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담론의 질서』 : 배제(exclusion)의 과정(금기, 분할과 배척, 진위의 대립)

by 이우 posted Aug 02, 2018 Views 2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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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사회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그의 힘들과 위험들을 추방하고, 그의 우연한 사건을 지배하고, 그의 무거운, 위험한 물질성을 피해 가는 역할을 하는 과정들―이 존재한다. 유럽과 같은 사회에서, 우리는 배제(exclusion)의 과정들을 잘 알고 있다.

  1) 가장 분명하고 친숙한 것은 금지(interdit)이다.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어느 상황에서나, 누구나 그리고 무엇에 관해서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성에 있어서의 금기, 상황에 있어서의 관례, 말하는 주체에 있어서의 특권적인 또는 배타적인 권리. 우리는 이들에게서 끊임없이 수정되는 복잡한 그물을 형성함으로써 서로 교차하는, 서로를 강화해 주는, 또는 서로 상보적으로 작용하는 세 유형의 금지들의 놀이를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단지 우리의 시대에, 그 그물이 가장 촘촘하고 그 격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두 영역에만 주목하고자 한다. 성(性)의 영역정치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담론이란 결코 성을 진정시키고 정치에 평화를 부여하는 투명한 또는 중심적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이 특권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보다 위험한 힘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담론이 외관상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에 부과되는 금지들은 곧 욕구와 구너력에 대한 그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담론―예컨대 우리가 연구한 바 있었던 정신분석학―은 단지 욕구를 드러내는 또는 숨기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욕구의 대상인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가 우리에게 늘 가르쳐 주곤 했듯이, 담론이란 단지 투쟁들이나 지배의 관계들을 번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그를 가지고서 싸우는 것, 사람들이 탈취하고자 하는 그 권력이기 때문이다.

  2) 우리의 사회에는 배제의 다른 원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분할(partage)과 배척(reject)이다. 나는 이성과 광기의 대립을 생각하고 있다. 중세말 이래로 광인은 그의 담론이 다른 사람들의 담론처럼 통용되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진리가도 중요성도 가지지 못함으로써, 정당한 것으로 입증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의 행위나 계약을 하자 없는 것으로 만들지 못함으로써, 나아가 종교적 의식에도 참석하지 못함으로써, 무효화되었다. 또한 역으로 사람들은 그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상반되는 이상한 능력들, 숨겨진 진리를 말하는 능력이나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 다른 사람들의 이성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순수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유럽에서 광인들의 말은 청취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청취되었을 경우에는 그것이 진리의 말로서 성취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광인의 말은 발화되자마자 거부당함으로써 무(無)로 화해 버렸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그로부터 소박한 또는 교활한 이성, 이성적인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이성적인 하나의 이성을 해독해 내었다. 어쨌든, 배제되는 경우이든 이성에 의해 특별 취급을 받는 경우이든,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실존하지 않았다. (중략) 광인의 모든 담론들은 잡음으로 화했다. (중략)

  3) 이들과 나란히 배제의 세번째 체계로서 진위의 대립(l'opposition du vari et faux)을 고려하는 것은 위험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중략) 진과 위 사이의 분할은 자의적이지도, 제도적이지도, 수정 가능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인식론적 층위에 위치할 경우, 우리의 담론들을 통해 우리의 역사의 많은 세기들을 통과해 온 이 진리에의 의지는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여전히 무엇인가, 또는 매우 일반적인 형태에서 이 지식에의 의지를 지배하는 분할의 유형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배제의 체계와 같은 무엇(역사적인, 수정 가능한, 제도적으로 강제적인 체계)이리라. (중략)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후에는 가장 고귀한 진리는 이제 더 이상 담론이 무엇인가에, 또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있게 되었다. 진리가 언표행위의 의례화된, 효과적인, 적절한 실행으로부터 언표 자체로, 그 의미, 그 형태, 그 대상, 그 지시작용으로 이전되는 날이 온 것이다. 참된 담론과 거짓된 담론을 구분함으로써, 헤시오도스와 플라톤 사이에 하나의 분할이 수립되었다. 새로운 분할. 왜냐하면 그 후 참된 담론은 그것이 더 이상 권력의 실행에 연결되는 존재임이 아니게 됨으로써 귀중하고 가치있는 존재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들은 축출되었다. (중략) 지식에의 의지가 출현했다. 모든것이 거대한 플라톤적 분할로부터 출발해, 진리에의 의지가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인식 대상들의 평면들의 역사, 인식하는 주체의 기능들과 위치들의 역사, 인식의 물질적, 기술적, 도구적 투자들의 역사. 그리고 이 진리에의 의지는, 배제의 다른 체계들에서처럼, 어떤 제도적 토대 위에 입각해 있다. 그것은 교육학과 같은 그리고 물론 책들의, 편집의, 도서관들의 체계와 같은, 나아가 오늘날에는 과학자들의 집단들이나 실험실과 같은 실천들의 두께*에 의해 강화되고 또 동시에 갱신된다. (...)

 - 『담론의 질서*(미셸 푸코 · 새길 · 1993년, 원제 : L'ordre du discours, Gallimard, 1971년) p.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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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순수하게 언어적 차원에서만 기능할 수없다. 그것이 사용되기 위해서는 많은 비언어적 토대들이 사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저작들은 책을 생산해내는 산업을 통해 형성되며, 연극적인 언어는 무대의 장치들을 통해 형성된다. 롤랑 바르트는 언어의 이러한 부분을 '언어의 두께'라고 말하고 있다. '실천적인 두께'란 바로 권력과 욕구의 놀이를 함축하는 이 언어의 두께를 말한다. 조심할 것은 푸코가 '언어의 두께'라는 말을 쓸 때는, 바르트와는 달리, 무엇인가를 단지 가리킬 뿐인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어떤 숨겨진 의미들, 역사적으로 축적된 의미들을 풍요롭게 담지하고 있는 언어들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푸코는 바르트적인 의미의 언어의 두께를 말할 때는 '언어의 물질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담론의 질서』는 1971년, 미셀 푸코의 꼴레쥬 드 프랑스 취임 강연을 역자 이정우가 완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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