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미니마 모랄리아 : 전쟁과 폭력

by 이우 posted Dec 05, 2018 Views 1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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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습을 전하는 뉴스에서는 비행기를 생산한 회사들의 이름이 빠지는 적이 거의 없다. 이런 회사의 이름들, 포케-불프, 하인켈, 랑카스터는 저 옛날 갑옷 기병, 창기병, 경기병이 언급되던 자리에 나타난다. 삶의 재생산, 삶의 지배, 삶의 파괴라는 매커니즘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 산업, 국가, 선전은 합병된다. 회의적인 자유주의자의 해묵은 과장, 즉 전쟁은 사업이라는 주장은 실현되었다. 국가 권력 자체가 파편적인 이해 관심에서 독립해 있다는 가상을 포기했으며, 예전에도 항상 그러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이념적으로도 노골적으로 그런 것을 위해 봉사하려 든다. 도시 파괴의 주역을 담당한 회사들이 찬양조로 언급되는 것은 그 회사의 명성에 도움이 되며 그에 따라 도시 재건에서는 가장 좋은 일거리가 그런 회사에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30년전쟁처럼 이 전쟁 또한 종전이 되면 아무도 그 시작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 채 텅 빈 휴지기로 쪼개진 일련의 불연속적인 출병, 즉 폴란드, 노르웨이, 러시아, 튀니지로 출병 그러고는 전면적인 침공으로 분해될 것이다. 이 전쟁의 리듬, 즉 간헐적인 작전과 지리적으로 도달할 적이 없기 때문에 나온 완전한 휴전 상태는, 개개의 전쟁 도구들을 특정 짓게 하며 자유주의 이전의 출정 방식을 여전히 떠올리게 만드는 기계적 리듬과 상당히 흡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리듬은, 인간의 체력과 모터 에너지 사이의 불균형 속에서뿐 아니라 체험 방식을 결정하는 가장 내밀한 세포 깊숙이까지, 전쟁에 대한 인간의 행태를 완전히 규정한다. 이미 지난 전쟁에서도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투에 육체가 부적합했기 때문에 진정함 경험은 불가능했다. 예전에 포병 대장 보나파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던 것처럼 전쟁 경험에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에 대한 회고록과 평화 협정 사이에 있는 긴 간극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회고록들은 기억을 어렵게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음을 증언하는데, 그런 기억에는 어떤 책에서든 보고자들이 어떤 공포를 통과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 어떤 무력감과 함께 심지어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모여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경험과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는데 그것은 마치 기계의 움직임이 육체의 반응과 완전히 동떨어지는 것과 같다. 육체는 병적인 상태에서나 비로소 기계의 리듬을 닮을 수 있다. 이 전쟁이 연속성이나 역사, '서사적' 계기를 거의 포함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는 매 단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보존되는 항구적인 경험의 잔상을 남겨놓지 않는다. 전쟁은 도처에서 메번 폭발과 함께 자극의 보호막을 파괴한다. 이 보호막 아래서의 경험, 즉 치유적인 망각과 치유적인 회상 사이의 지속이 형성되는데도 말이다. 즉, 치유적인 망각과 치유적인 회상 사이의 지속이 형성되는데도 말이다. 삶은 무시간적인 충격의 연속으로 변질되며 그러한 충격들 사이에 구멍마다 마비된 사이 공간들만이 입을 벌리고 있다. 모든 상흔, 즉  귀향자의 극복되지 못한 충격은 미래의 파괴를 위한 효소라는 점에서, 글자 그대로 전쟁에 대해 아무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보다 미래를 위해 더 불길한 것은 없다. (...)

  정보, 선전, 시사 논평을 통한 전쟁의 완전한 은폐, 맨 앞의 탱크에 올라탄 영화 촬영가, 전쟁 리포터의 영웅 같은 죽음, 제도된 여론과 의식 없는 행동에서 나온 어설픔 등, 이 모든 것은 '경험'이 시들어버린 것, 인간과 그가 처한 불행 사이에 존재하는 진공(불행은 바로 이러한 진공 속에 있다 할 수 있다)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이것은 마치 물화하고 경직된 상태로 주물에 부어낸 사건들이 사건 자체를 대체하는 것과 같다. 인간들은 더 이상 어떤 관객도 없는 괴물 같은 기록 영화의 연기자로 전락하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인간까지 영사막 속에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온 사방에서 조롱당한 가짜 전쟁(phony war)의 기저를 이룬다. 이 말은 분명 참혹한 현실을 '단순한 선전'으로 치부해버리는 파시즘 정서에서 나온 것으로 그 목적은 전쟁의 전율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의 모든 경향처럼 가짜 전쟁이라는 표현 또한 그 근원은 파시즘적 태도―이러한 태도는 악의적으로 그런 가짜 전쟁을 암시하고 있는데―에 의헤 비로소 관철되는 현실의 요소들이다. 전쟁은 실제로 가짜이지만 그 위조품적 성격이 어떤 공포보다 공포스러우며, 그러한 전쟁을 조롱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재앙에 일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지금 시대도 포함된다면, 무인 폭탄 비행기 또한 알렉산드로 대왕의 요절이나 그 비슷한 이미지들과 함께, 세계정신을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손꼽을 수 있는 경험적 사실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 자체처럼 그러한 무인 폭탄 비행기는 인간이라는 주체 없이도 곧장 당당히 등극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파시즘처럼 최고도의 기술적 완벽성을 완전한 맹목성과 결합시킨다. 파시즘처럼 이것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경악을 불러일으키겠지만 철저히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말을 탄 것이 아니라 머리 없이 날면서 "나는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헤겔의 역사철학을 반박하는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삶은 '정상적'으로 다시 진행되고 문화는 '재건되리라'는―마치 문화가 재건된다는 것이 바로 문화의 부정이 아닌 양―생각은 백치 같은 생각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는데 그것은 파국 자체라기보다는 막간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문화는 도대체 아직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직 깨알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 남아 있을지라도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 아무런 필연적 결과도 가져오지 않을까? 희생의 양(量)이 야만성이라는 전체 사회의 새로운 질(質)로 진화되지 않을까라고 상상하지 않을 수 있나?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되는 한 파국은 항구화한다. 사람들은 살해된 자들을 위한 복수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된다면 공포는 제도화되고, 저 먼 옛날부터 멀리 떨어진 신악 지역까지 지배하던 전(前)자본주의적 피의 복수가 주체 없는 주체인 국가들과 함께 다시 확대될 것이다. 그렇지만 죽은 자들을 위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사면이 베풀어진다면 처벌을 면한 파시즘이 결국 승리하게 되고, 이런 일이 손바닥 뒤집는 일만큼 쉽다는 것이 입증되면 가공할 사태가 다른 곳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역사의 논리는 이 논리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처럼 파괴적이다. 그 무게 중심이 어디로 기울지라도 지나간 불행을 비슷하게 재생산할 것이다. 죽음이 정상적이 된다.

  패배한 독일과 함께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나는 단지 두 가지 점을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는, 나는 어떤 조건에서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교수형 집행자가 되거나 교수형 집행자를 위한 명분을 제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사람들 손에―어떤 법적 장치에 의헤서도―기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대답은 지독히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모순에 차 있으며 어떤 일반화나 실천도 조롱하는 대답이지만, 잘못은 나에게 있기보다는 질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영화의 주간 뉴스 : 마리안나 군도, 특히 괌 섬에 대한 침공에서 인상적인 것은 전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치열하게 수행된 기술적 거리 정화 작업이나 폭파 작업, 또는 연막 소독에 의한 병충해 박멸 작업이었다. 이 작업으로 어떤 풀도 자랄 수 없을 정도였다. 적군은 시체나 환자로 되었다. 파시즘 아래 유대인처럼 적은 기술적 행정적 조처의 객체일 뿐이다. 적군이 대항할 경우 그 대응 조처도 똑같이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구식의 전쟁에서보다도 여기서 더 많은 이니셔티브가 요구된다는 것, 주체의 근절을 위해 주체에게 혼신의 힘이 요구된다는 것이 그야말로 사탄적이다. 완성된 비인간성은 '증오 없는 전쟁'이라는 그레이(Edward Grey, 1862~1933, 영국의 정치가)의 인간적인 꿈의 실현이다.   (...)

- <미니마 모랄리아>(테오도르 아도르노 · 길 · 2005년 ·  원제 :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a"digten Leben, 1951년), <33.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p.7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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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을 탄 것이 아니라 머리 없이 날면서 "나는 세계정신을 보았다" : 나플레옹을 보고 "나는 말 탄 세계정신을 보았다"고 한 헤겔의 말을 패러디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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