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권력에의 의지』 : 니힐리즘은 문 앞에 있다

by 이우 posted Jan 03, 2019 Views 18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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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니힐리즘은 문 앞에 있다. 모든 방문객 가운데 가장 기분 나쁜 이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회적 곤궁의 상태>, <생리학적 변질>, 나아가 부패를 가리켜 니힐리즘의 원인으로 여기는 것은 오류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의리  있고, 그럴 수 없이 인정 깊은 시대이다. 곤궁, 심적이든 신체적이든 지적이든 곤궁은 그 자체로서는 니힐리즘(바꾸어 말하면 가치, 의미, 원망의 철저한 거부)을 출산할 수 없다. 하나의 전혀 독특한 해석 가운데, 그리스도적‧도덕적 해석 가운데 니힐리즘은 잠적해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교의 몰락―그 도덕, 그것은 그리스도교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에서의 몰락.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이다. 성실감이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고도로 발달하여 모든 그리스도교적 세계 해석과 역사 해석의  허위나 기만에 대하여 구토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하나님은 진리이다>로부터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는 광신에로의 반전. 실행의 불교.

  3. 도덕에의 회의가 결정적인 것이다. 도덕적 세계 해석의 몰락. 이 해석은, 피안성(彼岸性, Jenseits) 가운데로의 도피를시험해 버리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인가될 수 없으며, 그 몰락은 니힐리즘에로 귀착된다.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거대한 힘이 바쳐진 유일한 세계 해석이 수행될 수 없게 되면 모든 세계 해석은 거짓이 아닐까 하는 불신이 눈을 뜬다. 불교적 특성, 무(無) 가운데로의 동경(인도의 불교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발달을 그 자체 배후에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대문에 불교에 있어서는, 니힐리즘의 내부에 있는 것은 초극되지 못한 도덕 뿐이다. 즉, 벌9罰)로서의 생존, 그것과 결부된 오류로서의 생존, 따라서 벌로서의 오류―이것도 하나의 가치 평가이다.. <도덕적 하나님>을 초극해 보려는 철학적인 시도(헤겔, 범신론), 현자라든가, 성자라든가, 시인이라든가 하는 통속적인 여러 이상의 초극. <진>과 <미>와 <선>의 적대 관계―.

  4. 한편으로 <무의미성>에 반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적 가치 판단에 반대하는 것. 어느 정도로 모근 과학이나 철학은 지금까지 도덕적 판단에 기초해 있었던 것일까? 도한, 그 대문에 과학의 적의를 자초하지는 않았는가? 혹은 과학성으로부터 등을 돌리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스피노자주의의 비판, 그리스도교적 가치 판단은 사회주의적 체계나 실증주의적 체계의 도처에 잔존해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5. 현재의 자연과학의 니힐리즘적인 여러 귀결(피안적인 것의 가운데에로 도망하는 그 시험이 되고 있은즉). 그 행위로부터 마침내는, 자기 해체가, 자신에의 반항이, 반(反)과학성이 결과한다. 코페르니쿠스 이래 인간은 중심으로부터 X 가운데로 위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6. 정치적 사고법이나 경제적 사고법의 니힐리즘적인 여러 귀결. 여기서는 모든 <원리>가 어느덧 비우호적 연기(演技)가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범용함, 비열함, 불성실 따위의 악취, 국가주의, 아나키즘 등. 벌(罰) 구제하는 계급이나 인간이 시인(是認)하는 자가 결여되어 있다.

  7. 역사학과 <실천적 역사학자>, 달리 말하면 로망주의자의 니힐리즘적인 여러 귀결. 예술의 위치, 즉 현대 세계에 있어서의 그 위치의 절대적인 비근본성, 그 암울화. 괴테가 말한 바 올림푸스 신(神)의 태도.

  8. 예술, 그리고 니힐리즘의 준비. 즉 로망주의(바그너의 <니벨륭겐>의 결말.

- 니체 <권력에의 의지>(청하. 1992년) 제1권 <유럽의 니힐리즘> . p.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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