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 타자와의 관계, 비상호성·비대칭성

by 이우 posted Mar 09, 2020 Views 1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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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에 대해 좀더 기술해 보자. 죽음의 미래, 그것의 낯설음은 주체에게 어떠한 주도권도 허용하지 않는다. 현재죽음, 자아와 신비의 타자성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죽음은 존재에 종말을 가져온다는 사실, 죽음은 끝이고 무(無)라는 사실을 조장하고자 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한 것은 자아죽음에 직면해서 절대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영생(永生)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죽음이란 사건의 타자성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격적이어야 할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격적 관계, 즉 세계에 대한 주체의 힘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그럼에도 인격성을 유지하는 그런 관계는 어떤 것인가?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건 수동성의 상태에 있는 주체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인가? 남성적 힘과 다른, 할 수 있음을 할 수 있음(pouvoir de pouvoir), 가능한 것의 장악과 전혀 다른, 그러한 지배가 사람에게 과연 있는 것인가? 이것을 발견한다면 시간이 자리한 바로 그 곳, 시간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라고 지난 번 강의에서 우리는 말하였다.

  하지만 문제의 용어를 반복하는 데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반론을 나에게 제기하였다. 존재자로서의 타자는 나에 대해서 이미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타자만이 미래에 대한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론은 나의 논의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나는 타자를 미래로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를 타자를 통해 정의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미래 자체가 그것의 전적 타자성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주된 답변은 이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 문명이 도달한 수준에서 보면 우리의 원초적 관계의 복합화로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합화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 자체는 타인과의 관계의 내적 변증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것을 오늘 세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지금까지 매우 도식적으로밖에 다루지 못한 '홀로서기'에 함축되어 있는 바를 좀더 밀고 나가보고, 그리고 특히, 세계로 향한 초월 외에도 표현의 초월성이 문명의 동시대성이고 전체 관계의 상호성에 토대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면 이러한 변증법이 좀더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말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의 초월성은 그 자체 타자성의 미래를 전제하고 있다. (중략)

  타자와의 관계가 신비와의 관계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일상 생활 가운데 우리가 타자를 만날 때 그의 고독과 타자성을 예절이라는 너울을 통해 이미 은폐한 채로 만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관계하듯 그렇게 관계한다. 주체가 자리할 특별한 자리가 없다. 타자는 공감에 의해, 또 다른 내 자신으로, 다른 자아(I'alter ego)로서 인식된다. 블랑소의 소설 『아미나답』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갔다. 소설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집에서, 아무 일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거기서 머룰기만 하는, 다시 말해,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그런 낯선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관계는 전적으로 상호성(reciprocite)의 관계가 된다. 존재물은 서로 바꿀 수 없는 데도 상호적이다. 아니, 상호적이기 때문에 서로 바꿀 수 있게 된다 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는 전혀 불가능하다.*

  하지만 타자성은,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 한 복판에서 이미 비상호적 관계로, 즉 동시성과 정반대의 관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 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타자성, 他者性)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이고 강자이다. 우리는 상호주관적 공간은 대칭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타자의 외재성은 개념적으로 동일한 것을 분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공간적 외재성으로 표현된 개념적 차이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타자성의 관계는 공간적인 것도 개념적인 것도 아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타인이 나 자신보다 먼저 덕스러운 행동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때, 뒤르켐(Durkheim)은 이 타자의 특수성을 오해하고 있었다.**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떤 무엇을 더 선호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정의보다는 사람을 더 우선시하는 점에서 사랑정의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있지 않는가? (...)

  -  『시간과 타자』(에마누엘 레비나스 · 강연안 · 문예출판사 · 1996년 · 원제 : Le Temps et L`Autre, 1947년) p98~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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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상호성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상호성에는 진정한 인격적 관계와 존경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오히려 비대칭성으로 규정된다.

  ** 뒤르켐에 따르면 도덕성은 집단적인 것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인격과 인격간의 얼굴을 머주한 관계로 볼 수 없다. 레비나스는 이 점을 문제 삼는다. 왜냐하면 도덕이 집단적인 것의 산물이라면, 도덕에는 타자의 타자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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