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②, 금융 위기(부채의 역설)

by 이우 posted Jan 18, 2020 Views 13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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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생산한 것보다 다 많이 소비하면서도 수십 년동안 풍족한 삶을 누렸다. 더 근본적인 수준을 살펴보면, 부채의 역설적인 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해서는 안된다'는 슬로건의 문제점은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상투적인 표현의 반복에 불과하며, 기준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은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접시에 오른 음식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구호가 특정한 수준에 이르면, 상황은 복잡하고 모호해진다.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순전히 물질적인 수준에서의 부채는 어떤 방식으로건 서로 관계가 없으며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채의 정의 생산보다 소비가 더 크다는 뜻이다.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부채를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은 천연자원에 관해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물질적인 조건을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천연자원의 경우, 정확하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에 빚을 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천연자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세대애 달려 있다. 이 경우에도 부채라는 단어는 언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부채를 금융화해서 나타낼 수 없는데다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부채는 국제사회 속에서 일부 집단(국가 혹은 그 외의 어떤 집단)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소비했을 때, 다시 말해서 또 다른 그룹이 생산한 것보다 덜 소비해야 할 때 발생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거나 분명하지 않다. 부채가 발생한 상황에서 관계가 분명해지려면, 돈이 중성화된 측정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 그룹이 생산량에 비해서 얼마를 소비해야 하는지,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는지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공식적인 데이터에 따르면 통용되는 돈 중 90퍼센트는 '가상의' 신용화폐다. 따라서 '실질적'인 생산자가 금융기관에 부채를 지게 되면, 생산의 특정 단위에서의 현실과 연계되지 않은 상태에서 투기의 결과로 발생한 부채가 얼마인지를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한 국가가 IMF나 민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의 압력을 받게 되면, 해당 국가는 이 압력(압력을 구체적인 요구로 설명해 보면, 복지국가의 일부를 해체해서 공공 지출을 줄이거나, 민영화, 시장 개방, 은행 규율 철폐 등이 있다)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논리나 지식이 표현된 결과가 아니라, 극히 일부의(이른바 이해집단의) 지식이 표현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형식 층위로 보면, 이런 지식은 계속되는 신자유주의적인 추정을 구현시킨 지식이다. 하지만 내용 층위로 보면, 일부 국가 혹은 기관(예를 들어서 은행 등이다)의 이익에 특혜를 제공한다.

  루마니아 공산주의 작가 피아이트 이스트라티가 1920년대 말에 소련을 방문했을 때, 첫 번째 숙청과 여론 조작을 향한 공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소현 정권의 옹호자는 이스트라티를 설득해서 소련이 적과 대항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다"는 속담을 인용했다. 그러자 이스트라티는 '좋아요. 깨진 달걀이 보이네요. 그런데 오믈렛은 어디 있죠?"라고 응수했다. IMF가 요구한 긴축재정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좋아요, 유럽 전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달걀을 깨뜨리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들이 약속한 오믈렛은 어디 있죠?"

  그융과 관련된 추정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달걀을 깨뜨려야 하는 금융 위기 속에서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드는 것이다. 키프로스(Cyprus)가 바로 그런 예다. 고양이가 마치 땅바닥을 걷고 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벼랑 끝을 계속해서 걷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오래된 만화를 떠올려 보자.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자신이 높은 골짜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고양이는 추락할 것이다. 키프로스의 시민들이 요즘 느끼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이제 키프로스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앞으로는 삶의 질이 추락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프로스의 시민들이 아직 추락의 여파를 고스란히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적어도 한동안은 만화 속에서 벼랑끝을 걷는 고양이처럼 일상을 유지할 것이다. (중략) 키프로스가 가지고 잇는 슬픈 예측의 중심은 바로 이런 딜레마다. 유럽이 없으면 번영을 지속하면서 생존할 수 없다. 하지만 유럽이 있어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다.

  유럽에서 지속되고 있는 금융 위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독일을 위시한 강한 북유럽국가들은 다른 국가에게 강제적인 요구를 하고, 힘도 없고 취약한 남유럽국가들은 수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이처럼 분단된 유럽의 형체가 드러나고 있다. 복지국가의 인전한 네트워크 바깥의 남유럽은 점차 값싼 노동력 조달 지대로, 아웃소싱이나 관관에나 적합한 지역으로 의미가 축소될 것이다. 한마디로 유럽 내에서도 선진국과 그 나머지 국가 사이의 결차가 벌어지고 있다. (중략)

  전체 금융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금기시되는 사실을 언급해보면, 은행이 일종의 사회화를 겪어야 한다. 2008년 이후 세계적으로 반복되었던 붕괴(월스트리트와 아이슬란드 등)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개인 계좌에서부터 연금펀드, 모든 파생상품의 기능에 이르기까지 금융펀드와 거래의 전체 네트워크가 사회적인 통제와 개선,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처럼 이상적인 말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별것 아닌 피상적인 변화로 생존이 가능한 개념이라면 유토피아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드시피해야만 하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금융권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금융의 권력에 맞서는 임금 노동과 생산적인 자본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금융권의 붕괴와 그 결과인 고통의 외침은 자본의 순환이 완벽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고립된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상기시켰다.

  예를 들어서, 자본의 순환은 결국 사람들의 실질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실체를 가진 물건의 생산과 판매의 형식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게 되었다. 하지만 붕괴와 고통스러운 외침에서 얻을 수 있는 좀더 미묘한 교혼은 현실로 회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융 투기의 가상 공간에서 실제 생산과 소비를 하는 사람들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그저 순수한 이념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금융 투기의 더러운 폐수를 버리면 '실물 경제'라는 건강한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더러운 폐수가 바로 건강한 아이의 혈통이기 때문이다. (...)

-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슬라보예 지젝·문학사상사·2017년·원제 : Trouble in Paradise, 2014년) p.52~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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