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칸트의 『판단력 비판』 : 순수 이성 · 실천 이성 · 판단력

by 이우 posted Mar 12, 2019 Views 1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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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선험적 원리들에 의한 인식의 능력순수 이성이라 부르고, 이 순수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연구순수 이성 비판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저런 명칭을 가진 첫번째 저작(순수 이성 비판)에서 그렇게 했듯이, 이 능력을 실천 이성으로서 특수한 원리들에 따라 연구하고자함 없이, 단지 이론적으로 사용되는 이성만을 뜻하는 것으로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저 순수 이성 비판은 한낱 사물들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우리 능력에만 관여하며, 그러므로 쾌 · 불쾌의 감정과 욕구 능력은 제외하고, 단지 인식 능력만을 다룬다. 그리고 인식 능력 중에서도(이론적 인식에 똑같이 속하는 능력들인) 판단력과 이성은 제외한 채, 지성만을 선험적 원리에서 다룬다

  그것은, 논의가 진행되어 가면서 드러나겠지만, 지성 이외에는 어떤 다른 인식능력도 선험적인 구성적 인식 원리들을 제공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로므로 인식능력들 모두를, 다른 두 인식 능력 각각이 자기 자신의 뿌리로부터 뚜렷이 소유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인식의 몫에 따라서, 훑어보는 비판은 지성이 선험적으로 현상들―이것들의 형식 또한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바―의 총괄인 자연을 위해 법칙으로 지시규정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나 비판은 여타 모든 순수 개념들을, 우리의 이론적 인식 능력에 대해서는 초월적이지만, 그러면서도 가령 무익하거나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규제적 원리들로 쓰이는 이념들 안에 밀어넣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마치 지성이(지성은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의 가능성) 또한 이 한계 안에 가두어 놓은 것 같은, 지성의 우려스런 월권을 억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이 비록 결코 완벽성에 이를 수는 없다 해도, 자연을 고찰함에 있어 지성 자신을 완벽성의 원리에 따르도록 이끌고, 그를 통해 모든 인식의 궁극의도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구성적 인식원리들을 함유하고 있는 한에서, 자기 고유의 구역을, 그것도 인식 능력에서 갖는 것은 본래 지성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명명된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해 여타의 모든 경쟁자들에 대항해서 확실한, 그러나 유일한 소유지를 확보해야 할 것이었다. 그와 똑같이 오로지 욕구능력과 관련해서만 선험적인 구성적 원리들을 함유하는 이성은 실천 이성 비판에서 그 소유지를 지정받았다.

  그런데 우리 인식 능력의 순서에서 지성과 이성 사이의 중간항을 이루는 판단력도 독자적으로 선험적 원리를 가지는가, 이 원리들은 구성적인가 아니면 한낱 규제적인 것인가(즉 그러므로 어떤 고유한 구역도 증명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판단력이 인식능력과 욕구능력 사이의 중간항으로서의 쾌 · 불쾌의 감정에게(지성이성 능력에게, 이성욕구능력에게 선험적으로 법칙들을 지시규정하는 것과 똑같이) 선험적으로 규칙을 주는가, 이것이 지금의 판단력 비판이 다루는 문제이다. (중략)

  사람들이 판단력―이것의 올바른 사용은 필연적으로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건전한 지성이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도 다름 아닌 이 능력이거니와―의 본성으로부터 쉽게 추정될 수 있는 바는, 판단력의 고유한 원리를 찾아내는 일은 큰 어려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무릇 판단력은 어떠한 것이 됐든 하나의 원리를 선험적으로 자기 안에 함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판단력은 하나의 특수한 인식능력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비판조차도 받지 않을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리는 선험적 개념들로부터 도출된 것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험적 개념들이란 지성에 귀속되는 것이고, 판단력은 단지 이것들의 적용에만 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판단력은 자신이 하나의 개념을 제시해야만 할 것이되, 이 개념을 통해서는 본래 사물이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서는 다시금, 어떤 것이 이 규칙에 해당하는 경우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기 위해, 또 다른 판단력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원리―이것이 주관적인 것이든 객관적인 것이든 간에―로 인한 이런 당혹스러움은 주로 사람드리 미감적이라 부르는 판정들, 즉 자연 또는 예술의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에 관한 판정들에서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판정들에서의 판단력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이 능력 비판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왜냐햐면 이 판정들은 비록 독자적으로는 사물들의 인식을 위해 전혀 아무 것도 기여하는 바가 없지만, 그 인식능력에만 귀속하고, 그러면서도 이 능력이 어떤 선험적 우너리에 따라 쾌 · 불쾌의 감정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욕구능력의 규정근거일 수 있는 것과는 혼동되지 않는데, 그것은 욕구능력은 자기의 선험적 원리들을 이성의 개념들 안에서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논리적 판정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감성적인 것에 대한 보편적 지성 개념더 이상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사물들에 대해 경험이 합법칙성을 세우고, 판단력이 자연사물을 인식할 수 없는 초감성적인 것과 관계 짓는 원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취할 수 있으되, 그것을 오로지 자기 자신의 관점(의도)에서만 자연을 인식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곳에서는, 그러한 선험적 원리는 세계계존재자들을 인식하는 데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만 하며, 또한 동시에 실천 이성을 위해서 전망을 열어 준다. 그러나 이 원리는 쾌 · 불쾌의 감정과 아무런 직접적 관계도 갖지 않는 것으로, 이 관계야말로 판단력의 원리 안에 있는 수수께끼다. 이 수수께끼가 비판에서 이 능력을 위한 하나의 특수한 부문을 곡 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념들―이것들로부터는 결코 쾌 · 불쾌의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귀결이 이끌어내질 수 없다―에 따른 논리적 판정은 어쨌든, 그러한 판정들의 비판적 제한과 함께, 철학의 이론적 부분의 부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감적 판단으로서 취미능력(미적인 것을 판정하는 능력)에 대한 연구는 여기서 취미의 형성이나 개발을 위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이런 것은 모든 이러한 탐구 없이도 지금까지 그랫듯이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한낱 초월적 관점(의도)에서 행해질 것이므로, 스스로 자부하거니와, 이 연구가 저런 목적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관대하게 판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의도와 관련해서는 이 연구는 가장 엄격한 심사를 받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니 이 경우에도, 판단력의 현상을 그 원리로부터 도출하는 방식이 모든 분명성을 갖지 못함을 전제하고서도, 만약 그 원리가 올바르게 제시되었다는 것이 충분히 명료하게 밝혀져 있기만 한다면, 자연이 그토록 착종시켜 놓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아주 큰 어려움이 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전적으로 피할 수 없는 어느 정도의 불명료함을 양해하도록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

- 『판단력비판』(특별판 한국어 칸트 선집 · 지은이 : 임마누엘 칸트 · 옮긴이 : 백종현 · 아카넷 · 2017년 · 원제 : Kritik der Urteilskraft, 1790년)  <1790년 제1판을 위한 머리말> p14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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