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 자본주의의 딜레마①, 실업

by 이우 posted Jan 10, 2020 Views 1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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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한국의 상황을 보면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의 유명한 도입부가 절로 생각난다. '그때는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는 천국으로 향하는 동시에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업무 강도로 악명이 높다. 그곳은 통제할 수 없는 천국인 동시에 고독함과 절망의 지옥이며, 물질적인 풍요가 넘치지만 황량한 곳이고, 고대의 전통을 간직한 동시에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한 나라다. 이 극단적인 모호함은 현대사회 역사상 최고의 성공 신화로 손꼽히는 한국의 이미지를 뒤흔든다. 성공은 맞지만, 과연 어떤 성공일까?

   『스펙데이터(The Spectator)*의 2012년 크리스마스 특별편은 '왜 2012년이 최고의 해인가'라는 사설로 시작되었다. 사설의 내용은 현대사회가 위험하고, 잔인하고,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인식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2012년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해다. 속빈 강정 같은 말처럼 들릴지라도 분명한 증거가 있다. 현재 지구는 전보다도 굶주리지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으며,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 서구사회는 아직 경제 불황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개도국은 성장 중이다.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빈곤을 벗어나고 있으며,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률 역시 매우 낮다. 우리는 황금의 시대를 살고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매트 리들리**는 이런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다음은 그의  저서  『이성적 낙관주의자(The Rational Optimist)』를 위한 설명이다.

  "이 책은 우리 시대에 만연한 비관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상황은 전보다 개선되고 있다. 1만 년 전, 지구상의 인구는 1,000만 명에 채 미치지 못했다. 지금은 60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그중 99퍼센트는 구석기 조상들에 비해서 전보다 더 잘 먹고, 좋은 집에 살고, 더 많은 엔터테인먼트를 누리고,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지난 1만 년 동안 인간이 꿈꾸거나 필요로 하는 가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아졌다. 특히 지난 200년 동안은 그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칼로리, 비타민, 생수, 기계, 사생활 등 모든 면에서 마차가지다. 발로 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며, 소리 높여 외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 떨어져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이 눈부신 변화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미래가 끔찍할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ngels of Nature)』의 저자 스티븐 핑커***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책의 홍보 문구는 다음과 같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인류가 존재한 이후로 가장 평화로운 순간을 살고 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핑커는 끊임없이 날아드는 전쟁, 범죄, 테러의 소식에도 불구하고 폭력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다고 설명한다. 핑커의 야심찬 책은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이고 현대사회는 저주라는 믿음을 깨부수는 한편, 전보다 계몽된 세상에 관한 놀라운 단면을 심리학과 함께 제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다."

  언론, 그 중에서도 특히 비유럽권의 언론에서는 이런 낙관적인 시각을 주로 경제에 집중된 보수적인 관점에서 곧잘 보도하곤 한다. 이들은 "경제가 위기라고? 무슨 위기?"라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한다.(중략)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들 합리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데이터는 전반적으로 사실이다. 맞다. 우리의 삶은 1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조상들보다 훨씬 나아졌다. 심지어 디카우 수용소(독일의 나치 수용소로, 학살을 자행했던 아우슈비츠와는 달랐다)의 일반 수감자마저 몽골의 노예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었다. 그 외에도 인간의 삶이 전보다 나아졌다는 예는 많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먼저 반제국주의적인 희열은 일단 제쳐두고,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유럽이 점차 쇠락하고 있다면, 이 헤게모니가 이를 대체할까? 그 답은 '아시아의 가치를 가진 자본주의'다(물론 이는 아시아인들과는 관계가 없으며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분명하고 현대적인 근대 민주주의의 성향을 뜻한다). 마르크스 때부터 좌익은 단 한 번도 진보적인 적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듣도 보도 못한 생산성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다만 그는 자본주의의 놀라운 성공이 적대감을 낳는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성장에 직면해서 마르크스와 똑같은 의무를 갖게 되었다. 반감을 만들어내는 어두운 시각을 털어내는 것이다.

  이 모두는 현대의 보수주의가 진정한 보수주의가 아니라는 뜻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자기 쇄신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제도(예를 들면 종교)를 가지고 자본주의를 더 효율적으로 보완할 뿐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막고, 사회적 단결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진정한 보수는 전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교착 상태를 십분 인정하고, 단순한 성장에 반대하며,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점에서 극단적인 좌파가 오늘날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상황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대가 어긋나기 때문에 반발한다. 프랑스혁명은 왕과 귀족이 수십 년에 걸쳐서 조금씩 권력을 잃어버린 후에 발생했고, 헝가리의 1956년 혁명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토론을 거친 후 너지 임레가 총리로 임명된지 2년 만에 발생했다. 2011년 이집트 혁명은 무바라크 대통령 집권 하에서 경제적인 성장 덕분에 교육 정도가 높아진 젊은 층이 전 세계적인 디지털 문화에 편승하면서 발생했다. 중국 공산당이 현재 공황 상태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들이 전반적으로 40년 전에 비해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사회적인 적대감(신흥 부자와 그 나머지 사이의 적대감)은 폭발하고 있고, 기대 심리는 전보다 훨씬 높다. 이 모두가 개발과 발전이 가진 문제점이다. 사회는 불평등해지고, 그 결과 새로운 불안과 적개심이 생겨난다. 사람들의 높아진 기대는 충족되기 어렵다. 아랍 민주화 운동 직전, 튀니지 혹은 이집트에서 대다수의 시민들은 수십 년 전에 비해 좀 더 풍족해졌지만, 만족도의 기준 역시 훨씬 높아졌다. 그렇다. 『스펙데이터(The Spectator)』나 리들리, 핑커, 그 외 그들의 동조자들이 원칙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바로 그 사실들이 폭동과 반란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중략)

  최근 프랑스에서 가진 TV토론에서, 기 소르망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함께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나는 "오늘날의 중국은 뭡니까?"라면서 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날카롭게 '중국에는 자본주의가 없습니다!"라고 대꾸했다. 열정적인 친자본주의자 소르망에게는 만약 국가가 비민주적이라면 그 국가는 그야말로 올바른 자본주의국가가 아니고 자본주의의 왜곡된 행태를 실행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은 마치 민주적인 공산주의인 스탈린주의가 제대로 된 공산주의가 아니었음과 같다. 실수는 찾아내기 어렵지 않다. 이는 마치 "내 약혼자는 절대 약속에 늦지 않아.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약속에 늦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내 약혼자가 아니거든!"이라는 유명한 농담과 같다. 이것이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2008년의 위기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 위기는 자유시장의 실패 때문이 아니고, 국가의 과도한 규제 때문이다. 즉, 우리의 시장경제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경제가 여전히 복지국가의 손아귀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략)

  성난 불만의 가장 놀라운 사례 하나는, 경제적 차원에서 높은 업무 강도와 실업 위기의 이상한 공존이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들의 업무 강도가 더욱 높아질수록, 실업의 위협이 더욱 만연해진다. 그러므로 오늘의 상황은 우리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재생산에 대한 일반적인 주제보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이 설명했듯이,『자본론』에서 실업이 가지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핵심성에 치중해서 읽어야 한다. 즉, 실업은 자본주의의 기본 성질인 축적과 확장의 역학에서 구조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경제적인 측면의 대립물의 통일성이라는 극단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실업을 생산하는 것은(점점 더 많은 노동자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의 성공(늘어난 생산성)이다. 축복이 되어야 할 것이 저주가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세계시장은 자체적인 내재적 역학과 관련하여, '모든 사람이 한때는 생산적인 노동자였던 장소, 그리고 노동이 체계를 넘어서서 가격이 책정되는 장소'가 되었다. (...)

-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슬라보예 지젝·문학사상사·2017년·원제 : Trouble in Paradise, 2014년) p.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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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펙테이터(The Spectator) :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시사여론 주간지로, 1828년에 창간되었다. 비교적 보수적인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뉴 스테이츠맨 앤드 소사이어티 The New Statesman & Society〉 같은 저명한 대형 언론지들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다.
  **매트 리들리 : 영국의 저널리스트.
  ***스티븐 핑커 : 미국의 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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