또는 자명성의 순수함을 은폐시키는―에 갖다 붙일 필요는 없다. 대상은, 가장자리에서, 그를 해방시킬, 그를 가시적인 것 속에 구현시킬, 객관성에 대해 수다를 떨 질서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빛의 최초의 경계에 존재하는 어떤 장애물에 사로잡힌 채 미리 현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들의 복잡한 실증적인 조건들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다.

  2. 이 관계들은 제도들, 경제적 내지 사회적 관계들, 행동의 형태들, 규범의 체계들, 기술(技術)들, 분류의 유형들, 특성화의 양태들 사이에 수립된다. 그리고 이 관계들은 대상들 속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대상을 분석할 때 펼쳐지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은 대상의 흔적, 내재적 합리성, 사람들이 그를 개념의 다양성 속에서 사유할 때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관념적 잎맥을 그리지 않는다. 이 관계들은 그의 내적인 구성이 아니라 그들이 나타나도록, 다른 대상들과 병치되도록, 그들과의 관계하에서 자리잡도록, 그의 차이 및 환원불가능성과 경우에 따라서는 이질성을 자리잡도록, 요컨대 외재성의 장(場) 속에 자리잡도록 해주는 것을 정의하는 것이다.

  3. 이 관계들은 우선 우리가 <일차적인> 관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언설과 언설들의 대상들에 제도들, 기술들, 사회적 형태들 사이에서 기술될 수 있는 관계들과 구분된다. 결국, 쉽게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 가족과 19세기의 법률적 심급 내지 범주들의 기능 사이에는 우리가 그들 자체로서 분석할 수 있는 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상들을 형성하는 관계들에 항상 중첩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일차적인 수준에 부과할 수 있는 독립성의 관계들이 언설의 대상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관계맺음 속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아가 언설 자체 내에 공식화되어 있는 이차적인 관계도 구분해야 한다. 예컨대 19세기의 정신의학자들이 가족과 밤죄성 사이에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실제적인 의존성의 놀이를 재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의학적 언설의 대상들을 가능케하고 지지해주는 관게들의 놀이 역시 재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가능한 기술(記述)들의 분절된 공간이 열리게 된다. 실제적 또는 일차적 관계들의 체계, 이차적 또는 반성적 관계들의 체계, 언설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들의 체계. 문제는 이 마지막 관계들을 그리고 다른 두 관계들과 이 관계들 사이의 놀이의 특이성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4. 언설적 관계들은 언설에 내재적이지 않다. 그들 관계들은 개념들이나 단어들을 연결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구들이나 명제들 사이에 연역적 또는 수학적 건축물을 수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설을 제한하는 또는 그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그로 하여금, 어떤 상황하에서, 어떤 것들을 언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언설에 외재적인 관계들도 아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언설의 극한 언설과 비언설의 경계선에 존재한다. 그들은 언설에 그들이 말할 수 있는 대상들을 제공한다. 아니면 차라리(왜냐하면 제공이라는 이 이마쥬는 한편으로 대상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언설이 형성된다는 것을 가장하는 것이기에 때문에) 그들은 언설이 이러저러한 대상들을 말할 수 있기 위해, 그들을 다루고, 이름짓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설명할 수 있기 위해 실행해야 할 관계의 다발을 결정한다. 이 관계들은 언설이 사용하는 랑그가 아니라, 언설이 그 안에서 펼쳐지는 상황들이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언설 그 자체를 특성화하는 것이다.**

    이제 분석을 마무리하고 그것이 어떤 점을 성취했는지, 마차가지로 그것이 최초의 기획을 어떤 점에서 수행했는지 측정해 보자. 어떤 집합의 형태들―완고한 그러나 혼란된 방식으로, <그> 정신병리학, <그> 경제학, <그> 문법, <그> 의학으로서 주어지는―에 대해, 우리는 어떤 종류의 통일성이 그들을구성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들은 단일한 작품으로부터, 계기적인 이론들로부터, 일부는 버려지고 일부는 전통에 의해 보존되고 나머지 일부는 망각에 의해 잊혀졌다가 다시 발견된 개념들이나 테마들로부터 사후에 행해진 재구성일 뿐인가? 그들은 단지 일련의 연결된 시도일 뿐인가?

  우리는 언설의 통일성을 대상들자체의 측면에서, 그들의 분배, 그들의 차이들의 놀이, 그들의 근접성과 원격성의 측면에서―요컨대 말하는 주체에게 주저진 것의 측면에서 찾았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언설적 실천 그 자체를 특정짓는 관계맺음에 도달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형태나 윤곽이 아니라 한 실천에 내재적인 그리고 그들 그의 특이성 속에서 정의하는 규칙들의 집합을 발견했다. 다른 한편 우리는 <그> 정신병리학과 같은 통일성을 지표로 사용했다. 만일 그의 탄생일과 정확한 영역을 고정시키고자 했다면, 의심할 바 없이 말의 출현을 되찾고 그것이 어떤 유형의 분석에 적용되는지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경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심리학의 배분이 어떻게 수립되는지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드러낸 것은 미상불 같은 날짜도, 같은 표면도, 같은 분절도 가지지 않는, 그러나 그에 대해 정신병리학이란 단지 반성적인, 이차적인, 분류적인 명칭에 지나지 않을 대상들의 집합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유형의 통일성이다. 마지막으로 정신병리학은 끝없는 변화의 도상에 있는, 발견들과 비판들 그리고 수정된 오류들이 끝없이 새겨지는 하나의 과목으로서 주어진다. 우리가 정의했던 형성의 체계는 안정된 것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자. 일정한 것으로 유지되는 것은 대상들이 아니며, 나아가 그들이 형성하는 영역도 아니다. 그들의 출현점이나 특성화 양식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그를 통해 대상들이 나타날 수 있는, 제한될 수 있는, 분석되고 특이화될 수 있는 표면들의 관계맺음인 것이다.

  이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그에 이론을 부여하고자 했던 기술(記述)들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언설을 통해 일종의 지시체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줄곧 들어왔던 예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자 했던 것은 한 시대에 있어서 광인이 누구였는가, 그의 광기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나아가 그의 말썽거리가 오늘날 우리가 친숙해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인가의 여부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마법사들이 무시된, 박해받았던 광인들이었는가 또는 다른 심급에 있어, 신비적이거나 미학적인 경험이 부당하게 의인화되지 않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우리는 광기 자체가 무엇이었던가를, 그것을 우선은 원초적인, 기초적인, 귀먹은, 겨우 분절된 어떤 경험에 주어진 대로, 다음에는 언설들에 대해 또 그들의 조작들의 비스듬한, 종종 교활한 놀이에 의해 조작된(변형된, 왜곡된, 아마도 수입된) 대로 재구성하고자 하지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지시체에 대한 그와 같은 역사는 가능하다. 우리는 텍스트로부터 이러한 <전(前) 언설적인> 경험들을 해방시키고 정제헤 내기 위한 노력을 처음부터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언설을 중성화시키거나, 그로부터 다른 사물들의 기호를 이끌어내거나, 그의 저편에서 말 없이 머무는 것과 결합하기 위해 그의 두께를 관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를 그의 일관성 안에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에 고유한 복잡성 속에서 나타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진정 <사물들>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들은 <탈-현재화(脫-現在化)>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풍부한, 무거운, 직접적인 충만성―우리가 그로부터 오류와 망각, 환상, 무지 또는 믿음과 전통의 관성 또는 욕구와 아마도 무의식에 의해서만 떨어질 수 있는 언설의 원초적인 법칙을 만들어내는 데,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 데 익숙해 있는―을 피하고자 한다. 언설에 앞서는 <사물들>의 수수께끼 같은 보물을 오직 언설 내에서만 소묘되는 대상들의 규칙적인 형성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사물들의 바탕을 참조하지 않고서, 그들을 언설의 대상으로서 형성하도록 해주는 그리고 그들을 그들의 역사적 출현의 조건들을 구성하는 규칙들의 집합에 관련시킴으로써 이 대상들을 정의하고자 한다. 그리고 언설적 대상들의 역사―그들을 시원적인 토양의 공통된 깊이 속으로 박아넣지 않을, 그들의 분산을 지배하는 규칙성들의 연쇄를 펼칠―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렇지만 <사물들 자체>의 계기를 생략하는 것이 반드시 의미작용에 대한 언어헉적 분석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한 언설의 대상들의 형성을 기술할 때, 우리가 원한 것은 한 언설적 실천을 특성화하는 관계맺음을 지표화하는 것이다. (...) 


  ..........................

  이러한 관계들의 집합을  『말과 사물』에서는 에피스테메(epicteme)라 불렀다. 푸코가 탐구하는 것은 개인적인 발견들이 아니다. 그 개인적인 발견들을 가능하게 해준, 개인이 그 장(場) 안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잡을 수 있는 관계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이 관계들의 집합은 가시적인 사회적 배경들이 아니다. 그 배경들이 이 관계들의 가시적인 결과들일 뿐이다. 푸코에 있어서는 관계가 실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서게 된다.

  ** 언설 내적이고 자율적인 규칙성이 아니며 동시에 언설 외적인 사회적 상황, 문맥이 아니다. 언설 자체가 실천되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이 실천은 언설과 비언설의 관계를 함축한다. 푸코에 있어 언설과 비언설 간의 인과관계는 없다. 단지 그들간의 관계맺음의 체계가 있을 뿐이다.   



   - 『지식의 고고학』 (지은이: 미셸 푸코 · 옮긴이: 이정우 · 민음사 · 1992년 · 원제 : L'Archeologie du Savoir, 1969년) p.74~78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