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시인 김수영, 「詩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詩의 존재」

by 이우 posted Jun 22, 2019 Views 8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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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_김수영 전집.JPG


  (...)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 오늘의 세미나*의 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위 예술성과 동위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집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아직까지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말하며,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미 '시를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고 시사한 만큼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속칭 '시평'이나 '시론'을 쓰게 된 것은―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고, 이런 의미의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시를 논한다'는 본질적인 의미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논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大地)의 은폐'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어트의 문맥 속에서는 그것은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엘리어트도 그의 온전하고 주밀한 논문 <시의 음악>의 끝머리에서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라는 말로 의미(意味)의 토를 달고 있다. 나는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해 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 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적(侵攻的)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의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산문의 편, 즉 현실성의 편에서도 하나의 작품은 자기의 전부이다.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에는 진정한 기교가 못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 더 정예화(精銳化)―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중략)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후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는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의 발표 원고.

  - 『김수영 전집2 산문』(김수영 · 민음사 · 1992년)  「詩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詩의 존재」 p.24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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