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자본론』 : 상품과 노동의 이중성·분업·사용가치와 교환가치·유용노동·labor와 work

by 이우 posted Apr 29, 2020 Views 14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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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물건은 가치가 아니면서도 사용가치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그 물건의 사용성이 노동에 의해서 중개되지 않는 경우에 그러하다. 예를 들면 공기, 처녀지, 자연의 초원이나 야생의 수목 등이 그러하다. 어떤 물건은 상품이 아니면서 유용하고 또 인간노동의 생산물일 수 있다. 자기 노동의 생산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사용가치는 만들기는 하지만 상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는 단순히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 곧 사회적 사용가치를 생산해야 한다. 또 단순히 타인을 위한다고 해서만 되는 것도 아니다. 중세의 농민은 봉건영주를 위하여 공납으로 바칠 곡물을 생산하였고, 승려에게 10분의 1세(稅)로 바칠 곡물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공납으로 바친 곡물이나 10분의 1세(稅)로 바친 곡물은 그것이 타인을 위하여 생산되었다는 것만으로써는 아직 상품으로 되지 않았다.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생산물이 그 사용가치를 사용하는 사람의 손으로 교환을 통하여 이전되어야 한다. 끝으로, 만약 그것이 소용없는 것이라면 거기에 들어 있는 노동은 노동으로써 계산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런 가치도 형성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상품이 우리에게 이중적인 것으로, 곧 사용가치라는 교환가치로 나타났다. 그 후에 노동도 또한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즉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는 경우에는 벌써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 특징들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의 이 이중적 성격은 내가 처음으로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이 점은 경제학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도약점이기 때문에, 여기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두 상품, 예를 들어 1개의 저고리와 10미터의 아마포를 예로 들어보자. 전자의 가치는 후자의 가치의 2배라고 하자. 따라서 10미터의 아아포=W라면, 1개의 저고리=2W이다. 저고리는 특수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이다.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종류의 생산적 활동이 필요하다. 이 활동은 그 목적, 작업방식, 수단 및 결과에 의하여 결정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동―그것의 사용성이 그 생산물의 사용가치로 표현하는노동―을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한다. 이 관점에서는 노동은 언제나 그 유용효과와 관련해서 고찰된다. 저고리와 아마포가 질적으로 다른 사용가치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만들어낸 노동도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곧, 재봉노동직포노동)이다. 만약 이 두 물건이 질적으로 다른 사용가치가 아나리면, 따라서 질적으로 다른 유용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아마도 상품으로서 서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저고리는 저고리와는 교환되지 않으며, 어떤 사용가치가 동일한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일은 없다.

  모든 다양한 사용가치들에는 그만큼 다양한 유용노동들이 대응하는데, 이 유용노동들은 그들이 사회적 분업에서 속하고 있는 유(類)나 속(屬)이나 종(種)이나 변종(變種)에 따라서 분류된다. 이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반대로 상품생산이 사회적 분업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고대 인도의 공동체에는 상품생산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사회적 분업은 존재하고 있었다. 더 가까운 예를 든다면, 어떤 공장에도 노동은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개별적 생산물을 교환하는 것에 의하여 이 분할이 매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립적으로 행하여지고 상호의존하고 있지 않는 사적 활동의 생산물만이 서로 상품으로써 대립한다. 이제 이상에서 말한 것을 요약해 보면, 각 상품의 사용가치에는 유용노동이, 즉 일정한 종류의 합목적적인 생산활동이 들어 있다. 여러 가지 사용가치는, 만약 거기에 질적으로 다른 유용노동이 들어 있지 않다면, 상품으로서 서로 대립할 수 없다. 사회의 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다시 말하면 상품생산자 사회에서는, 개별적 독립생산자들이 상호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여러 가지 유용노동 사이의 이러한 질적 차이는 하나의 복합체계로, 즉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한다.

  저고리로서는 그것을 입는 사람이 재봉사이건 자신이건 또는 재봉사의 고객이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어느 경우에나 저고리는 사용가치로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저고리와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 사이의 관계도 재봉노동이 특수한 직업으로, 즉 사회적 분업의 독립적인 일환으로 되었던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누군가가 전문적인 재봉사로 되기 몇 천년 전부터 재봉일을 하여왔다. 그러나 저고리, 아마포와 같은 천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적 부의 요소들은 언제나 특수한 자연소재를 특수한 욕망에 적응시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활동을 거쳐서 창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노동으로사의 노동은 영원한 자연의 필연성이다. 즉, 그것 없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가 불가능할 것이며, 따라서 인간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저고리, 아마포 등등의 사용가치, 한마디로 말하여 상품체는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 저고리, 아마포 등등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유용노동의 총계를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어떠한 협력도 없이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일정한 물질적 토대뿐이다. 인간은 생산과정에서 오직 자연 자체가 행동하는 것과 같이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소재의 형태를 변경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형태를 변경하는 노동 자체에 있어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력의 사용에 의지한다. 따라서 노동은 그것에 의하여 생산되는 사용가치, 곧 물적 부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 윌리엄 폐티가 말한 바와 같이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고, 토지는 그 어머니이다.** (...)

  더 많은 양의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더 많은 물적 가치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2개의 저고리는 1개의 저고리보다 더 많은 물적 양이다. 2개의 저고리는 두 사람에게 입힐 수 있지만 1개의 저고리는 오직 한 사람에게 입힐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적 부의 양은 증대하는데도 이에 대응하여 하여 동시에 그 가치량은 감소할 수 있다. 생산력은 물론 언제나 유용한 구체적 노동의 생산력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어떤 특수한 생산활동이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목표를 얼마나 잘 달성하는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용노동은 그 생산력의 상승 또는 저하에 비례하여 생산물의 보다 더 풍부한 원천으로 되거나 또는 보다 더 빈약한 원천으로 된다.

  이와 반대로 생산력의 변동은 가치로 표현되고 있는 노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생산력노동의 구체적 유용형태에 속하는 것이므로 노동의 구체적 유용형태가 무시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벌써 노동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동일한 노동은 동일한 길이의 시간에는 그 생산력의 변동과는 관계없이 항상 동일한 크기의 가치량을 창조한다. 그러나 생산력이 변동할 때, 노동은 동일한 길이의 시간에 상이한 양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곧 생산력증대하면 보다 더 많은 사용가치를, 생산력이 감소하면 보다 적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노동의 열매를, 따라서 노동에 의하여 제공되는 사용가치의 양을 증대시키는 생산력의 변동은, 그것이 이 증대된 사용가치 총량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총계를 단축시키는 경우에는, 사용가치 총량의 가치량을 감소시키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로 된다.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는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인간노동, 곧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그것은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모든 노동은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합목적성 형태에서의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

  
  ...........................................

  * "세계의 모든 현상은, 그것이 인간의 손에 의하여 야기되든지 또는 자연의 일반적 법칙에 의하여 야기되든지 간에, 사실상의 창조가 아니고 오직 물질의 형태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결합과 분리,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재생산을 분석할 때에 발견하는 유일한 요소이다. 토지와 공기와 물에서 로 전환되는 때나, 또는 곤충의 분비물인간의 손에 의해서 명주로 전환되는 때나, 또는 몇 개의 금속조각이 결합되어 시계라는 기계가 형성되는 때나 마찬가지로 가치와 부의 재생산이 진행된다."(피에트르 베리[P.Verri], 『경제학에 관한 고찰』(1770년, 초판), 쿠스토디[Custodi] 편,  『이탈리아 경제학 고전집』, 근세편, 제15권, pp21~22).

  **폐티(W. Petty), 『조세공납론』, 런던, 1667년, p.47

 *** "노동만이 모든 상품의 가치를 언제 어디서나 평가하며 비교할 수 있는 최종의 참된 척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담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등량의 노동은 노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노동자 자신에게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노동자는 그의 건강, 체력 및 활동의 정상적 상태에서, 또 그가 가질 수 있는 숙련의 평균 정도에서 항상 그의 휴식, 그의 자유, 그의 행복의 동일한 부분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국부론』, 제1편, 제5장). 한편으로 아담 스미스는 여기서 상품생산에 지출된 노동량에 의한 가치 규정을 노동의 가치에 의한 상품가치의 규정과 혼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등의 노동은 항상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노동이 상품가치로 표현되는 한에 있어서는 노동은 노동력의 지출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나, 이 지출을 그는 오직 휴식과 자유와 행복의 희생으로 묘사하고 있고, 정상적인 생명활동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가 보고 있었던 것은 근대적 임금노동자였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주(註) 9)에 인용된 익명의 필자인 아담 스미스의 선행자가 훨씬 더 적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이 소비품을 제조하는 데 1주일이 걸렸다. ... 그리고 그것과 교환으로 다른 물건이 제공된다면, 그는 그 물건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동일한 노동과 시간을 들이게 하였는가를 계산함으로써, 그 물건이 자기 물건의 적당한 등가물인가를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사실상 일어나는 일은 어떤 사람이 일정한 시간 내에 어떤 물건을 생산하는 데 지출한 노동이 그와 동일한 시간 내에 다른 사람이 다른 물건을 생산하는 데 지출한 노동과 교환되는 것이다."( 금리일반 및 특히 공적 이자에 관한 고찰』, p.39)

  [엥겔스 : 영어에는 노동의 이 두 개의 다른 면을 나타내는 데에 두 개의 다른 말이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질적으로 규정된 노동은 labor와 구별하여 work라고 부르며, 가치를 창조하는, 오직 양적으로 측정되는 노동은 work와 구별하여 labor라고 부른다.}


  -  『자본론』(카를 마르크스·비봉출판사·1989년·원제 :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conomie, 1867년), <제1장 상품> p.50~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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