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미니마 모랄리아 : 자본주의 정신과 수치심

by 이우 posted Nov 06, 2018 Views 1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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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에는 시민 시대 이전의 과거가 개인적 활동이나 호의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데 수치심 속에 아직 살아 있다. 신대륙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 노인에게조차 아무도 공짜로 봉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것 자체가 오히려 상처로 느껴진다. 오직 토지의 독점에서 연유하는 고귀함은 이데올로기이기는 하지만, 양반다운 고귀함은 구세계인의 성격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어 시장의 논리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해 주었다. 독일의 지배층은 특권이나,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통하지 않은 돈벌이를 20세기까지 경멸한다. 학자나 예술가들이 악평에 시달리는 경우는 그들의 돈벌이를 목적으로 할 때 였던바―이들 자신도 대개는 돈벌이에 저항했지만―가정교사였던 휠덜린이나 피아니스트 리스크는 바로 그 면에서 지배적인 의식과 대립되는 경험을 맛보아야 했다. 오늘날까지도 어떤 사람이 상류 사회에 속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일차적 판단은 그가 돈을 받지 않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유럽상류층의 아이는 친척으로부터 선물로 돈을 직접 받을 때 얼굴을 붉혔다. 시민사회의 공리주의가 득세하면서 그러한 반응은 사라졌지만 인간이 오직 교환을 위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부잣집 아이가 신문 배달로 몇 센트의 돈을 버는 일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이러한 주저없음은 성인들의 습성에 그대로 침전된다. 그 때문에 미국 문화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유럽인은 미국인을 돈 되는 일에만 덤비는 품위 없는 족속으로 여기며, 반대로 미국인은 유럽인을 방랑자나 왕자병으로 취급한다. 노동은 수치가 아니라 지극히 자명한 원리, 중세적 의미에서 장사는 고상하지 못하다는 속물 근성의 부재, 민주화된 생업 원칙은 철저히 만빈주주의적인 것, 경제적 부당성, 인간의 품위 저하가 존속하는 데 기여해 왔다. 교환가치로 표현될 수 없는 활동이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은 아무에게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이 주관적 이성의 승리를 가져온 실질적인 전제인데, 주관적 이성은 그 자체로서 진실된 것을 사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진실을 오직 다른 존재자, 즉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 인지한다.

  유럽에서는 자부심이 이데올로기였다면 미국에서는 물자 공급이다. 이런 것은 객관 정신의 산물에도 적용된다. 교환의 당사자들이 얻는 직접적인 이득, 즉 지극히 주관적으로 제한된 것은 주체의 표현을 금지한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 철저히 시장에 적합한 것만이 생산된다는 선험성은 주관적 욕규, 즉 사물 자체에 대한 욕구를 솟아나게 하지 못한다. 온갖 치장으로 세성에 내놓고 분배되는 문화 산업의 생상물들은, 궤뚫어 볼 수 없는 메커니즘을 통해서일지는 몰라도, 손님들의 귀에 그들이 좋아하는 멜로디를 울려주면서 피아노 위에 올려진 돈 접시를 힐끗 보는 레스트랑 악사의 제스처를 되풀이한다. 문화산업의 예산은 수십 억에 다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돌아가게 만드는 기본 법칙은 이다. 산업화된 문화의 지나친 번쩍거림, 위생적인 청결은, 더 이상 호텔 급사장으로 보이지 않게 위해 귀족들보다 더 우아하게 차려입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호텔 급사장으로 보이게 되는 호텔 매니저의 연미복에서 풍겨나오는 저 수치심의 잔재나 악령을 쫓아버리려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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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렛 : '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는 유베날리스의 금언을 역전시킨 것.

 - <미니마 모랄리아>(테오도르 아도르노 · 길 · 2005년 ·  원제 : Minima Moralia. Reflexionen aus dem bescha"digten Leben, 1951년) p.257~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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