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칸트의 『판단력 비판』 : 예술의 구분과 가치 비교

by 이우 posted Apr 25, 2019 Views 222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책_판단력비판.jpg


  $51. 미적기예(예술)들의 구분에 대하여

  (...) 사람들은 일반적으로를 자연미가 됐든 예술미가 됐든 미감적 이념들의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예술에서는 이 이념이 객관에 대한 하나의 개념에 의해 유발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아름다운 자연에서는 대상이어야 할 것에 대한 개념 없이도 주어진 객관에 관한 순전한 반성이, 저 객관이 그것의 표현으로 간주될 이념을 환기하고 전달하는 데 충분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예술을 구분하고자 한다면, 그를 위해서 우리가 적어도 시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원리로써, 사람들이 상호간에 가능한 한 완전하게, 다시 말해 그들의 개념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감각에 의해서도, 자신을 전달하기 위해,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의 방식과 예술의 유비보다 더 편한 것은 없다. 이러한 표현은 말, 몸짓, 그리고 소리(음절, 동작, 그리고 억양) 속에 있다. 이 세 종류의 결합에 의해서만 말하는 자의 뜻이 완벽하게 전달된다. 왜냐하면 사상과 직관 그리고 감각은 이를 통해 동시에 그리고 통합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세 종류의 예술, 즉 언어예술, 조형예술, 그리고 외적 감관인상들인 감각들의 유희의 예술이 있을 따름이다. (중략)

  1. 언어예술웅변술시예술이다. 웅변술지성의 과업을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추진하는 예술이며, 시예술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를 지성의 과업으로 수행하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웅변가는 하나의 과업을 내걸고, 마치 그것이 한낱 이념들과의 유희인 것처럼 수행하여, 청중들을 즐겁게 한다. 시인은 한낱 이념들의 즐거운 유희를 내걸지만, 그럼에도 지성에 대해서는 마치 그가 그 과업을 추진하는 것을 의도로 갸졌던 것과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두 인식능력들, 즉  감성지성은 비록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강제와 상호 간의 침해 없이는 통합될 수 없는 것인데, 이것들의 결합조화무의도적인 것처럼, 그리고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미적 기예(예술)가 아니다. 그래서 예술에서는 일체의 가식적인 것과 고심의 흔적을 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다움과 같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기예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술은 하나의 보수를 받는 과업으로서 그 크기가 일정한 척도에 따라 판정되고 강제되고 또는 지불되는 노동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기예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이 종사함에도 그 경우에 어떤 다른 목적을 바라다보지 않고서(보수와 무관하게) 충족과 고무됨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자유로운 기예인 것이다.

  그러므로 웅변가는 그가 속하지 않은 어떤 것, 곧 상상력의 즐거운 유희를 주기는 하지만, 그가 약속하는 것과 그가 내건 과업, 곧 지성을 합목적으로 종사하게 하는 일은 다소 저버린다. 그에 반해 시인은 거의 약속하는 바가 없고, 순전히 이념들과의 유희를 내걸지만, 과업다운 어떤 것, 곧 지성에게 유희하면서 영양을 공급하고 상상력을 통해 지성의 개념들에게 생기를 주는 일을 수행한다. 그러니까 실제에 있어서 웅변가는 자기가 약속한 것보다 더 적은 일을 하고, 시인은 자기가 약속한 것보다 덤 낳은 일을 하는 것이다.

  2. 조형예술들 내지 이념들을 감관직관에서 표현하는 예술들은 감관적 진상의 예술이거나 감관적 가상의 예술이다. 전자는 조소라 일컫고, 후자는 회화하고 일컫는다. 양자는 공간 상의 형태들을 이념에 대한 표현으로 삼는다. 앞의 것은 형태들을 시각촉각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게 하며, 뒤의 것은 식가에 대해서만 인지할 수 있게 한다. (중략)

  조형예술의 제1 종류인 조소에는 조각예술건축예술이 속한다. 전자는 자연 속에 실존할 수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의 개념들을 입체적으로 그러면서도 예술인 만큼 미적 합목적성을 고려하면서 현시하는 예술이고, 후자는 단지 기예에 의해서만 가능한 사물들을 의도를 위하여, 그러면서도 동시에 미감적 합목적으로 현시하는 예술이다. 후자에 있어서는 기예적 대상의 일정한 사용이 주요 사안으로서, 미감적 이념들은 이 주요 사안을 조건으로 가지며 이에 제한된다. 전자에서는 미감적 이념들의 순전한 표현이 주요 의도이다. 그래서 인간, 신, 동물 따위의 조상(調像)들은 전자의 종류에 속하지만, 신전이나 공공집회를 위한 호화 건물이나 주택, 개선문, 명예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둥이나 비석들 따위는 건축예술에 속한다. (중략)

  조형예술의 제2 종류인 회화예술 감관적 가상을 기예적으로 이념들과 결합시켜서 현시하는 것인데, 이것을 나는 자연의 미적 묘사의 예술과 자연 산물들의 미적 편성의 예술로 구분하겠다. 전자는 본래적인 회화이고, 후자는 원예술이겠다. 무릇, 전자는 단지 입체적 연장의 가상만을 주는데, 후자는 이 입체적 연장을 진상대로, 그러나 한낱 그 형식들을 바라볼 때의 상상력의 유희라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한 이용과 사용에 대한 가상만을 주기 때문이다. 후자는 다름 아니라 대지를, 자연이 그것을 우리 보기에 그렇게 현시하는 것과 똑같이 다양하게(풀꽃, 덤불, 나무, 심지어는 하천, 구릉, 계곡들로) 장식하는 것으로, 다만 자연과는 다르게 일정한 이념에 맞춰 편성하는 것이다. (중략)

  3. 외적인 것에 의해 산출되지만 그럼에도 보편적으로 전달되어야만 하는 감각들의 미적 유희의 예술은 그 감각이 사고하는 감관의 정조(情調)의 여러가지 균형, 다시 말해 그 감관의 율조(律調) 이외에는 아무런 것과도 관계할 수 없다. 그리고 낱말의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이 예술은 청각의 감각들과 시각 감각들의 기예적 유희, 그러니까 음악색채예술로 구분될 수 있다. (중략)

  첫째로 음악에 있어서 이러한 파동들의 균형과 그 판정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수학적인 요소를 생각하고, 또 당연한 일이지만 색채의 대조를 음악과의 유비에 의해 판정한다면, 그리고 둘째로 드문 예이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최고로 좋은 시각을 가지고서도 색채를 구별하지 못하고, 최고로 예리한 청각을 가지고서도 들을 구별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예를 참고로 하고, 또한 이러한 구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색도(色度)음계상의 여러 가지 강도에서 한낱 감각의 정도가 아니라 질의 지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두 감각들을 한낱 감각인상들이 아니라 수많은 감각들의 유희에서 형식을 판정한 결과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략)


 
$52. 동일한 산물에서 미적 기예들의 결합에 대하여

  웅변술은 연극에서 그 주제와 대상의 회화적 현시와 결합될 수 있고, 노래에서 음악과, 그러나 노래가극에서 회화적(무대적) 현시와 결합될 수 있으며, 음악에서의 감각들의 유희는 무용에서 형태들의 유희와 결합될 수 있다. 또한 숭고한 것의 현시도, 그것이 예술이 속하는 한 운문의 비극, 교훈시, 성악극에서 미와 통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합에서 예술은 더욱더 기예적이 되는데 과연 더 아름답게 되는지 어떤지는 이런 경우들의 몇몇에 있어서는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모든 예술에서 본질적인 것은 관찰과 판정에 대한 합목적적인 형식에 있거니와, 이 경우 는 동시에 교화이며, 정신이념들에 맞게하여, 정신으로 하여금 더욱 더 많이 그러한 즐거움을 감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하니 본질적인 것은 감각의 질료(매력이나 감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에는 한낱 향수(향락)만이 목표가 되거니와, 향수이념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것으로, 정신을 우둔하게 만들고, 대상을 차츰 역겹게 만들고, 그리고 마음으로 하여금 이성의 판단에서 자기의 반목적적인 기분을 의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불만족하게 하고 언짢아하게 만든다.

  도덕적 이념들만이 자립적인 흡족을 동반하는 바, 만약 예술들이 가까이든 멀리든 이러한 도덕적 이념들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후자가 예술의 종국의 운명인 것이다. 그때에는 예술들은 단지 기분풀이에 쓰일 뿐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의 불만족을 글을 통해 불식시키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면 할수록 그러한 기분풀이를 더욱더 필요로 하게 되고,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더 쓸모없고 자기 자신에 점점 불만족그럽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연의 미들을 관찰하고 판정하고 경탄하는 데에 일찍이 익숙해진다면, 일반적으로 이 자연의 미들이야말로 전자의 의도에 대해 가장 유익한 것이다.


  $53. 미적 기예(예술)들 상호간의 미감적 가치의 비교

  모든 예술 가운데 그 근원을 천재에게 힘입고 지시규정이나 실례들에 의한 시도를 가장 적게 받으려 하는 시예술최상의 지위를 주장한다. 시예술상상력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리고 어떤 주어진 개념의 경계 안에서 이 개념에 부합하는 무한히 다양한 가능한 형식들 중에서, 이 개념의 현시를 어떠한 언어적 표현도 그에 온전히 충전되지 못하는 충만한 사상 내용과 연결시키고, 그러므로 미감적으로 이념들로 고양되는 형식들을 제시함으로써, 마음을 확장시켜준다. 시예술은 마음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자연규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신의 능력을 느끼게 함으로써 마음을 강화시켜 준다. 이 마음의 능력은 현상으로서 자연경험에서 감관에 대해서도 지성에 대해서도 스스로 제시해주지 않는 어떤 견해들에 따라 자연을 고찰하고 판정하며, 그러므로 자연을 초감성적인 것을 위하여, 그리고 이를테면 초감성적인 것의 도식으로 사용하는 능력인 것이다. 시예술은 그것이 임의로 생기게 한 가상과 더불어 유희하되, 그럼에도 이 가상을 가지고 기만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시예술은 자신이 하는 일 자체를 순전히 유희라고 공언하지만, 그럼에도 이 유희는 지성에 의해, 그리고 지성의 과업들을 위한 합목적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웅변술은, 그것이 설득하는 기술, 다시 말해 아름다운 가상을 속이는 기술(辯論術)로 이해되고, 순전한 능변(달변과 화술)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에서는, 일종의 변증술이고, 변증술이란 웅변가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판정에 앞서 사로잡아 이들에게서 자유를 빼앗는 데 필요한 만큼만을 시예술로부터 빌려 쓰는 것으로, 그러므로 이것은 법정을 위해서도 설교단을 위해서도 권장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시민적 법률, 개개인의 권리가 문제된다거나 또는 그들의 의무를 올바로 알고 양심적으로 준수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교화하고 규정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에는, 넘치는 기지상상력의 자취를 보이는 것만 해도 그러한데, 그 위에 더구나 사람들을 설득하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기술의 자취를 보인다는 것은 그처럼 중대한 과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릇 설령 웅변술이 때때로 그 자체로는 정당하고 칭찬받을 만한 의도들을 위해 적용될 수 있다고 해도, 비록 그 행동은 객관적으로 합법칙적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준칙들과 마음씨는 주관적으로 타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웅변술은 역시 배척해야 할 것이 된다. (중략)

  마음을 자극하고 움직이는 것이 문제라면, 나는 시예술 다음에는 언어예술들 가운데서 시예술에 가장 가깝고 또한 그것과 아주 자연스럽게 합일할 수 있는 것, 곧 소리예술(음악)을 놓고 싶다. 무릇 소리예술개념 없이 오로지 감각들만으로 말하고, 그러니까 와 같이 숙고를 위한 무엇인가를 남겨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것은 마음을 보다 다양하게, 그리고 비록 한낱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보다 내면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리예술은  물론 교화라기보다는 향수(향락)이며 이성에 의해 판정된다면, 다른 어떤 예술보다 더 적은 가치를 갖는다. (중략) 이 예술의 자극(매력)은 다음의 사실들에 의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연관된 언어의 모든 표현은 그 표현의 의미에 적합한 음조를 가진다는 사실, 그리고 이 음조는 다소간에 화자의 정서를 표시하며, 반대편으로는 또한 청자에게도 그러한 정서를 만들어내, 이 정서가 거꾸로 청자 안에 그러한 음조를 가진 언어로 표현되는 이념 또한 환기한다는 사실, 그리고 변조(變調)는 이를테면 어떤 사람에게나 이해되는 보편적 감각의 언어인 바, 소리예술은 이러한 변조를 그것만으로써 전체적으로 강조하여, 곧 정서의 언어로 구사하고, 그렇게 하여 연합의 법칙에 따라 이 변조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는 미감적 이념들을 전달한다는 사실, 그러나 저 미감적 이념들은 어떠한 개념도 규정된 사상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들을 합성하는  형식(즉 화음과 선율)만이, 언어 형식 대신에, 그러한 감각들의 균현 잡힌 조율을 매개로, 형언할 수 없이 풍요한 사상의 하나의 연관된 전체라는 미감적 이념을, 악곡에서 지배적인 정서를 형성하고 있는 일정한 주제에 맞춰 표현하는 데 쓰일 뿐이라는 사실 등 말이다. (중략) 

  그에 반해 예술들의 가치를 그것들이 마음에 가져다주는 교화에 따라서 평가하고, 인식을 위해 판단력에서 모일 수밖에 없는 능력들의 확장을 척도로 취한다면, 음악은 한낱 감각들과 유희하는 한에서, 예술들 가운데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조형예술들은 이 관점에서는 음악보다 훨씬 앞선다. 왜냐하면, 조형예술들은 상상력으로 하여금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지성에 적합유희를 하도록 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가면서 동시에 하나의 과업을 수행하는 바, 이 작품은 지성개념들에게, 그것들의 감성과의 합일을 촉진하고, 그렇게 해서 이를테면 상위 인식력들의 세련성을 촉진하는, 하나의 지속적인 그리고 그것 자신만으로도 훌륭한 운반체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중략)

  음악에는 어느 정도 세련성의 결여가 따라다닌다. 음악은 특히 악기의 성질상 그 영향을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으로 이웃에까지 널리 퍼뜨려, 이를테면 자기를 강요한다. 그러니까 음악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짓은 눈에게 말을 거는 예술들은 하지 않는 짓이다. 사람들이 그런 인상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 눈을 돌려버리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음악의 경우는 널리 퍼지는 향기에 의해서 즐거워하는 것과 사정이 거의 같다. 향수 뿌린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이는 주위 가까이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의지에 거슬려 접대하고, 그들이 호흡하고자 하면 동시에 향수를 향유하도록 그들에게 강요한다. 그래서 이러한 짓은 유행에도 뒤떨어 진 것이다.

  조형예술들 가운데서 나는 회화에게 우선권을 주었으면 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소묘예술로서 회화는 여타의 모든 조형예술기초에 놓이며, 다른 한편으로 회화는 여타의 예술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이념들의 영역으로 파고들어가서, 직관의 분야까지 이 이념들에 맞추어 더욱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
  가정 예배에서 찬송가 부르기를 권장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이웃들에게 함께 부를 것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사색하는 일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소란스러운(바로 그렇기에 보통은 위선적인) 예배로 말미암아 공중에게 큰 괴로움을 끼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 『판단력비판』(특별판 한국어 칸트 선집 · 지은이 : 임마누엘 칸트 · 옮긴이 : 백종현 · 아카넷 · 2017년 · 원제 : Kritik der Urteilskraft, 1790년)  <B. 자연의 역학적 숭고에 대하여> p. 357~371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